<물>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김숨 장편소설
김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표지에서부터 '물' 한 방울이 번져 있다. 그래서 급기야는 그 '물' 한 방울이 삼백만톤의 홍수 아닌 홍수로 번져가고 때로는 녹슨 물이나마 한 방울도 찔끔거리지 않는 '갈증'과 '공황'의 상황으로도 전이된다. 결국 이 소설은 '물이 문제다' 

 서사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불'인 아버지, '물'인 어머니, 그리고 소설의 화자 '나'인,'소금', '나'와 쌍둥이인 '금', 그리고 동생 '공기' 이렇게 부모와 딸 셋이 이룬 가정에서 어머니가 아닌 통상의 '물'을 둘러싼 그로테스크한 일들이 작품 전편에 그려진다.   

유일하게 '혼인'을 경험한 '나'는 더 이상 남편이 소금의 맛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깨닫고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마침 공교롭게도 같은 날, 어머니인 '물'은 장차 자신이 그곳에 담기게 될, 자신의 주검이 누워 부패하게 될 수족관을 들여오고 어머니와의 갈등 불화로 가출했던 아버지인 '불' 또한 돌아온 탕자로 집에 도착한다. 얼음과 물 그리고 가끔은 수증기로 변하는 어머니는 그런 과거의 일상을 반복하고 있고 빛나는 외양과 찬란란 정신으로 사랑받던 쌍생아 동생 '금'은 이른바 정신장애를 겪고 있으며 막내인 '공기'는 '하늘의 영광, 우리 주 예수'를 찬미하는 종교적 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 '불'인 아버지는 낮잠과 음주로 소일하는 무위도식의 생활을 잇는 중에 '나'인 '소금'만이 고군분투하며 가족생활의 이모저모를 꾸려가는데.....먹어야 할 물, 씻어야 할 물--즉, 생존의 물, 생명의 물--이 갑작스레 끊어지면서 우여곡절의 사건이 벌어진다. 가족의 특이한 일상과 기묘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대처하며 변화 혹은 대응을 하는 이는 오직 화자인 '나', '소금'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늑하고 운치있는 풍경을 자아내던 저수지가 있는 시골마을을 뒤엎어 공장이 들어서고 축사가 세워지는 한편, 아버지가 할머니께서 물려주신 저수지를 메워 '공중호텔'(아마도 말 그대로 물을 쫓아낸 후 만들어진 허망의 욕망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허공 속에 붕 뜬 구조물, 혹은 사상누각이라는 뜻이리라)을 만들면서 평화로운 '자연'은 파괴되고 혼돈의 '인공'이 생겨나는데, 급기야 그 인공의 대표물이자 이 가족의 쉼터인 '집'에 변고가 생긴다. 수도가 모두 제 구실을 못하고 먹을 물마저 없어지는 비참 상황이 발생한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수도 계량기는 마치 팽이 돌듯 빠르게 돌아가고 이를 이유로 등장한 수도검침원인 노파가 밀린 물세를 독촉하는 한편, 가족의 삶의 터전인 집이 거액의 은행대출로 지어졌음이 드러나고 급기야 대출금 미상환에 따른 은행의 최고와 차압이 뒤따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막힌 수도관을 찾느라 집은 군데군데 벽이 뚫리고 허물어지며 수도관 수리를 위해 느닷없이 등장한 수상한 배관공과 '금'의 동침으로 '금'은 잉태하고 어머니는 죽음을 맞아 텅 빈 수족관에 시신이 방치된다. 잠시 자신의 연원을 찾아 새로운 기운을 되찾고자 하는 '나' '소금'은 '소금 섬'을 찾는 짧은 여행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금'은 출산하는데 자신의 정신장애에 비견되는 '신체장애아'인 '납'을 세상에 내놓는다. 

나오지 않는 '물'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점철되는 가운데 드디어 개발로 인해 사라진 300만톤의 물이 한꺼번에 넘쳐 흐르며 집은 마치 쓰나미를 맞은 바닷가 마을마냥 폐허처럼 변하고 만다. 자나 깨나 오직 '신'의 은혜와 기적, 기도와 찬양으로 일관하던 '공기'와 신생아 '납'의 어미 구실도 못하던 '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겨우 목숨을 건진 아버지 '불'과 '나', 그리고 어린 아이 '납'만이 살아남아 풍비박산난 집을 추스린다.       

작품은 결국 살아남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납이라는 3대의 동거 속에 아버지가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 개축하여 '공중호텔' 간판을 새로이 다는 것으로 대강의 마무리를 하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많은 알레고리를 엮어 우리에게 '물' '불 '공기' '금' '소금' '납'을 천착하게 하는데, 이는 당연히 '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기기묘묘한, 비정상적 가족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느낌을 거부하는 각종 에피소드를 그저 소통부재의 가족해체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작가는 우리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물에 수장된 고대도시를 열거하는 등(이 점에 있어서는 작가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공기'가 그토록 매달리는 신앙, 즉 기독교 경전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도 한 몫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인류가 자랑하는 위대한 성취라는 것들이 결국은 '물거품'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수 천년 동안 이룩한 문명 전반에 대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물'과 '공기'(우리 모두를 포함하여 살아있는 것들은 바다속 깊은 곳에서 무기물의 합성을 통한 최초의 유기체로 시작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 미세한 유기체가 공기로 인하여 처음의 식물로 변했고 드디어는 원시동물군을 생성하지 않았던가? ), 인류문명의 근원인 '불', 그리고 생명유지에 필요한 '소금' 혹은 삶의 도구으로서의 '금'과 '납'(금속)을 등장시켜 전하고자는 상징은 사고의 영역을 거시적으로 넓혀갈 것을 요구하고 있음이다. 

그런데 작가는 지나간 과거 또한 물에 대한 우리의 반역이 비극을 초래하고 재앙을 만들어 냈듯이 앞으로의 미래 또한 그리 낙관적이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3세대로 태어난(엄밀히 말하면 거대한 물을 소유했던 할머니까지 포함하여 4대째라 할 수 있지만) '납'이 '등골이 휘어진' 비정상 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납'은 할아버지인 '불'의 정기를 받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권위와 폭압의 상징인 '아버지'가, 거대한 탐욕과 식탐으로 대변되는 '불'의 위력이 '납'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은 '희망적' 이라기보다는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지 않겠는가? 

흥미보다는 고뇌어린 탐색을 요구하는 '소설읽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수많은 알레고리의 연속인 곡절을 따라가면서 '해석'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식적으로 대비한,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도표을 보며 줄잇기를 해가는 듯하여 부담스러운 기분도 든다. 글로 풀어 쓴 '해석학이론' 소설문장으로 바꾼 '바슐라르의 미학에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독자에게 생경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작가가 깊이 탐구했음직한 '상상력의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상상력의 미학에 대한 대강의 거친 요약을 사족으로 덧붙여 본다.          

****(서평리뷰에 대한 사족) 

바슐라르의 상상력 연구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 분석을 통해서도 쉽게 제거되지 않는 인식론적 방해물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객관적 앎/지식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바로 상상력이다. 그런데 바슐라르에 의하면 상상력은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보편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원형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는데, 상상력이 이 원형을 향해가는 정신의 자체적인 힘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원형과 외계의 사물 사이에 놓인 상상력은 끊임없이 사물을 원형에 가깝게 변형시키려는 관성을 갖게 된다.

바슐라르 이전의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하는 정신 기능이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은 대상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의 물질성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물은 일정한 형태가 없지만 물의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슐라르는 물, 불, 공기, 대지의  물질성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이 유형화된다는 사원소론을 정초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할 뿐 아니라 변형하고 극단적으로는 이미지를 지워버림으로써 <이미지 없는 상상력>의 단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물 위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취한 나르시스의 신화는 상상력의 작용을 잘 보여준다. 거울에 뚜렷하게 비친 얼굴보다 물 위에 흐릿하게 비친 얼굴이 더 아름답다. 또 물 위에 핀 연꽃을 찍은 사진보다 그것을 그린 모네의 회화가 더 아름답다. 이러한 이유는 물위의 영상이나 회회의 영상은 흐릿하지만 그것 들여다보는 인간의 상상력은 수면의 파동을 따라, 또 그림을 따라 끊어진 부분을 이어가면서 하나의 영상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르시스의 경우 물 위의 영상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모네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상상력의 밑바닥에 대상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이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을 심리적, 사회적 요인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자체에 존재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상상력은 과학에 있어서는 인식론적 장애물이지만 문학/예술에 있어서는 미적 체험과 존재의 전환을 경험할 수도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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