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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의존성, 지표성, 자연종

 

지표사와 지시사

 

다음 단어들을 보자:

 

, 나를, 저는

내일

, 당신

오늘

, 그녀

어제

그를, 그녀를

그의, 그녀의

그들, 그들을

지금, 그 때

우리, 우리를

여기, 저기

이것, 저것, 그것

너의, 우리의

이것들, 그것들

나의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지표사(指標詞)indexical이다. ‘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는 분명 단칭용어이긴 하지만 라는 단어가 지시체를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통상적인 단칭용어인 로테르담은 사용될 때마다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반면 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라는 단어 자체가 특정 지시체를 갖는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각각의 발화(發話)utterance가 지시체를 갖는다고 하는 편이 올바르다. ‘의 지시체는 그것이 발화되는 경우의 화자(話者)speaker, 즉 발화가 이뤄진 시점에 를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번엔 오늘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늘에 대한 각 발화는 그 단어가 발화된 시점이 포함된 그 날을 지시한다. 이와 유사하게 여기는 그 단어가 발화된 바로 그 장소를 지시한다(‘여기지시사(指示詞)demonstrative에 해당하기도 한다. 지시사에 대해서는 곧 살펴볼 것이다). 위의 단어들은 모두 이와 유사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표사의 지시는 발화의 맥락(脈絡)context of utterance에 따라 달라진다. 반면 태양이나 로테르담과 같은 통상적인 단칭용어는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과 무관하게 항시 동일한 사물을 지시한다.

따라서 지표사의 언어적 의미linguistuc meaning는 가능한 발화의 맥락에 따라 개항token으로서의 지시체를 결정하는 규칙rule(내지 함수function)이라 할 수 있다. 이 규칙은 각각의 가능한 발화의 맥락에 대해 그 맥락에서 발화된 지표사의 지시체를 명시한다.

시제(時制)tense는 시간의 측면에서 지표성indexicality을 띤다. 어떤 사람이 여기 눈 와하고 말한다면 이는 지금 여기에 눈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과거 시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눈이 왔었어또는 눈 오고 있었어하고 말할 것이며, 미래 시점에 대해서는 눈이 올 것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일부 지표사들은 지시사(指示詞)demonstrative에 해당하기도 한다. ‘저것that이라는 단어를 보자. 이 단어가 지시사로 사용될 경우, 말해지는 대상이 무엇인지가 대화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다지 명백salient하지 않다면, 화자는 자신이 의도하는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그 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그와 유사한 몸짓gesture을 취해야 한다. 예컨대 나무들이 울창한 숲에서 화자가 저 나무 진짜 멋있다하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의도하는 나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가리키지 않는다면, 화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였던 바를 성공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한 셈이다. 그 말의 온전한 의미가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화자는 자신이 의도하였던 나무를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등의 동작을 취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몸짓 내지 지시행위가 반드시 명시적explicit인 것만은 아니며 암묵적implicit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탁 트인 평원을 걷다가 지척에 단 한 그루의 나무만을 맞닥뜨린 상황이라면, 그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더라도 저 나무 진짜 멋있다는 말의 의미는 온전히 전달된다. 굳이 가리키지 않아도 청자는 화자가 어떤 나무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시사가 성공적으로 사용되기 위해 동반되는 몸짓은 -지시화(-指示化)demonstration라 칭해진다. ‘지금과 같이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지시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표사는 순수 지표사pure indexical라 칭해진다. 다르게 말해 순수 지표사가 발화되는 경우의 지시체는 순전히 언어적인 발화의 맥락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발화의 맥락이란 거칠게 말해 하나의 발화가 이뤄지는 혹은 이뤄질 수 있었던 상황situation을 말한다. 발화맥락에는 대체로 다음 항목들이 포함되며, 반드시 이것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화자 및 청자(의 동일성), 시간, 장소.

 

라든가 지금은 단순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기실 대부분의 지표적 표현indexical expression들은 복합적compound이다. ‘내 말[]’, ‘저 커다란 붉은 건물’, ‘그저께the day before yesterday등은 복합적인 지표적 표현들이다.

지표적으로 사용되는 많은 단어들이 지표적이지 않게 사용되기도 한다. 다음 두 문장을 보자:

 

당나귀를 가진 모든 남자는 그것it을 때린다.

Ottoline Morrell 양은 Ludwig Wittgenstein을 만났는데, he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두 맥락에서 그것는 지표사가 아니라 상호-지시cross-reference를 위한 장치인 재귀대명사reflexive pronoun이다. 이러한 단어들이 재귀대명사로 쓰이는 경우 그 지시체는 발화의 맥락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첫 번째 사례에서 그것은 논리학 표기법에서 쓰이는 속박변항 ‘x’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바, 이 문장에서는 아무런 특정 당나귀도 지시되고 있지 않다[(즉 특정 당나귀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은 이뤄지지 않는다)]. 두 번째 사례에서 는 그 자리에 ‘Ludwig Wittgenstein’을 한 번 더 씀으로써 문장의 의미 손실 없이 대체될 수 있다. 여기서 의 지시체가 결정되는 것은 ‘Ludwig Wittgenstein’과 이른바 조응(照應)(대용어(代用語))anaphoric1)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렇듯 어떤 단어들은 지표사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도 아예 무언가를 지시하는 역할을 하지 않거나 지표사와 다른 방식으로 지시체가 결정된다.] 반면 다음 문장에서는 위와 동일한 두 단어들[(‘it’, ‘him’)]이 지표사의 기능을 하고 있다:

 

(파도타기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다른 이에게)

엄청 크다! It's big one!

(철조망을 넘어 탈옥하려는 수감자를 발견한 한 교도관이 다른 교도관에게)

쏴버려! Shoot him!

 

1)어떤 언어표현이 다른 언어표현을 지시할 경우 전자를 조응 혹은 조응적이라고 한다. 앞서 이미 말해진 표현을 언급하는 대명사나 정관사 등이 조응적 표현이다. ‘철수가 순희를 보았을 때 그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에서 대명사 그녀는 각각 앞에 나타난 철수순희를 가리킨다. ‘He kept a cat and took very good care of the cat’에서 ‘the cat’의 정관사는 앞에 나온 ‘a cat’을 가리킨다.” (김방한, 언어학의 이해, 민음사, 2012(신장판), 160-1.)


지표성 혹은 맥락-상대성context-relativity(맥락-민감성context-sensitivity)은 명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대체로 암묵적인 경우가 많다. 서로 먼 거리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우리는 보통 눈 오고 있어라 말하지 굳이 여기 눈 오고 있어라 말하지는 않는다. 일상담화에서는 화자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지 굳이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더라도 의도된 청자는 화자의 발화를 대체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을 드러내는 지표사가 사용되지 않더라도] 대화가 이뤄지는 데에 큰 지장이 없는 편이다.

지표성의 암묵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서 양화사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일상적인 담화에서 우리가 모든, 전부라는 단어를 통해 무엇이 되었든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저녁 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한 집주인이 요리 다 됐다everything's cooked하고 말한다면, 이 말로써 그 사람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요리되었다, 혹은 존재하는 것, 존재해온 것, 존재할 것이 전부 요리되었다를 의미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곧 있을 저녁 파티를 위한 음식들이 모두 준비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적인 논리학 용어를 활용하여 말하자면, 이 사례에서 화자는 자신의 말을 해석하는 데에 청자가 활용할 법한 지식 내지 정보에 근거하여, 양화사의 논의영역domain of quantifier을 암묵적으로 제한implicitly restrict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청자는 모든 x하다는 화자의 발화를, 양화사의 범위를 획정(劃定)하는 술어 F가 활용된 모든 Fx하다로 해석하게 된다. 위 사례의 경우 F의 자리에는 ‘𝛼는 곧 있을 저녁 파티를 위해 실제로 준비된 요리이다정도의 술어가 취해질 것이다.

 

 

자연종 용어와 본질에 대한 Putnam의 견해

 

Putnam1975년 논문 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에 제시된 유명한 쌍둥이 지구논증“Twin Earth” argument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주지하다시피 물은 H2O이다. 이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지구와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강이나 바다에 있는 투명한 액체가 H2O가 아니라 모종의 화학적 구성체 XYZ라는 점에서만 다른 그러한 행성을 가정해보자. 당면 목적을 위해 XYZ는 물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XYZ는 통상적인 기압에서 100에서 끓고, 마심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등 물과 정확히 동일한 작용을 한다. 그 물질은 과연 물인가, 아닌가? Putnam은 아니라고 답한다. 어떤 물질이 되었든 H2O(H3O)가 아닌 이상, 그 외의 모든 측면에서 물과 아무리 비슷하다 하더라도 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Putnam에 따르면 우리는 과 같은 용어를 이른바 자연종(自然種) 용어natural kind term로서 사용하는데, 자연종 용어는 Kripke가 말한 고유명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다소 이상화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종 용어를 정의할 때(혹은 자연종 용어의 지시를 고정할 때) 그 지시체가 되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라는 단어로써 나는 저것that stuff을 의미한다. 이는 앞 에서 보았듯이 Haydn의 부모가 그 이름으로 우리는 이 아이this child를 의미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고유명 ‘Josef Haydn’의 지시를 고정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또 다른 자연종 용어인 호랑이역시 마찬가지로서, 우리는 한 동물을 가리키면서 호랑이그 동물that animal과 동일한 종에 속하는 동물 그리고 오직 그 동물에만 적용되는 단어라고 결정함으로써 호랑이의 지시를 고정한다.

자연종 용어는 물이나 금[]과 같은 물질substance 및 호랑이와 같은 생물종species을 포함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한 자연종 용어를 도입할 때 특정 종의 표본sample을 직접 가리키면서 그 단어는 그 표본과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종류의 술어에 관하여 동일한 자연종이라는 표현이 하는 역할은, 고유명에 대하여 동일한 대상이 하는 역할과 같다. [‘“Josef Haydn”이라는 이름으로 저 사람을 의미한다에서 지표사 저 사람저 사람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고정 장치로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라는 단어로 저것that stuff을 의미한다에서 지표사 저것저것과 동일한 자연종에 속하는 것을 가리키는 지시-고정 장치로 활용된다.]

이러한 고찰에 따르면 과 같은 용어를 기술적으로 정의descriptive definition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정의방식이다. [이는 역시 앞 에서 살펴본바 ‘Mozart’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기술구를 활용하여 정의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을 가령 노랗고 빛나는 연성(延性) 금속과 같은 식으로 정의하여, 이것이 금에 대해 그리고 오직 금에 대해 참true of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가 에 대한 동의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노랗고 빛나는 연성(延性) 금속에 의미를 주지는give the meaning 않는다. 다음 정의를 생각해보자:

 

=df 대체로 장신구를 제작하는 데 활용되는 노랗고 빛나는 연성 금속

 

이는 분명 의심할 바 없이 참이긴 하지만, 단지 우연적으로만 참이다. 금이 장신구 제작에 활용된다는 것은 단지 현실세계에서만 성립하는 우연적인 사실이며, 다른 가능세계에는 노랗고 빛나며 연성을 띠는 금속이면서도 분명 금은 아닌 물질이 존재한다(후자 사례는 현실에도 존재하는데, 황철광은 금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지만 FeS2의 화학식을 갖는바 금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동일한 종에 속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금과 같은 원소element의 경우 동일한 원자번호atomic number(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의 수)를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두 사물은 동일한 종에 속한다. 물과 같은 화학적 복합물의 경우 동일한 분자구성composition of molecules을 갖는지 여부가 기준으로서, 물의 각 분자는 하나의 산소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 즉 H2O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학적 종의 경우엔 다소 불분명한 데가 있긴 하지만, 특정 계통 유형에 속하는 것, 특정 DNA 구조를 갖는 것, 교미함으로써 번식력을 갖춘 자손을 출산할 능력을 갖추는 것 등을 거론할 수 있겠다.

자연종 용어는 진흙 투성이인’, ‘[‘해충’, ‘유해조류등에서 사용되는]해로운vermin등의 단어들과는 달리 전혀 기술적이지 않다. 하지만 특정 기술구는 자연종 용어에 대해 특권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물을 가리키고 있는 중이라면, 필연적으로 어떤 것은 H2O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바로 저것이다. 동일한 분자구성을 갖는 것이 복합물질의 동일성 기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은 참이다:

 

필연적으로, = H2O.

 

이러한 고찰에 따라 우리는 H2O가 물의 본질(本質)essen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H2O가 바로 물 그 자체이다.2) 하지만 우리는 물이 H2O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며, ‘‘H2O’가 동의적인 것은 아니다. 물이 H2O임을 모르는 사람은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것일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언어적 지식linguistic knowledge까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 역시 문장 내에서 이라는 단어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으며, 물을 가리키면서 은 저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原註) 다만 한 사물이 필연적으로 여차여차하다고 해서, 그 여차여차함이 그 사물의 본질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가령 한 사물이 그것 자신만으로 구성된 단위집합unit class의 원소가 됨이라는 속성은 각 대상이 갖는 필연적인 속성이다. 예를 들어 Madonna는 집합 {Madonna}의 원소로서, 이 집합에 속한다는 속성은 Madonna 그리고 오직 그녀만이 필연적으로 예화하는 속성이다. 하지만 그것이 Madonna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K. Fine(1994), 본질과 양상성Essence and Modality참조.


따라서 Hume이나 Kant 등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바와는 반대로, 어떤 필연적 참은 경험적(후험적)이다. 이는 매우 기이한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동물이라는 것은 분적석 내지 필연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다소 허황되긴 하더라도 상상가능한conceivable 가능성 하에서라면, 예컨대 고양이라 불리는 동물들이 실은 전부 외계인에 의해 조종되는 로봇인 상황에서라면, ‘고양이는 동물이다는 거짓일 것이다.

주의할 사항이 있다. Putnam(Kripke)의 견해에 대해 일반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모든 일반용어가 자연종 용어라고 생각하는 것, 모든 용어가 본질을 가리킨다거나 혹은 모든 용어가 고정 지시어로서 그 지시체를 직접지시한다고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든 명사가 직접지시적이거나 고정 지시어인 것은 아니다. 가령 언덕이나 진흙 등의 개념은, 그 단어가 가리키는 역할을 실제로 실현하는realise 물질의 본성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나 호랑이와 달리 언덕이나 진흙이 어떤 숨겨진 본성(즉 우리가 언덕과 진흙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바와는 전연 다른 본성)을 기저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은 상상가능하지 않다. ‘내지 물 같은watery호랑이내지 호랑이-모양의tiger-shaped와 다르게, ‘언덕진흙은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의 실현자(實現者)realiser에 대한 개념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 역할 자체의 개념을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멍청한’, ‘예쁜등의 형용사, ‘흔들다’, ‘방해하다등의 동사, ‘바쁘게’, ‘중심적으로등의 부사 역시 자연종 용어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 언어의 대부분은 직접지시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은 기술적인 단어들로 구성된다. (한 가지 고려해봄직한 의문은 인공물artefact을 가리키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가령 책의 개념은 특정한 인공적 본질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인공적 종artefactual kind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직접지시적인 개념이 아니라 기술적인 개념인가?)

자연종과 그 본질에 대한 Putnam의 설명은 실질적 본질real essence과 명목적(名目的) 본질nominal essence을 구분하는 J. Locke의 논의와 비슷한 데가 있다. Locke에 따르면 명목적 본질이란 우리가 한 종의 사례들instances을 가려내기 위해 사용하는 규칙으로서, 대체로 [감각적으로] 관찰가능한 속성observable property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금의 명목적 본질은 노랗고 빛나는 연성의 금속과 같은 식이 된다. 반면 한 종의 실질적 본질이란 그 종의 기저(基底)에 있는 본성underlying nature이다. Locke[경험론자이자 명목론(名目論)자이기에] 우리가 실질적 본성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Locke는 실질적 본질을 알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이 [우리가 자연종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Putnam의 주장으로 인해] 틀린 것으로 입증된다 해도 이를 오히려 반가워할 것이다.

자연종에 대한 Putnam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자연종 용어가 이것과 같은 지표사로서 기능할 뿐, ‘오렌지 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덩치 큰 고양잇과 육식동물과 같은 그 어떤 맥락-독립적context-free인 기술구와도 전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3) 자연종 용어의 지시는, 그 용어가 도입될 때 실제로 가리켜지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고정된다.


3) (原註) 다만 일부 자연종 용어는 지표사가 아니다. 예컨대 버클륨과 같은 원소의 경우 그에 속하는 사례가 발견되거나 합성되기 이전에 정의되었다.


고유명에 대한 Kripke의 설명에서 고유명의 지시체가 고정되는 절차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고유명 역시 지표사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Haydn의 부모가 태어난 아기를 가리키면서 처음으로 이 애를 “Josef”라 칭하자하고 말하는 경우처럼, 고유명의 사용과 얽힌 인과적 사슬이 최초로 시작되는 시점에 실제로 가리켜진 대상이 바로 그 고유명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앞 에서 살펴보았듯이(‘지시 고정하기: 기술구’) 고유명의 지시체를 고정하는 데에 모종의 기술구가 활용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종 용어가 도입되는 경우에도 지시를 고정해주는 기술구reference-fixing description가 활용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이라는 단어로써, 실제로 강에서 흐르고 비가 되어 내리는 그러한 것the stuff을 의미한다와 같은 식으로 의 지시를 고정할 수 있다. 다만 고유명의 담지자가 만족하는 기술구를 통해 고유명의 지시를 고정한다고 해서 그 기술구가 고유명에 의미를 주지는 않는 것처럼, 이 경우에도 실제로 강에서 흐르고 비가 되어 내리는 그러한 것이라는 기술구가 이라는 자연종 용어와 동의적인 것은 아니다.

 

 

의미는 머릿속에 있는가?

 

Frege주의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가령 물벼룩은 물속에 산다와 같은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그 문장을 말하거나 이해하는 사람의 내적인 심리상태internal psychological state,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두뇌상태brain-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듯하다. 지표사에 대한 Putnam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쌍둥이 지구가 우리의 지구와 정말로 똑같다면 거기엔 당신의 도플갱어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도플갱어는, 당신의 신체가 H2O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당신의 도플갱어의 신체가 XYZ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당신의 정확한 복제물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신과 그 도플갱어가 물벼룩은 물속에 산다고 말할 때 둘은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문장에서 이라는 단어를 통해 당신은 H2O를 의미하고 도플갱어는 XYZ를 의미하기에, 당신이 말한 문장-개항의 진리-조건은 물벼룩이 H2O에 산다는 것이고 도플갱어가 말한 문장-개항의 진리-조건은 물벼룩이 XYZ에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경우에도 당신과 도플갱어의 두뇌상태는 정확히 동일할 것이다(, 여기서 두뇌상태의 동일성 여부는 신체가 H2O로 이루어져 있는지 또는 XYZ로 이루어져 있는지와 무관하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당신이 말한 바의 의미가 당신의 두뇌상태에 의해서는 결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오히려 당신의 말의 의미는 당신 주변의 환경, 즉 당신이 처해 있는 물리적 맥락에 좌우된다. 지구에 사는 우리가 로서 알고 있는 바는 쌍둥이 지구에 사는 쌍둥이 지구인이 로서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 쌍둥이 지구로 우주여행을 간 당신이 XYZ가 담긴 잔을 보며 , 물이다!’ 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틀린 말을 한 셈이다. 쌍둥이 지구인이 그것을 이라 칭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이라 칭할 수 없다. 지구에서 쓰이는 단어 과 쌍둥이 지구에서 쓰이는 단어 은 동일한 표기형태와 동일한 음을 가지면서도 뜻을 달리하는 동철이의어(同綴異義語)homonym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의미론적 외재주의semantic externalism에 대한 논증의 기본 골자이다. 의미론적 외재주의에 따르면 당신과 도플갱어가 동일한 개념을 갖고 있거나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둘의 발화는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의미론은 심리학에 수반(隨伴)supervene4)되지 않는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는 내적 상태internal state에 수반되지 않는다. 다소 기이하고 충격적이게 여겨지는 귀결이긴 하지만, 당신과 쌍둥이 지구의 당신이 나는 우리 엄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표현되는 명제가 당연히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실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지구에 있는 당신의 엄마이지 쌍둥이 지구에 있는 도플갱어-엄마는 아니다.

 

4)임의의 속성 AB에 대해, AB에 수반된다면, B의 차이가 없이는 A의 차이도 없다. 가령 어떤 두 조각품이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동일한 색과 크기와 모양 등을 지니고 있다면, 두 조각품은 동일한 정도로 아름다운 셈이다. 또는 조각품에 어떤 식으로든 물리적 변형을 가하지 않는 이상 그 조각품이 갖는 아름다움 역시 동일하게 유지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각품이 예화하는 미적 속성은 조각품의 물질적 재료가 예화하는 물리적 속성에 수반된다. 의미론적 외재주의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론적 속성은 언어 사용자의 내적인 심리상태가 예화하는 속성에 수반되지 않는다. 의미론적 속성이 심리적 속성에 수반된다면 심리적 차이 없이는 의미의 차이가 없어야 하는데, Putnam의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은 심리상태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의미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맥락으로서의 현실세계

 

자연종 용어에 대한 Putnam의 고찰은 과 같은 단어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생각보다 더욱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입되어 있는 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에 비해 훨씬 적게 관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이것은 물이다와 같은 문장의 의미가 발화의 맥락에 따라 잠재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어떤 파급력을 지니는지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Jones가 가능세계 W에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가 기르는 개는 Fido이다. Jones가 정확히 오후 한 시에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오후 한 시에 Fido에게 벼룩이 있는 경우에만 참이다. Jones가 같은 말을 오후 여덟 시에 또 한다면, 그 말은 오후 한 시가 아니라 오후 여덟 시에 Fido에게 벼룩이 있는 경우에만 참이다. 이렇듯 그가 말한 바는 발화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즉 두 경우에 Jones가 표현한 명제는 각기 다른바, 왜냐하면 에게 벼룩이 있다는 동사가 지닌 현재시제는 Jones가 그 개에게 현재 벼룩이 있다고 말했음을, 즉 발화가 이뤄진 시점에 벼룩이 있다고 말했음을 나타내는데, 그러한 발화의 시점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JonesW와는 다른 가능세계 W에 존재한다 해보자. 그 세계에서 JonesFido와는 다른 개 Spot을 기르고 있다. 이 경우 Jones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고 말한다면, 분명 그의 말은 발화가 이뤄진 시점에 Spot에게 벼룩이 있는 경우에만 참이다.

이제 JonesFido를 기르고 있는 W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번에는 Fido에게 벼룩이 없지만, Jones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해보자. 그의 말은 다음 둘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1) 어떤 가능세계에서, Jones는 개를 기르고 있으며 그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

(2) 어떤 가능세계에서, Fido에게는 벼룩이 있다.

 

그런데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Jones의 말은 분명 (2)로 해석되어야 할 듯하다.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할 때 Jones는 그가 현실에서 기르고 있는 개, W에서 기르고 있는 개에 관해 말하고 있는바, 그 개에게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Jones의 말은 바로 그 개 Fido에게 벼룩이 있는 가능세계가 적어도 하나 존재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 Fido가 아닌 어떤 다른 개를 그가 기르고 있고 그 개에게 벼룩이 있는 가능세계가 존재함을 의미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번에는 W로 한 번 더 가보자. W에서 Jones가 기르는 개 Spot에게도 벼룩이 없다고 해보자. 세계에서 Jones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 경우 그는 Fido가 아니라 Spot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Jones나의 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어떤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Jones가 어떤 가능세계에 존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Jones가 그 말을 W에서 발화한다면 그 세계 W에서 기르고 있는 개에 관해 말하는 것이고, W에서 발화한다면 그 세계 W에서 기르고 있는 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고찰에 따라 우리는 앞서 나열했던바 발화의 맥락을 이루는 지표들의 목록에 다음과 같이 세계라는 항목을 추가해야 한다:

 

맥락적 지표contextual indices: 시간, 장소, 화자, 청자, 세계.

 

물론 그 어떤 문장도 현실이-아닌non-actual 가능세계에서 현실적으로actually 발화될 수는 없다. [어떤 문장이 실제로 발화된다면 그 발화는 현실세계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일상적으로 우리는 현실세계만이 발화가 이뤄질 수 있는 유일한 맥락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문장들은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에서도 발화될 수 있다(이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든가 늑대가 짖는다든가 하는 등의 여러 사건들이 다른 가능세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발화의 맥락이 전부 현실세계라 하더라도, 발화의 맥락이 필연적으로 현실세계 뿐이라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발화의 맥락은 현실세계로 고정되지만, 가능적인 발화의 맥락은 현실세계 이외의 가능세계도 포함한다.]

논의 과정에서 시사되듯이 나의 개라는 표현은 지표사인 동시에 고정 지시어이다. 우선 나의 개가 기르는 개를 의미하[며 이는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지시체를 갖]기에 지표성을 띤다. 그리고 나의 개가 고정성을 띠는 이유는,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가 다른 가능세계에서 발화될 경우 갖게 될 진리치를 평가할 때, 우리가 동일한 개에 대해 각 가능세계에서 벼룩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게 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는 나의 개와 같은 어구가 -고정적인 방식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점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저 개가 내 개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말할 수 있다. 그 말로써 의도되는 바는 그 개가 그 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경우 나의 개[앞서와 같은 고정 지시어로서가 아니라] ‘내가 기르게 된 개와 같이 -고정적인 기술구로서 쓰이고 있는 셈이다. ‘나의 개와 같은 표현이 고정적으로 사용되는지 여부는 대체로 화자의 의도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내가 기르는 개가 비글이라고 가정한 채 다음 두 문장을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다른 개를 선택했더라면, 나의 개는 프렌치불독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다른 개를 선택했더라면, 나의 개는 다른 사람이 기르게 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 문장에서 나의 개-고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문장을 통해 의도되는 바는 내가 실제로 기르고 있는 개인 비글이 프렌치불독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기르게 된 개가 비글이 아닌 프렌치불독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경우 나의 개-고정적 표현인 내가 기르게 된 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문장에서 나의 개는 고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문장을 통해 의도되는 바는 가상적인 상황에서 내가 선택했을 그 개가 나의 개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개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기르는 개 비글이 다른 사람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이 경우 나의 개는 고정적 표현인 내가 실제로 기르고 있는 그 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2차원주의 의미론: 발화의 맥락 평가의 환경

 

5말미에서 우리는 Kripke에 관한 논의에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이는 Putnam에 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utnam의 주장대로 물이 필연적으로 H2O라는 점을 받아들여보자. 아무리 그 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물이 H2O가 아니라 XYZ인 것으로 밝혀졌을 수도 있다는 직관을 우리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물이 XYZ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 상상가능하다imaginable/conceivable[다르게 말해 선험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는 쌍둥이-지구 사고실험을 상상할 때 우리가 떠올리도록 요구받았던 바로 그 상황인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물이 필연적으로 H2O이긴 하지만, 만약 XYZ-세계가 현실세계였더라면, 물은 XYZ였을 것이다. 작금에 2차원주의적 의미론Two-Deimensional Semantics이라 널리 칭해지는 이론은 바로 이러한 점을 다루기 위해 제시되었다.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라면, 하나의 서술문이 발화됨으로써 한 명제가 표현되며 그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명제란 특정 맥락에서 발화된 단어들의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 명제는 말해진 것what is said이다. 바로 앞 에서 우리는 발화를 통해 무엇이 말해지는지를 결정해주는 맥락적 매개변수contextual parameter들의 목록인 시간, 장소, 화자 및 청자의 동일성 등에 발화가 발생하는 세계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앞 절에서 논의를 진행하면서 우리가 수행했던 또 다른 작업이 있다. 우리는 임의의 명제를 취한 뒤 그것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at a possible world, 혹은 한 가능세계와 연관지어with respect to 평가해볼 수 있다. 즉 그 명제가 그 가능세계에서 인지 여부를 물어볼 수 있다. 한 명제는 [자체적으로 특정 진리치를 갖는 게 아니라] 각 가능세계에 따른 진리치를 갖는다.

이에 우리는 David Kaplan을 따라 다음과 같이 발화의 맥락과 평가의 환경circumstance of evaluation을 구분해야 한다:

 

문장-의미

+

발화의 맥락

명제

명제

+

평가의 환경

진리치

 

여기서 문장-의미enstence-meaning, 주어진 문장이 각각의 가능한 발화맥락possible context of utterance에서 발화될 경우 어떤 명제가 표현하는지를 결정하는 언어적 규칙linguistic rule으로서, Kaplan은 이를 문장의 특성character이라 칭하였다. 이에 위 규정의 첫 줄을 Kaplan의 용어법으로 다시 표현해보자면, 한 문장의 특성은 주어진 맥락에 따라 어떤 내용content 즉 명제가 표현되는지를 결정한다. 한 문장 전체의 특성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바 지표사를 포함한 개별 표현들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지표적 명사 여기의 특성은 어디가 되었든 그 단어를 말하는 화자가 존재하는 그 장소를 결정하는바, 주어진 화자가 위치 L에 있을 경우 여기의 내용은 L이 된다.

이렇게 문장의 특성과 구체적인 발화맥락에 의해 한 명제(내용)가 결정되고 나면, 비로소 그 명제가 주어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인지 여부를 물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어떤 명제에 대해 참이라고 말할 때 통상적으로는 현실세계에서 참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명제가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에서 참일지를 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이란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세계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며, 단순히 한 명제가 자체적으로 지니는 속성이 아니라 세계에 따라 달리 지니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참이란 [명제가 갖는 단순한 1항속성이 아니라] 명제와 세계 간에 성립하는 2항관계이다.

명제와 진리치에 대한 이러한 도식은 꽤나 흥미로운 몇몇 귀결을 가져온다. Jones가 다음 문장을 발화했다고 해보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 문장에 대한 그 어떤 발화도 거짓일 수 없다. 우리의 언어적 규칙에 따르면 이 문장에 대한 실제 발화에 의해 그 어떤 명제가 표현되든, 그 명제는 현실세계에서 반드시 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혹자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Jones는 그 문장을 특정 시점에 특정 장소에서 발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바는 Jones는 그 시점에 그 장소에 있다이다. 이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Jones는 그 시점에 다른 장소에 있었을 수도 있다. 즉 다른 가능세계에서 Jones는 그 시점에 그 장소에 있지 않다. Jones에 의해 발화된 이 명제는 그 세계에서는 거짓이다.

다만 위 문장에 대한 임의의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필연적 참이 아니라면, 적어도 분석적 참이라고는 할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적 규칙, 즉 언어사용을 지배하는 규약convention은 그 문장이 사용될 경우 표현되는 임의의 명제에 대해 참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즉 위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오로지 언어적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위 문장이 발화될 경우 표현되는 임의의 명제가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우연적으로만 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고찰은 분석적 참을 곧 필연적 참과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내가 다음 문장을 말했다고 해보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표현한 명제는 물론 거짓이지만, 그 명제가 참이 되는 환경, 즉 내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앞 사례와 유사하게, 이 문장에 대한 모든 발화가 거짓이긴 하지만, 그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필연적으로 거짓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찰은 사유하는 자아cogito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아의 존재를 도출해낸 Descartes의 생각이 어느 지점에서 혼동과 오류를 범했는지 설명해준다. 우리의 언어적 규칙에 따르면 나는 존재한다에 대한 임의의 발화는 발화가 이뤄진 그 세계에서 참인 명제를 표현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 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명제는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는 문장은 분석적으로 참이지만, 그 문장이 잠재적으로 표현하는 명제들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그러니 Descartes나는 생각한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도출한 것은, 분석적으로 참인 결론을 도출한 것일 뿐 필연적으로 참인 결론을 도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분석적 참이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날아다니는 코끼리는 코끼리이다가 분석적으로 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날아다니는 코끼리의 존재를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발화의 맥락은 문장이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명제를 결정하며, 평가의 환경은 그렇게 결정된 명제가 주어진 가능세계에서 갖는 진리치를 결정한다. 발화의 맥락이란 하나의 상황(狀況)situation으로서, 우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문장은 이 상황 하에서 어떤 명제를 표현하는가? 평가의 환경이란 하나의 가능세계로서, 우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명제는 이 가능세계에서 참인가?

이러한 그림에 따르면 임의의 문장이 갖는 양상적 특징modal characteristic을 결정하는 데에는 발화맥락과 평가환경이라는 두 종류 내지 두 차원two dimension의 평가기준이 적용되는 셈이다. 우리가 = H2O’가 우연적이라고 할 때 고려되는 양상성[(쌍둥이-지구 사고실험에서 물 = XYZ일 수도 있었다고 할 때의 가능성은)]은 첫 번째 차원 즉 발화맥락이라는 기준에 따른 개념으로서, 이 경우 우리는 현실 지구와는 다른 발화맥락에서 이 문장이 말해질 경우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 H2O’가 필연적이라고 할 때 고려되는 양상성은 두 번째 차원 즉 평가환경이라는 기준에 따른 개념으로서, 이 경우 우리는 현실 지구와는 다른 평가환경에서 이 문장의 진리치가 평가될 경우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차원은 종종 상상가능성(생각가능성)conceivability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이에 이 용어를 활용하여 다시 말해보자면 물 H2O가 상상가능하긴 하지만, = H2O는 필연적이다.

아래의 표 6.1은 이러한 2차원주의 의미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평가된다. 여기서 물 같은 것watery stuff이라는 표현은 고정 지시어로서, 그 무엇이 되었든 H2O가 실제로 만족하는 전형적인 속성stereotype, 가령 100에서 끓는 투명한 액체임 등의 속성들을, 고려되고 있는 특정 가능세계에서 만족하는 대상을 지시한다. ‘CU1CU2로 축약된 각 가로행은 가능한 발화맥락(또는 종종 말해지듯이 현실로 간주되는 세계’)을 나타내며, ‘CE1CE2로 축약된 각 세로열은 가능한 평가환경([문장이 평가되는] 가능세계)를 나타낸다.

 

6.1 = H2O’에 대한 2차원주의적 도표

 

CE1: 물 같은 것 = H2O

CE2: 물 같은 것 = XYZ

CU1: 물 같은 것 = H2O

= H2O’는 참이다

= H2O’는 참이다

= XYZ’는 거짓이다

= XYZ’는 거짓이다

CU2: 물 같은 것 = XYZ

= H2O’는 거짓이다

= H2O’는 거짓이다

= XYZ’는 참이다

= XYZ’는 참이다

 

도표 상단의 두 가로행 CU1/CE1CU1/CE2KripkePutnam이 주로 고려했던 사항이다. 현실세계에서 = H2O’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거짓인 가능세계는 존재하는가? [다르게 말해, 현실 지구의 발화맥락에서 = H2O’가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명제에 거짓값이 부여되는 평가환경이 존재하는가?] 이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으로서 그 답은 아니오이다. 좌측의 두 세로열 CU1/CE1CU2/CE1은 대안적인[즉 현실 발화맥락과는 다른] 발화맥락에 대한 상상가능성imaginability 내지 생각가능성conceivability을 나타내고 있다. ‘= H2O’가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가능한가? [다르게 말해, ‘= H2O’가 발화되었을 때 표현되는 명제에 거짓값이 부여되는 발화맥락을 생각해볼 수 있는가?] 이는 인식론적인 물음으로서 그 답은 그렇다이다.

특별히 흥미를 끄는 것은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사선 방향에 있는 CU1/CE1CU2/CE2 두 칸이다. 전자는 단순히 = H2O’에 의해 표현되는 현실적인 -양상적non-modal 명제를 나타낸다. 반면 후자는 만일 XYZ-세계가 현실세계였다면 [(즉 물 같은 것 = XYZ인 발화맥락에서라면], -양상적 문장인 = H2O’에 의해 어떤 명제가 표현되었을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사선 방향에 있는 칸들은 그 상황[(발화맥락)]이 현실세계였다면 한 문장에 의해 표현되었을 -양상적 명제를 나타낸다. XYZ-세계가 현실세계였다면 = H2O’라는 발화는 필연적으로 거짓일 것이다. 즉 물 같은 것 = XYZ5)인 세계에서 = H2O’라는 발화는 거짓일 것이다CU2/CE1 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5) 원문에는 ‘watery stuff = H2O’라고 되어 있으나 착오인 듯하다.


 

추가적인 논의: 고정지시 再考

 

다음 두 문장을 보자:

 

(3)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자메이카인이다.

(4) 1990년에 100미터 세계기록 보유자는 미국인이었다.

 

현실의 발화맥락인 지금(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2017312일임을 고려하건대 (3)은 참이다. 그 문장에서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the world record holder라는 한정 기술구는 현재 세계기록 보유자인 자메이카사람 Usain Bolt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에 나타나는 그와 동일한 기술구는 Bolt를 가리키지 않는다. (4)Bolt에 대해 1990년에 미국인이었다(이는 거짓이다)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 아니다. (4)에서 그 기술구는 1990년의 세계기록 보유자인 Carl Lewis를 가리키는바, (4)가 미국사람이라는 참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번에는 두 문장을 다음 문장과 비교해보라:

 

(5) 1990년에 현재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미국인이었다.

 

(5)Bolt에 대해 그가 1990년에 미국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거짓이다. 즉 이 문장은 현재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인 사람이 1990년에는 미국인이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가 (4)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표현할 의도로 (5)를 발화한다면, 그 사람은 현재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셈이다.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와 같은 한정 기술구는 보통 시간적으로 -고정적temporally non-rigid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기술구를 사용하여 각기 다른 시점에 관해 말할 경우, 그 기술구의 지시체는 말해지고 있는 그 시점에 기술구를 만족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기술구는 (3)에서는 Bolt를 가리키지만 (4)에서는 Lewis를 가리킨다.

반면 (5)에 나타나는 현재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이와 대조된다. 이 기술구는 시간적으로 고정적temporally rigid이다. 이 기술구가 지칭하는 대상은 발화되는 문장에서 어떤 시간에 관해 말해지느냐와 무관하게 발화맥락(즉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에 따라 고정된다. 즉 발화되는 문장에 내년에 ’, ‘1990년에 등의 표현이 나타나더라도, 그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에 따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 (4)(5)가 지금 발화될 경우 다른 진리치를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맥락에서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Bolt이기 때문에, (5)에 있는 한정 기술구는 Bolt를 지칭하며 문장 전체는 Bolt에 관해 올바르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기록 보유자의 동일성은 (4)와는 무관하다. (4)의 진리치는 누가 되었든 1990년에 기록 보유자였던 사람의 국적에 따라서만 결정된다. 다시 말해 시간상 -고정적으로 사용되는 한정 기술구는 발화가 이뤄지는 시간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어떤 시간에 관해 말해지고 있느냐와만 연관된다.

이렇듯 시간적으로 고정적/-고정적인 용어를 구분해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하게, 양상적으로 고정적/-고정적인modally rigid/non-rigid 용어를 구분해볼 수 있다. 앞서 하나의 맥락으로서의 현실세계에서 들었던 예가 살짝 변형된 다음 문장을 보자:

 

(6) 저 개that dog에게는 벼룩이 있다.

 

어떤 사람이 Fido에 대해 이 문장을 말하고 있다 해보자. Fido는 그 화자에 의해 지시된 demonstrated(직접 가리켜진) 개다. 이번에는 그 사람이 Fido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7) 저 개에게 벼룩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저 개에게 벼룩이 있다는 것이라는 절에 의해 표현된 명제가 어떤 가능세계에서 참인 경우에만, 문장 (7) 전체는 참이다. 우리가 그 가능세계에서 그 명제가 참인지 판정하고자 한다 해보자. 그 세계에서 벼룩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보아야 할 개는 어떤 개이겠는가? 분명 우리는 (7)에 대한 발화맥락에서 지시된 개인 Fido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그 외의 개들은 이 문장의 진리치와 무관하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6)(7)에서 나타나는 저 개라는 표현은 양상적으로 고정적인 지시어modally rigid designator, 혹은 짧게 줄여서 고정 지시어이다. 양상적인 고정 지시어의 적절한 지시체를 결정하는 것은 발화맥락이며, 심지어 -사실적인 환경 즉 -현실적인 가능세계에 관해 말해지더라도 양상적 고정 지시어의 유관 지시체는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렇기에 (7) 역시 (6)이 발화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 개인 FIdo에 관해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이러한 상황을 다음 두 예시와 비교해보자:

 

(8) 1966년 크러프트 대회6)의 우승견은 흰색이었다.

(9) 1966년 크러프트 대회의 우승견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6) 런던에서 열리는 개 경연대회.

 

두 문장 모두 참이다. 하지만 (6)(7)에서 본 저 개와는 달리, ‘1966년 크러프트 대회 우승견-고정 지시어이다. 우선 실제로 1966년에 크러프트 대회에서 우승했던 개는 흰색 푸들인 Oakington Puckshill Amber Sunblush(OPAS)였다. 그런데 (9)를 참이게 하는 요인은, 1966년의 실제 우승견이 OPAS였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검은색 개가 우승한다는 점이다. OPAS가 아닌 다른 개, 가령 검은 털을 가진 대형 슈나우저가 1966년 크러프트 대회에서 우승했을 수도 있다.

이번에는 (9)를 다음 문장과 비교해보자:

 

(10) 1966년 크러프트 대회의 실제 우승견the actual winner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19수도 있다.

 

(9)와 달리 (10)은 명백히 OPAS에 관해 말하고 있다. (10)의 진리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1966년에 크러프트 대회에서 실제로 우승한 개(OPAS)를 찾아내어, 평가환경으로 고려되고 있는 그 세계에서 바로 개가 검은색인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라는 단어가 시간성temporality의 측면에서 고정성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현실의)actual라는 단어는 양상성modality 측면에서 고정성을 만들어낸다. 즉 문장에서 현재’, ‘실제라는 단어가 발화될 경우 그 단어가 수식하는 용어의 지시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발화맥락(전자의 경우엔 시간, 후자의 경우엔 세계)을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두 단어는 -고정적인 단칭용어를 [시간성, 양상성의 측면에서] 고정화한다rigidify.

 

 

지표사의 필수불가결성

 

지표사가 이론상으로는 불필요한 요소라 생각하기 쉽다. 순수하게 개념적인 단칭용어들만으로도 언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원리적으로 별다른 무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순수하게 개념적인 단칭용어란, 전적으로 기술적인 개념들만으로 그 의미가 구성되기에 발화맥락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지시체가 결정되는 단칭용어를 말한다. 하지만 세심히 고찰해보면 언어에 대한 이런 그림은 설득력 있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로, ‘여기와 같은 단순한 순수 지표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숲 속 어딘가에서 내가 여긴 버섯이 하나도 없네하고 말한다. 이 경우 나는 내가 있는 곳을 기술할 다른 방도가 없더라도, 즉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과 무관하게 오로지 일반개념들만을 활용하여 그 장소를 개별화individuate하거나 짚어내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여기를 사용함으로써 내가 지금 있는 곳을 분명 성공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설사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숲 속 어딘가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내가 있는 장소를 정확하게 기술할 아무런 방도가 없더라도, ‘여기를 통해 내가 있는 곳을 지시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 경우 숲 속 어딘가가 가리킬 수 있는 범위는 여기가 가리킬 수 있는 범위보다는 확실히 더 좁고 더 부정확하다.

두 번째로, 지표사의 필수성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옹호될 수 있다. ‘태양계’, ‘오후 네 시’, ‘1986112등과 같이, 우리가 시간이나 장소를 가리키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용어들은 -지표적non-indexical이다. 그런데 태양계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우주에는 하나의 천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들이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우리가 태양계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바로 이 태양계이다. [즉 외견상 -지표적인 용어들마저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지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지도상에서 한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지도 위 한 지점에 샹그릴라라고 표기한다면 이는 그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드러내어준다 할 수 있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의 현재 위치가 그 지도상에서 어디인지를 알 경우에만 그 지도상에서 샹그릴라가 어디인지 역시 알 수 있다. 요컨대 그 지도가 당신에게 소용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시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Zog라는 행성에 방문하여 Zog으로 34909년에 여차여차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보자. Zog의 월력체계상으로 지금이 몇 년도인지(그리고 Zog 행성에서 한 해의 시간적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한, 당신은 그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다는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굳이 이러한 가상적인 상황까지 떠올려볼 필요 없이, 우리의 월력체계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월력체계에 익숙하기에 이러한 점이 좀체 두드러지지 않을 뿐이다. 1986112일 모모한 특정 사건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그 시점이 서기 1985년 하고도 열두 달 열이틀이 지난 날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보만으로는 그 사건이 정확히 언제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그 사건이 과거에 발생한 것인지 현재 발생한 것인지 미래에 발생할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당신에게는 지금이 언제인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다.7) 따라서 과거 사건이 발생했던 날짜에 관한 정보는, 그 사건이 지금 즉 현재로부터 일정 기간 이전에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외견상 -지표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기술구들이 실제로는 지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 한 그 표현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표적인 고정점indexical anchor point이 요구되는 것이다.


7) 유적 발굴지에서 전하께서 哲年 315년에 모모한 칙령을 반포하시었다고 기록된 석판이 출토되었다고 해보자. 현재 통용되는 월력체계와 비교했을 때 哲年 315이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지, 즉 현재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몇백년 전인지가 밝혀지지 않는 한, 그 칙령이 반포된 역사적 시점을 특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John Perry1인칭 대명사의 지표성과 연관된 충격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당신이 범죄조직에게 피랍된 상황에서 납치된 사람들 중 한명이 고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해보자. 전해지는 바로는 고문 받게 될 사람이 ‘X하고 Y하고 Z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당신은 X하고 Y하고 Z하다고 간주되는 그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자연스레 당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초조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X하고 Y하고 Z한 그 사람이 혹시 인가? 곧 벌어질 고문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결국 이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혹여 고문 받을 예정인 사람에 대해 여차여차한 사람이라는 형태의 여타 기술구들이 아무리 더 추가되더라도, 여차여차한 그 사람이 도대체 당신인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한, 그 정보들은 당신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에는 여전히 부족할 것이다.

이렇듯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 내지 언어적으로 부호화된 암묵적인 인지적 정보cognitive import encoded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용어의 지시체 및 그와 결부된 개념적 사항만으로는 부족하며, 도입되는 용어의 지표적 특성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표사는 우리가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 및 언어를 사용하여 사물을 지시하는 능력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맥락-의존성context-dependance은 우리의 직관적인 생각과는 달리 언어의 결함이나 결점이 결코 아닌 것이다.

 

 

지표사와 Frege의 뜻

 

Frege 역시 지표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자신의 뜻-지시 이론으로 편입시켜 설명하고자 시도한 바 있다. (지금에 의해 표현되는 바를 암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현재시제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간-지시time-indication가 현재시제에 의해 수행된다면,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사고(思考)thought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문장이 언제 발화되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발화의 시점은 사고에 대한 표현의 일부이다. 이는 여기라든가 저기와 같은 단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단어들이 사용되는 경우, 마치 글로 쓰여 있을 때 그러하듯이, 단어를 그저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사고가 온전히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 사고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화에 수반되는 특정 조건을 알아야 하는바, 발화가 이뤄지는 조건 역시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손짓이나 눈짓 등의 행위 역시 이에 [즉 발화에서 지표사가 사용될 경우 사고가 온전하게 표현되기 위해 동반되는 맥락-의존적 수단에] 포함될 것이다.

 

(사고Thoughts, Frege, 1997[(M. Beany , Frege 選集Frege Reader)], 33쪽에 수록.)

 

Frege가 말하는 뜻sense이란 지시체가 제시되는(현상하는) 방식mode of presentation 또는 지시체를 짚어내는 규칙rule that picks out이라는 점을 다시 떠올려보자. 지표사에 관한 위 인용문에서 드러나는 Frege의 아이디어를 요약해보자면, 지표사의 언어적 의미란 지표사가 사용되는 각각의 가능한 경우에 어떤 뜻이 표현되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이며, 그렇게 표현되는 뜻은 지표사가 어떤 대상을 가리키게 되는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지표사가 사용되는 경우 지시체의 제시방식은 지표사가 사용되는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 가령 현재 기온이 발화될 때 그 대상을 결정하는 규칙은 시점 T에 위치 L의 기온과 같은 식이 될 것이며, 여기서 TL은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과 장소이다.

같은 구절에서 Frege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제 오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했던 바를 오늘 말하고자 한다면, 그 단어를 어제로 대체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같은 책).

그러나 Frege는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애써 피하고 있다. 먼젓번의 더 긴 인용문에 따르면 오늘어제에 대한 각 발화는 동일한 날[]을 지시하긴 하지만 그것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다. [동일한 사고가 표현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도,] “사고에 대한 표현의 일부를 이루는바 발화에 수반되는 특정 조건”[(발화의 시점이나 장소 등)]이 각기 다른 것이다. 이에 화요일에 말해진 오늘은 화요일이다의 뜻은 수요일에 말해진 어제는 화요일이었다의 뜻과 달라야만 한다. 따라서 어제가 일단 지나가고 나면, 어제 표현했던 바를 오늘 동일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오늘어제에 대해 Frege가 언급한 바가 좀 더 나은 견해인 듯하다. 첫 번째 인용문에서 제안된 그림은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구절에서 와 같은 1인칭 대명사를 고찰하면서 Frege모든 사람은 특별하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자신에게 제시된다고 말한다. 즉 어떤 사람이 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바는 오로지 그 사람 자신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표현하는 그 사고를 청자가 다시 표현하기 위해서는 라든가 그 사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되는 사고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여기에 대해서도 다소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물론 지금의 경우 와는 다르게, 주어진 한 시점이 복수의 사람들에게 제시될 수 있기에 여러 사람들이 그 시점을 지금으로 파악할 수 있긴 하지만, 일단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그 시점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제시될 수 없다. ‘여기역시 마찬가지로서, 특정 지점에 있는 경우에만 그곳을 여기로 파악할 수 있다.

지표사와 그 뜻에 관한 이러한 고찰들이 참이라면, 지표사가 포함된 문장이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사고는 발화맥락을 떠나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게 되어버린다. ‘나는 배고프다가 표현하는 사고는 화자가 아닌 이상 파악될 수 없으며, ‘여기 비가 온다는 그 장소에 있지 않는 이상 파악될 수 없으며, ‘지금 비가 온다는 그 시점이 지나가버린 이상 파악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 비추었을 때 잘못된 귀결인 듯하다.] 그러나 Frege가 말하듯이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어제오늘에 대해 언급하는 과정에서 Frege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덧붙인다: 우리가 올바른 대상을 지시하고 있음을 아는 한, 우리는 그 대상이 제시되는 방식에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8). 그렇다면, 적어도 지표사가 연관되는 경우엔 뜻 개념이 의사소통에 대한 설명과는 무관한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8장에서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8) 이는 3, ‘직접대면에 의한 인식과 기술구에 의한 인식초입에서 Wiggins 씨 사례에 대해 Frege가 제시했던 답변과 마찬가지이다. 언어-사용자들이 한 언어표현에 결부시키는 뜻이 각기 다르더라도, 그 표현의 지시체가 동일한 한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해당 절의 첫 두 문단 참조.


 

역사적 사항

 

내포 의미론의 요소들은 FregeRussell에게서 본격적으로 발견되었으며, 그 일반적인 착상의 기원은 그 이전으로 더 멀리 소급해간다. 내포 의미론을 구체적으로 정립하고자 기도한 보다 현대적인 접근은 Carnap의미론 序說Introduction to Semantics(1942)에서 시작되었다. 그 저서에서 Carnap‘L-상태L-state개념을 의미론 체계에 도입하였는데, 이는 작금의 가능세계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서 거칠게 말해 하나의 L-상태란 형식언어formal language에 대한 하나의 해석interpretation이라 할 수 있다.9)


9) 의미론적 체계 S가 주어진다고 하자. S의 언어적 수단을 통해 표현가능한 완전하게 확정적인 상태는 (S에 관한) L-상태라 불린다. L-상태를 기술하는 S(대체로 매우 복잡한) 문장은 상태기술Zustandsbeschreibung이라 불린다. 리반적으로 S의 문장은 어떤 L-상태일 때 참이고 다른 상태일 때는 거짓이다. 한 문장이 참이 될 때, L-상태들 (또는 그에 상응하는 상태기술들) 전체는 이 문장의 L-공간이라 불린다. Leibniz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L-상태 개념은 가능세계 개념을 의미론적으로 정확히 기술하며, 그래서 한 문장의 L-공간은 그 문장이 적용되는 모든 가능세계들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 문장의 L-공간이 SL-상태들 전체집합과 일치할 경우, 그 문장은 S에서 L-(순수하게 논리적인 근거에서 )이다. 이는 원리상 다시 Leibniz의 이념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즉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들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통용된다는 점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문장 AL-공간이 문장 BL-공간 안에 포함된다면, ABL-함축한다(A로부터 B가 논리적으로 연역된다)고 말해진다. / L-개념은 내포나 의미개념을 엄밀하게 함으로써 의미분석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는 데에 활용될 수도 있다. 두 문장의 진리치가 일치한다면 두 문장은 동치라고 말해진다. 이런 일치가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확정될 수 있다면, 즉 두 문장 간의 동치명제가 L-참이라면, 그 문장들은 L-동치이다. L-동치인 문장들은 동일내포를 갖는다고 규정된다. 이 내포가 명제를 나타낸다면, 문장들이 L-동치일 때 그 문장들은 정확히 동일 내포를 갖는바 같은 내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Carnap이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L-동치 개념을 확장하여 여타 종류의 두 지시사인 술어 및 개체상항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해서도 내포개념의 정확한 정의를 얻을 수 있다.” (Wolfgang Stegmüller, 현대 경험주의와 분석철학(현대철학의 주류사상Hauptströmungen der Gegenwartsphilosophie, 1 부분), 이초식 外 譯, 고려대학교출판부, 1995, 83-4.)


지표사에 관한 이론 역시 Frege의 저서에서 그 선구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으며, 더욱 실질적으로 이뤄진 작업은 Russell1940년 저서 의미와 진리에 관한 탐구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1950년에 출간)에서 그가 칭한바 자기중심적 특수사(特殊詞)egocentric particulars에 관한 이론에서 발견된다.10) 이후 Kaplan지시사Demonstratives1989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되기 전까지, Tyler Burge, Hector-Neri Castañeda, Gareth Evans, David Lewis, Barbara Partee, Frank Vlach 등 많은 인물들이 지표사에 관한 논의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지표사에 관한 탐구는 Kaplan의 저서가 출현함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기실 지시사의 비공식 사본은 1989년 훨씬 이전부터 유포되고 있었다).


10) 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언어표현은 그 표현이 지시하는 바가 말하는 사람과 관계있는 단어들이다. ‘이것’, ‘저것’, ‘’, ‘’, ‘여기’, ‘저기’, ‘지금’, ‘그 때’, ‘과거’, ‘현재’, ‘미래등이 그러한 말들이다. 동사의 시제 역시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나는 덥다라든지 ‘Jones는 덥다와 같은 진술은 그 진술이 발언된 시간을 알아야만 일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中略) 모든 자기중심적 특수사들은 이것이라는 표현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의 일대기를 의미하며 여기이것의 장소’, ‘지금이것의 시간을 각각 의미한다. ‘여기이외의 다른 자기중심적 표현을 기본적인 것으로 삼아 그것을 통해 이것을 정의하기란 가능할 것 같지 않다.”(Bertrand Russell, 의미와 진리에 관한 탐구, 7, 자기중심적 특수사, 박병수 , 삼성출판사, 1982, 131-2.) 이렇듯 Russell은 모든 지표사가 이것에 의해 정의가능하다고 규정한 뒤, 감각지각에 의해 야기되는 두뇌 자극을 통해 언어적 반응이 산출되는 인과과정이 최소한인지 혹은 지연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지표사들이 발화된다고 지적한다. 연후에 지금의-I-now이것이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고찰에 따라 이것을 지금의-나가 지각하는 감각자료를 통해 분석해냄으로써, 최종적으로 모든 지표사가 물리적 세계이든 심리적 세계이든 간에 세계를 기술하는 데에는 사용될 필요가 없는 표현들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이번 에서 살펴본바 지표사가 언어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생각과 상반되는 귀결이다. (또한 3에서 살펴본바, 지각주체가 현재 직접대면하고 있는 감각자료들을 지시하는 이것’, ‘저것등의 표현만이 진정한 고유명 즉 논리적 고유명이라는 이전의 Russell의 입장과도 비교될 법한 관점이다.)


Hilary Putnam(1926-2016)은 철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이번 에서 살펴보았듯이 언어철학 및 지시론 분야에서 특출한 이론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 분야에서는 다수실현가능성multiple realisability 논제 및 그에 기반한 기능주의functionalism 이론을 정식화함으로써 이후의 심리철학 및 인지과학이 발전해간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형이상학과 과학철학에서는 모형-이론적model-theoretic 논증을 통해 그의 독특한 관점인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을 정립하는 등, 이외에도 철학의 여타 분야들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John Perry는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의 저작들 중 특별히 지표사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지시사에 관한 Frege의 견해Frege on demonstratives(1977)본질적 지표사에 관한 문제The Problem of the Essential Indexicals(1979)를 들 수 있다.

 

 

이번 의 요약

 

지표사란 지금’, ‘여기와 같이 지시적으로 맥락-의존적referentially context-dependent인 표현이다. 각 지표사는 가능한 발화맥락에 대해 지시체를 결정한다는 특징을 갖는바, 지표사의 지시체는 지표사가 발화되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일부 지표사는 지시체가 결정되는 데에 지시화가 요구되는 지시사로서, 실지시 행위는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에 따라 암묵적일 수도 있다.

고유명에 대한 직접지시론적인 관점은 이나 호랑이와 같은 이른바 자연종 용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다. 만약 어떤 것이 물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물이다. 하지만 물이 지닌바 관찰가능한 속성 내지 표면적 속성에 관한 기술구는 그 어느 것도 물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이지는 않다. , H2O와 같이 물을 여타 물질들로부터 구분해주는 요소에 대한 기술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물질을 지시한다. 따라서 = H2O’는 후험적이면서 종합적인 문장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이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모든 물질들은 각각에 고유한 본질을 갖는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지표적으로 지시하는 표현들 대부분은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어떤 사람이 물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물이다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사용될 경우 필연적 참을 표현하는 문장을 발화한 셈이다. [즉 특정 맥락에서 발화된 지표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이는 언어표현의 고정성이 가장 뚜렷하게 부각되는 사례로서, 그 말을 들은 청자는 설사 화자가 지시하는 대상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그 대상이 바로 저것이라는 점만은 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분명 다음과 같은 한 쌍의 가능적인 상황을 떠올려볼 수 있다: 한 상황에서는 물이 H2O를 포함하고 있고, 다른 한 상황에서는 물이 앞 상황의 것과 외견상 식별되지는 않지만 명백히 그와 다른 물질인 XYZ를 포함하고 있다. 각 상황 내부로부터의 관점에서는 이 차이를 알아챌 수 없겠지만, 양자는 각기 다른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다르다. 첫 번째 상황의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은 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화나 표기를 통해 H2O를 지시하는 반면, 두 번째 상황의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은 그와 동일한 단어에 대한 발화나 표기를 통해 XYZ를 지시한다. 이러한 사고실험에 따르면 발화의 맥락과 평가의 환경이라는 두 가지 사안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언어표현의 특성 즉 언어적 의미에 특정 발화맥락이 주어지면, 그 표현이 실제로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내용이 산출된다. 다음으로 그렇게 산출된 내용에 특정 평가환경이 주어지면, 발화의 진리치, 외연, 지시체가 산출된다. 이렇듯 언어표현이 갖는 특성과 내용 간의 차이점은 명시적 지표사의 경우에 두드러지는 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Putnam은 자연종 용어가 암묵적으로 지표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제언하는바, 그에 따르면 과 같은 자연종 용어의 경우에도 특성과 내용이 명백히 구분된다. 현실세계가 발화맥락으로 주어질 경우 H2O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즉 현실세계에서 발화된 (평가환경으로서의) 모든 가능세계에 걸쳐서 H2O를 가리킨다. 하지만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가 발화맥락으로 주어질 경우 은 예컨대 XYZ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이러한 의미론적 ‘2차원주의의 관점은, ‘= H2O’[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달리 = XYZ’가 필연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을 수도 있다는 [인식론적인] 직관이 가능한 이유를 명료하게 포착해낸다.

양상성 개념은 시간성 개념과 매우 유사한 데가 있다. 특히 양상적인 고정성/-고정성 간의 구분은 시간적인 고정성/-고정성 간의 구분과 유사하다. 가령 실제 그 F’가 그 지시체를 양상적으로 고정지시함과 유사하게, ‘현재의 그 F’는 그 지시체를 시간적으로 고정지시한다.

지표성을 단순히 언어사용의 편의를 위한 장치로 볼 수만은 없는 듯하다. 예를 들어 여기가 어디인지 혹은 지금이 언제인지를 모르는 이상, 그 어떤 상세한 지도나 달력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더욱 강렬한 예시를 들자면, 어떤 행위가 가해질 대상에 당신이 포함되는에 대한 정보를 당신이 알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그 행위에 대한 기술구가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FG하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나는 G하다를 아는 것은 나에게 동일한 정도로 유의미하지는 않다.

지표성은 Frege가 품었던 이상적인 의사소통 개념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여겨진다. Frege의 생각에 따르면 온전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화 참여자들이 동일한 뜻(동일한 사고 혹은 명제)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예컨대 지금이라는 지표사에 의해 가리켜지는 시간이 제시되는 방식은 그 단어가 발화되거나 표시됨과 함께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기에, 그 시점 이후에는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시점 이후에 앞선 그 시점에 관해 의사소통하는 우리의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된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탐구문제

 

1. 고유명에 관한 Kripke의 설명을 받아들였다고 해보자. Brown나는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Brown은 죽지 않았다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가?


2. ‘추가적인 논의: 고정지시 再考에서 제시되었던 (9) ‘1966년 크러프트 대회 우승견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10) ‘1966년 크러프트 대회의 실제 우승견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19수도 있다, ‘실제라는 단어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FG하다는 것이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F, 그것이 G하다는 것이 사실이었을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한정 기술구의 범위에 의해 구분될 수도 있겠는가? 우리의 예시를 활용하여 생각해보라.


3. 시제가 일종의 지표사임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현실적인 문장들이 지표사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라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4. 의미론적 외재론은 과연 어느 범위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 ‘과 같은 자연종 용어들에 대한 Kripke-Putnam의 노선을 받아들인다면, 가령 탁자의 개념에 대해서도 외재론적 관점을 적용해야 하는가? 음식의 개념은 어떠한가?


5.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3에서 Kripke는 심리철학 분야에서 논의되는 물리주의physicalism를 논박하고자 다음과 같이 본질적으로 2차원주의적인 논증을 제시한다: ‘이라는 단어가 물의 기저를 이루는 본성underlyng nature을 지시한다는 점을 받아들여보자. 따라서 물은 그것이 지닌 표면적 속성superficial property들에 대한 기술구를 단지 우연적으로만 만족한다. 이제 그 기술구를 만족하면서도 현실의 물이 지닌 바와는 다른 본성을 갖는 어떤 물질이 존재하는 세계를 생각해보라. 그 경우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대상은 물이 아니다. ‘고통(苦痛)pain이라는 단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고통은 신경계의 특정 상태a state of nervous system, 가령 C-신경섬유의 자극C-fibre stimulation을 지시하는데, 이 신경상태가 아프게 느껴지는hurtful 것은 단지 우연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즉 물리주의가 주장하는바 고통이 가리키는 상태의 기저를 이루는 본성인 C-신경섬유자극 상태는, ‘아프게 느껴지는 바로 그것이라는 기술구를 단지 우연적으로만 만족한다.] 현실이 아닌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C-신경섬유자극이 아닌 여타 물리적 기저상태에서 아픔이 느껴지겠지만, 그 상태가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은 아니다. [따라서 고통이란 바로 C-신경섬유자극과 동일하다.] Kripke는 이렇듯 고통과 특정한 물리적 신경상태를 동일시하는 물리주의 논증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Kripke에 따르면 만약 어떤 것이 고통으로서 느껴진다면, 즉 아프게 느껴진다면, 그 기저를 이루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 어떤 것은 바로 고통이다. [요컨대 고통은 그것을 실현하는 기저상태와 동일시될 수 없는바, 그렇게 실현되는 현상적 속성 자체가 바로 고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은 그 어떤 특정 신경상태로도 환원reduce될 수 없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의식(意識)(의식적임)consciousness의 환원불가능성에 관한 논증을 제시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Kripke의 논증은 올바른가?


6. 양쯔강에 있는 물은 안타깝게도 매우 오염되어있는 상태이다. 특히 샹하이에 있는 양쯔강 하구에는 말하기에도 역겨운 온갖 오염물질들이 H2O와 뒤섞여있다. 실제로 샹하이의 양쯔강 하구 근처에서 측정된 H2O의 비율은 차[] 한 잔에서 H2O가 차지하는 비율보다도 훨씬 적다고 한다. 그런데 차는 차일 뿐 물이 아닌 반면, 강물은 아무리 오염되었더라도 어쨌든 물이다. 이러한 사례는 자연종 용어에 대한 Putnam의 주장에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주요 읽을거리

 

Kaplan, D. (1989), 지시사: 지시사 및 여타 지표사에 관한 의미론논리학형이상학인식론적인 小論Demonstratives: An Essay on the Semantics, Logic,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of Demonstratives and Other Indexicals: Kaplan의 논제들Themes from Kaplan, 481-564쪽에 수록.

Perry, J. (1979), 본질적 지표사에 관한 문제The Problem of the Essential Indexicals.

Putnam, H. (1975), 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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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논리.존재
김영정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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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언어철학, 논리철학 입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쌩 입문자가 읽기엔 버거운 심층적인 연구서 내지 해설서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듯, 개별 원고들을 손보아 한데 모은 선집이나 마찬가지지만, 큰 틀에서 언어철학, 존재론 및 논리철학, 메타논리 등의 주제에 따라 유사하거나 밀접한 글들을 모아 3부 형식이 되게끔 꾸려졌다. 나름의 통일성이 도모되었음은 사실이나 어쩃든 애초에 입문서를 염두에 두고 통일적으로 쓰인 책은 아닌 만큼 여타 단행본에 비해 굳이 이 책을 입문서로 선택할 필요성은 조금 떨어진다. 내용 측면에서도 논의가 적잖이 전문적이고 심층적인 수준에서 진행된다. 언어철학, 존재론, 논리학 등의 분야에서 두루 통용되거나 논의되는 초보적인 수준의 개념, 논제, 이론 등이, 그에 대한 별도의 부연설명이 없거나 적은 상태로 곳곳에서 활용되면서 논의의 핵심 골자만이 집중적으로 천착된다. 

 이렇듯 전반적으로 보아 입문서로 읽히기에는 많이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다뤄지는 주제나 문제를 체계적이고 심층적이면서도 내실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기에, 해당 분야에 숙달해있는 독자라면 자신이 알던 바를 점검하면서 심화하는 데에 십분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선집 성격의 책이니, 목차를 일별하여보고 필요한 부분만을 선별하여 읽는 것도 무방하겠다. 다만 어쨌든 기초 수준의 논리학과 테크니컬한 메타논리는 물론이요, 현대 분석적 경향의 철학사 전반 및 언어철학, 논리철학, 존재론 등에 충분히 숙달한 상태에서 읽어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절판된 책이니, 중고라고 구매하여 소장할지 아니면 그냥 빌려서 활용할지 잘 고민하여 결정하길 권한다. 


개인적으로 퍼트남의 철학에 대해, 쌍둥이 지구 논변이라든가 자연종 용어와 본질 개념, 통속의 뇌 논변 등 파편적인 사항들만을 알고 있던 차에, 3장에서 그의 내재적 실재론 입장을 전반적으로 개관할 수 있어서(그리고 그러한 입장과 그의 언어철학적 고찰들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서) 나름의 성과가 있는 독서였다. 양상적/인식적 맥락에서의 대언성/대물성 개념을 다루는 2장과, 크립키의 고정점 이론이 다뤄지는 4장도 기존에 막연하게만 알던 바를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반면 사건 개념을 둘러싼 존재론적, 논리철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는 6-8장은 많이 알지 못하는 분야여서 거의 건성으로 훑었고, 메타논리가 다뤄지는 10-12장은 숙달이 많이 부족하여 아예 제대로 읽어내질 못하였다. 많이 공부하고 연습한 뒤에 꼭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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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D.W.햄린 지음, 장영란 옮김 / 서광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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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만족스럽지 않고 번역이 엉망이어서 절대 읽지 말길 권하고픈 책이다. 원서를 본 게 아니라  조금 미심쩍은 데가 있긴 하지만, 원저자의 서술방식이 난삽하여 내용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형이상학에서 대표적으로 다뤄지는 주제별로 각 장이 할애된 채 한 장의 주제와 관련하여 고대나 근대 전통철학자들의 이론부터 현대철학자들의 이론을 두루 넘나들며 서술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서술방식이 난해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다. 각 철학자들의 이론이 정석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소개 및 해설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각 이론에 대한 저자의 논평이 명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고, 해당 주제에 대해 저자가 개입하는 논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증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외려 이 모든 것들이 깔끔한 맺고 끊음 없이 파편적이고 지리멸렬하게 뒤섞여 나열된다. 일전에 유사한 구성 및 비슷한 분량의 책으로 Michael Loux라는 학자의 "형이상학 강의"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과 유사함에도 그 책과 전연 다르게, 읽고 나서 머리에 남는 바가 전혀 없다. 

 머리에 남는 것은 고사하고 읽어나가는 일 자체가 지겨웠던바, 원저자의 이러한 난삽한 서술방식에 수준 이하의 번역이 더해져 책이 더욱 읽기 싫어지는 모양새가 되어 놓은 탓이다. 구문론적으로 매끄럽지 않게 직역되어있음은 물론이요, 의미론적으로도 한 문장 한 문장이 도시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들로 구성되어있다. 역자가 원서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번역한 게 맞는지, 원저자가 소개하는 각종 논제나 개념 등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맞는지, 둘 다 맞더라도 영어 및 한국어 양자에 대해 (학술적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능통한 바가 전무한 사람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다. 

 모쪼록 형이상학에 관심하는 철학도는 물론이고, 철학에 관심하여 그 큰 줄기 중 하나인 형이상학에 발을 들여보려는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을 사서 읽지도 말고 빌려서 읽지도 말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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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pke1)命名과 필연


   1) (原註) 일부 학자들은 고유명에 관한 Kripke의 관점 배후에 있는 핵심 착상이, 본디는 양상논리(樣相論理)modal logic에 대한 Ruth Barcan Marcus의 선구적인 작업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번 역사적 사항참조.



필연성, 가능성, 가능세계 개념에 대한 기초사항

 

2+2=4라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으로 참necessary truth인 듯하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기could not have been false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 xy보다 크고 yz보다 크다면 xz보다 크다는 것 등도 필연적인 참의 사례들인 듯하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might have been the case는 의미에서,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가능적(可能的)이다]possible. 아이스크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이지는 않다.

필연성necessity과 가능성possibility이란 무엇인가? 당면 목적상 우리는 가장 편리한 수단으로서 가능세계(可能世界)possible world에 입각한 필연성/가능성 해석을 가정하고자 한다(가능세계 개념이 주는 기이함과 생소함에 대해서는 잠시 뒤 고찰해볼 것이다). 필연적으로 참인necessarily true 명제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참인true no matter what 명제이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다could not.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세계가 어떻게 되든지 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true in every possible world. 마찬가지로, 가능적으로 참인possibly true 명제란 사실이었을 수도 있는might have been the case 명제 혹은 사실인is the case 명제이다. 간단히 말해 가능적으로 참인 명제는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혹은 어떤 가능세계에서] 참이다true in some possible world. 이에 필연적/가능적인 명제의 진리-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한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일 경우 필연적이다.

한 명제는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일 경우 가능적이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 명제가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사소하게 가능적인 셈이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는 것은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세계the actual world 역시 가능세계들 중의 하나이므로, 한 명제가 현실세계에서 참이라면 사소하게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현실세계란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ings actually are이다.

p가 가능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명제라면, P우연적(偶然的)이다contingent.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명제처럼,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세계에서 참인 명제는 우연적인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가능하다필연적이다라는 단어가 항상 이런 식으로 쓰이지는 않으며, 특히나 철학 외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논의하는 영역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철학에서 통상 형이상학적 양상성(樣相性)metaphysical modality이라 칭해지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가능성/필연성/우연성 등은 인식론적(認識論的)epistemological 개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metaphysical 개념이다. 한 명제가 가능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참이다 혹은 참일 수 있었다는 것이지, ‘나는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with certainty 알고 있다.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는 그러했을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다는 명제가 사실이 아님을 알긴 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 그 명제는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은 필연적이다라는 말로써 우리는 그것은 확실하다certain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철학 밖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은 필연적이지 않다[반드시 하지는 않다]’는 말을 그것이 사실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하지만, 이는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의미차이는 일부 필연적 참의 경우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예컨대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들은 통상 필연적으로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Goldbach의 추측과 같이]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수학적 명제들이 분명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필연성 및 우연성과 각기 유사한 인식론적 개념들로는 선험성a priori후험성a posteriori/경험성the empirical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경험과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선험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은 생각가능성[상상가능성]conceivability으로서, 이는 대강 말하자면 선험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명제 p의 부정이 생각가능하다면 p가 선험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 것이므로, 결국p는 선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상상가능하므로 아이스크림은 존재한다는 선험적이지 않다. 반면 2+24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바 선험적으로 배제되므로, ‘2+2=4’는 선험적이다.)]

편의를 위해 필연성/가능성을 나타내는 데에 다음과 같은 기호들이 도입될 것이다:

 

‘Nec (p) [p]’‘p라는 것은 필연적이다it is necessary that p로 읽는다.

‘Pos (p) [p]’‘p라는 것은 가능적이다로 읽는다.

 

기호 ‘Nec[]’이라든가 자연언어 라는 것은 필연적이다등의 표현들은,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와 같은 문장 연산자(문장 연결사)이다. 하지만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와 다르게, ‘Nec’진리-함수적이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2에서 도입된 의미에서 -외연적인 즉 내포적인 연산자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 문장의 경우

 

Nec (p)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p의 진리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Nec (지구는 둥글다)’의 진리치는 지구가 실제로 둥글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 [이 양상문이 참이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지구가 둥글어야 하는데,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지구가 둥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Nec’은 다음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진리-함수적인 문장 연산자들과는 성질이 다르다:

 

p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p 그리고 q

p 또는 q

 

이 문장들의 경우,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각 요소문장들의 진리치에 의해, 즉 첫 번째 문장은 p의 진리치에 의해, 나머지 두 문장은 pq 각각의 진리치에 의해 진리-함수적으로 결정된다.

필연성/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상호-정의가능한inter-definable 것으로 간주된다. 즉 두 개념은 다음과 같이 서로에 대한 정의항으로 쓰일 수 있다:

 

한 명제는 그 부정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필연적이다.

[p ↔ ∼◇∼p]

한 명제는 그 부정이 필연적이지 않은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가능적이다.

[p ↔ ∼□∼p]

 

그런데 (현실이-아닌non-actual) 가능세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능세계란 David Lewis가 주장했듯이 현실세계와 시간적-공간적으로 연속되어있지 않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현실세계와 유사한 세계인가? 아니면 물질적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것으로서 현실세계와 전연 판이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가능세계라는 표현을 단지 하나의 이론적인 발견의 수단으로서as an heuristic, 즉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하나의 말하기 방식manner of speaking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기에 양상성과 연관된 우리의 언어철학적 논의에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크게 유념할 필요는 없으며, 하나의 가능세계란 단순히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그랬을 수 있었던 하나의 방식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혹여 가능세계라는 단어에 수반되는 공상과학적인 어감이 꺼림칙하게 느껴진다면, 가능세계를 가능상황possible situation 내지 사실적 환경counterfactual circumstance 등으로 칭할 수도 있다(물론 후자의 경우,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은 사실--하는contrary-to-fact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세계를 사실적 환경이라 칭할 수는 없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어쨌든 가능세계가 풍기는 공상과학적인 느낌은, 사물들이 존재했을 수도 있는 방식에 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종종 말한다는 비근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다소 경감될 것이다.2)


2) (原註) 혹여 이마저도 만족스럽지 않다면 최후의 방법으로서 가능적으로/필연적으로라는 부사를 원초적인primitive 것으로, 즉 엄밀히 말해 세계나 상황 등의 측면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초개념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임의의 세계 즉 사물들이 존재했을 수 있는 임의의 방식과 임의의 명제를 취해, 그 명제가 그 세계에서 참인지 물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명제의 진리치는 명시된 특정 조건들이 성립하는 임의의 세계에 따라 물어질 수 있다. 이는 마음을 의미한다: 여차여차한 가능적인 환경들을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그러한 조건 하에서 참이겠는가?

가능세계 의미론은 필연적/우연적이다등의 표현을 해석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실적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가정법적 조건문subjunctive conditional)에 대한 해석 역시 용이하게 해준다. 다음 문장을 보자:

 

만약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If Jones had been wearing a seat belt, he would have survived the collision.

 

보통 이런 식의 조건문을 말하는 것은 전건이 실제로는 거짓인 경우에만, 즉 이 사례에서는 Jones가 실제로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경우에만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조건문을 진리-함수적인 실질적 조건문material conditional으로 해석할 경우 자동적으로 참인 것으로 판명되어버린다. 이는 위 문장의 후건이 부정된 다음 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If Jones had been wearing a seat belt, he would not have survived the collision.

 

두 문장의 진리치가 결정되는 방식이 이렇게 직관적인 이유는, ‘로 표현되는 실질 조건문의 진리표에 따르면 전건이 거짓일 경우 실질 조건문 전체는 [후건의 진리치와 무관하게] 항상 참이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이 문장이 진리-함수적으로 해석되는 한] 우리는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으리라는 것이 참인지를 도대체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3)


3) 직설법적 조건문indicative conditional과 가정법적 조건문은 우리말에서는 잘 구분되지 않지만 영어에서는 시제상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된다. 보통 직설법적 조건문은 전건이 실제로 참일 경우 후건이 참이라는 단순한 가정을 주장하는 경우에 말해진다. 예컨대 다음문장


만약 OswaldKennedy를 쏘지 않은 거라면, 다른 누군가가 쏜 셈이다.
If Oswald did not shoot Kennedy, than someone else did.

, Kennedy가 죽은 것이 확실한 상황이므로 Oswald가 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다른 누군가가 쐈던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별 무리 없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다음 문장

만약 OswaldKennedy를 쏘지 않았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쐈을 것이다.
If Oswald had not shoot Kennedy, than someone else would have.

, 실제로는 OswaldKennedy를 쏘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을 해보았을 때 후건이 성립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Kennedy 암살에 관한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보통은 거짓이라 여겨지는 가정이다. 보통 직설법적 조건문은 이미 일어난 일이거나 불가능하지 않은(혹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화자가 판단하거나 최소한 불가능 여부가 확실치 않은) 경우에 사용되고, 가정법적 조건문은 일어난 사실과 반대이거나 일어날 확률이 희박하다고 화자가 판단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가정법적 조건문의 경우가 사실적인 가정을 하는 경우와 관련된다. 반사실적 조건문은 일반적인 조건문과 달리 진리-함수적이므로 이런 조건문의 진위를 결정하기 위해 가능세계 의미론이 적용된다.” (미우라 도시히코(三浦俊彦), 가능세계의 철학, 박철은 , 그린비, 2011, 24, 譯註1).)


[이러한 조건문들을 진리-함수적으로가 아니라 가능세계의 측면에서 양상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쉽게 해결된다: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교통사고가 발생할 당시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는 바로 그 점만을 제외하고는, 현실세계와 모든 점에서 유사한 하나의 가능세계를 떠올려보자. 간단히 말해 [사실에 하도록 전건이 성립한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현실세계와 최대한 유사하도록 유지시킨다. David Lewis가 말하였듯이, 이는 사실적 조건문의 전건이 성립하되 현실세계와 최근접한nearest/가장 유사한closest 가능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Jones는 살아남았겠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고려하던 사실적 조건문 전체는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기술주의 패러다임

 

FregeRussell 모두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적 이론descriptivist theory of proper name을 견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Aristoteles’라든가 ‘Madonna’와 같은 통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이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각 경우마다, 그 이름을 통해 화자가 의미하는 내용 내지 청자가 이해하는 내용은 한정 기술구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4) 이런 의미에서 (통상적) 고유명은 한정 기술구와 엄밀하게 동등하다. 다르게 말해 고유명은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abbreviate 것 내지 한정 기술구에 대한 약칭shorthand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Beethoven이 다음 문장을 읽는다고 해보자:


4) (原註) Frege가 고유명에 대해 기술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다만 이는 Kripke의 관점과 연관되는 한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번 에서 살펴볼 Kripke의 공격은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적 관점을 누가 견지했는가와 무관하게 그 이론 자체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Mozart는 죽었다.

 

이 문장을 읽고 이해했을 때 Beethoven이 파악하는 내용은, 기술주의 관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Don Giovanni의 작곡가the composer of Don Giovanni는 죽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이해한 시점의 Beethoven에게 다음 두 문장은 동의적이다. 즉 적어도 그 시점에 이 두 문장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

 

Mozart는 죽었다.

Don Giovanni의 작곡가는 죽었다.

 

물론 RussellFrege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한정 기술구의 의미론적 역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Frege는 한정 기술구가 그것을 만족하는 대상을 지시하는refer 역할을 하는바 진정한 단칭용어genuine singular term라 생각한다. 반면 한정 기술구에 대한 Russell의 맥락적 정의방식에 따르면 정관사 the정확히 하나의를 의미하는바 한정 기술구는 양화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며, 따라서 엄밀히 말해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요점은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다음 물음에 답하고자 제시된 이론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한 이름을 통해 대상에 관해 말할 때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은 무엇인가? Kripke에 따르면 기술주의 패러다임은 이 물음에 잘못된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에서 도입된 양상성 개념의 측면에서 심각한 난점을 지니고 있다.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Kripke의 반박

 

당신이 앞 Beethoven처럼 특정 시점에 ‘Mozart’Don Giovanni의 작곡가로만 이해하고 있다 해보자. 이 경우 당신은 다음 문장을 분석적인 것으로, 즉 그 의미에 의해서 참인 것(분석성 개념에 관해서는 緖論, ‘8개의 예비사항’, 8번 항목 참조)으로 이해할 것이다:

 

(1) Mozart = Don Giovanni의 작곡가

 

이 문장이 실제로 분석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다음 두 문장과 엄밀하게 동의적인 셈이다:

 

(2) Don Giovanni의 작곡가 = Don Giovanni의 작곡가

(3) Mozart = Mozart

 

Kripke의 지적에 따르면, 모든 분석적 참은 필연적 참이므로,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따라 (1)이 분석적으로 참이라면 동시에 필연적으로도 참이어야 한다.5) 게다가 (2)(3)이 선험적이며 (1)은 양자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기 때문에, (1)은 선험적이기도 해야만 한다.6)


5) (原註) [모든 분석적 참이 필연적 참이기도 하다는 논제에 대해 미리 언급할 사항이 있다.] David Kaplan은 주장하길, 예컨대 나는 여기에 있다와 같은 문장은, 언어적 규약에 따르면 그 문장에 대한 어떤 발화(發話)utterance든 거짓일 수 없기에 분석적으로 참이지만, 그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우연적으로만 참이라고 말한다. 가령 Kapkan이 웸블리 경기장에서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발화는 Kaplan은 웸블리 경기장에 있다는 명제를 표현한다. 그런데 Kaplan이 그 시점에 웸블리 경기장에 있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은 아니다. 그는 다른 곳에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6장에서 더욱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6) (原註)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만약 Mozart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더라면, ‘Mozart = Mozart’는 참된 명제를 표현할 수조차 없지 않겠는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Mozart = Mozart’가 논리적으로 참인 동어반복 문장이긴 하지만, 혹여 Mozart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그 문장에 대해 인식론적 관점에서 선험적으로 참이라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가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혹여 Mozart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Mozart = Mozart’가 참이라는 단순한 입장을 고수하고자 한다. 아니면 이 동일성 문장을 만약 Mozart가 존재한다면, Mozart = Mozart’라고 고쳐 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3) 역시 만약 Don Giovanni의 작곡가가 존재한다면, Don Giovanni의 작곡가 = Don Giovanni의 작곡가로 고쳐 쓸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세부사항은 작금의 논의를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만들기에 차치해둔다.


이제 문제는 분명해졌다. Kripke의 고찰에 따르면 (1)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Mozart가 위대한 그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Mozart가 그 곡을 쓰긴 하였다. 하지만 그가 성악곡에는 관심하지 않아 기악곡만을 작곡했을 수도 있고, 혹은 어린 시절 마차 사고를 당해 작곡 활동을 아예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1)이 거짓인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1)은 선험적이지도 않다. (1)이 참이라는 사실은 경험적 지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1)이 참임을 확실히 알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1)이 참임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3)이 참임을 아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즉 선험적으로] (1)이 참임을 아는 것은 아니다. (1)이 거짓이라는 것은 생각가능하다conceivable[선험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1)(3)은 각기 다른 인지적 가치를 지니며, 그에 따라 각기 다른 명제를 표현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Frege가 소박한 의미론을 논박하기 위해 사용했던 바와 동일한 종류의 논증인 인지적 가치로부터의 논증이, Frege가 소박한 의미론의 대안으로서 제시한 기술주의적 이론[-지시 구분 이론]을 역으로 논박하는 데에 다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1)은 분석적이지도 않다. (1)이 참임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2)(3)과 달리, 다른 예시를 들자면 모든 사각형은 네 변을 갖고 있다와 달리, 사소하게 참인 것은 아니다.

이상 Kripke의 세 가지 논박을 정리해보자: 기술주의 이론은 (1)과 같이 () 우연적으로만 참인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 후험적(경험적)인 명제가 선험적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인식론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 종합적인 명제가 분석적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의미론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이외에도 Kripke는 다음과 같은 네 번째 반박도 제시한다: 당신은 ‘Josef Haydn’Mozart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 이상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해보자. 그가 작곡한 작품의 곡명조차 단 한 가지도 모른다. 간단하게 말해 당신은 대상을 개별화(個別化)하는 기술구individuating description, 즉 세계의 다른 대상들로부터 이름 ‘Josef Haydn’의 담지자를 짚어내게끔 하여 주는 기술구를 일절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당신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지닌 그 어떤 문장도 형성해낼 수 없다:

 

Josef Haydn = F

 

다르게 말해 당신은 이러한 형식의 그 어떤 문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거나, 적어도 이러한 문장이 참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실정에서 기술주의 이론이 참이라면, 설사 ‘Josef Haydn’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Haydn을 결코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 당신이 ‘Josef Haydn은 작곡가였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더라도, Josef Haydn에 대해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말하거나 생각할 수조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잘못되었다. 당신은 분명 Haydn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Mozart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 알고 있다.

앞 단락에 제시된 마지막 네 번째 논증을 기술주의에 반대하는 무지(無知)로부터의 논변argument from ignorance이라 칭해볼 수 있겠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오류(誤謬)로부터의 논변argument from error과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GeorgeDante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그가 신곡의 저자라는 점뿐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기술주의에 따르면 ‘Dante = 신곡의 저자George에게 분석적이다. 그런데 역사를 통해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신곡의 실제 저자가 초라한 무명작가였던 Adriano라는 사람이었다고 해보자. Adriano신곡을 아무도 몰래 혼자 조용히 완성해내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Dante가 그를 교살하고 그 위대한 작품의 명성을 가로채었던 것이다. 이 경우 기술주의 이론은 George가 이해한 바와 마찬가지로 ‘Dante신곡을 썼다가 잘못된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기이하고 가상적인 상황에서조차도 ‘Dante’의 지시체는 Adriano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Dante이다. (1) ‘Mozart = 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명제가 우연적이고 경험적이라는 사실은, 이번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사례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무지 및 오류로부터의 두 논변이 보여주듯이, 고유명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대상을 식별해주는 기술구identifying description를 통해 대상을 짚어내는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는 기술주의적인 가정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는 그러한 기술구를 일절 갖고 있지 않더라도 고유명을 사용하여 그 이름의 대상에 대해 성공적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상에 대한 개별화/식별 기술구는 고유명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데 대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논증들을 통해 도출된 결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고유명은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표현directly referring expression이다(다만 David Kaplan은 정확히 이것이 Kripke의 결론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고유명은 Frege의 뜻(대상의 제시방식)과 같은 대상에 대한 모종의 개념적 표상(表象)conceptual representation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유명은 뜻 없이 오로지 지시만을 갖는다. J. S. Mill의 용어법을 따라 말해보자면 고유명은 그 지시체를 외포denote하기만 할 뿐 별도의 개념적 내용을 내포connote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Frege주의적 노선은 종종 직접지시이론direct reference theory이라 칭해진다. (역설적이게도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에 대한 ‘Russell주의적Russellian이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에 대한 Russell의 관점, 즉 고유명이 실은 대상에 대한 개념적 내용을 표현하는 한정 기술구가 위장된 형태라는 Russell의 관점을 부정하긴 하지만, Frege의 뜻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언어표현의 의미가 지시라는 소박한 의미론을 고수하고자 한 Russell의 핵심 기조만큼은 계승하기 때문이다.)

 

 

고정 지시어

 

전술했듯이 우연적으로 참인 문장이란 현실세계에서는 참이지만 어떤 -현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인 문장이다. 가령 ‘1965Beatles의 음반 판매량은 Rolling Stones보다 많다는 현실세계에서 참이지만, 어떤 -현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이다.7) 반면 필연적으로 참인 문장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7) (原註) 이런 의미에서 이란 명제와 세계 간 성립하는 관계이다. 다만 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현실세계에서 참현실적으로 참actually true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렇게 어떤 문장들은 세계에 따라 각기 다른 진리치를 갖는 반면 어떤 문장들은 모든 세계에 걸쳐 동일한 진리치를 갖는 것과 유사하게, 어떤 단칭용어들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관해 말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사물들을 지시하는 반면 어떤 단칭용어들은 모든 세계에 걸쳐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다음 두 단칭용어를 보자:

 

(4) 화성의 위성의 개수.

(5) 3보다 작은 양의 정수의 개수.

 

여기서 산술학의 진리는 필연적으로 참이라 해보자. 위 두 표현은 모두 수 2를 지시한다. 주지하다시피 화성의 위성은 PhobosDeimos 두 개이다. 그런데 두 표현이 -지시적인 이유는 현실세계에서 달을 공전하는 위성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태가 현실과 달랐더라면, 화성은 둘보다 많거나 적은 위성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실세계와는 다른 가능세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4)2가 아닌 다른 수를 지시한다. 즉 특정 사실적 환경에서는 화성의 위성이 네 개이거나 다섯 개였을 수도 있다. 반면 (5)그 어떤 가능적인 상황을 생각해보더라도 동일한 수를 지시한다. 3보다 작은 양의 정수가 정확히 두 개 뿐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에, (5)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5)와 같이 여러 세계들에 걸쳐서도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단칭용어를 Kripke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라 칭하였다. 반면 (4)-고정적non-rigid이다(또는 유연하다flaccid’).

주의할 사항이 있다; ‘3보다 작은 양의 정수의 개수라는 단어는 물론 지금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자연언어의 역사가 지금과 달랐더라면 그 단어가 다른 의미를 지녔을 수도 있다. 그 경우 (5)는 다른 대상을 지칭했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문장 총각은 미혼이다역시 지금 의미하는 바와는 다른 것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만일 총각고슴도치를 의미하고 은 미혼이다은 털이 없다를 의미한다면, 그 문장은 고슴도치는 털이 없다는 거짓 명제를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총각은 미혼이다가 필연적 참인지 여부에 관해 물을 때 우리가 진정 의도하는 바는, 그 문장의 의미가 주어져 있을 경우 그 문장이 거짓이 되는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문장의 양상성에 관한 물음은, 문장이 어떤 명제를 표현했을 수 있겠느냐 하는 의미론적인 사안에 관련된 물음이 아니라, 이미 특정 명제를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 어떤 세계에서 어떤 진리치를 가졌겠느냐 하는 형이상학적인 사안에 관련된 물음이다. 사실적인 의미론적 가정에 따라 한 문장이 각기 다른 명제들을 임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명제들은 당연히 제각기 다른(혹은 동일한) 진리치를 갖게 될 것인바 그러한 양상적 진리치는 매우 사소하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달라질/동일해질 것이다. 이렇듯 문장이 다른 명제를 표현할 것이라 가정함에 따라 달라지는/같아지는 식의 양상적 진리치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한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이 세계에 따라 달리 갖게 되는 종류의 양상적 진리치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총각이 미혼이라는 명제는 거짓이었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 답은 아니오이다. ‘총각은 미혼이다미혼 남성은 미혼이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5)가 고정 지시어인지 여부를 물을 때 우리가 진정 묻고 있는 바는, 그 단어의 의미가 주어져 있을 경우 그 단어가 수 2가 아닌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이다. 산술의 진리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앞선 가정을 고려하였을 때 그 답은 아니오이다.

이번에는 다음 두 표현을 생각해보자:

 

(6) Nixon.

(7) 미국의 37대 대통령.

 

실제 미국의 37대 대통령은 Nixon이다. Nixon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미국의 37대 대통령인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그렇다. 이렇듯 한정 기술구 형태의 (7)은 세계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을 지시하므로 고정 지시어가 아니다. 이에 다음 문장은 참이다:

 

(8) 미국의 37대 대통령은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실제로) 미국의 37대 대통령인 사람 즉 Nixon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이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6)은 어떠한가? 여기서 고유명 (6)의 지시체인 그 사람 Nixon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라. Nixon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Nixon인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NixonNixon이다. 그러니 다음 문장은 명백히 거짓이다:

 

(9) NixonNix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Nixon을 취하여 그가 Nixon이 아닌 가능세계를 찾아낼 수는 없다. 현실세계의 그 사람 NixonNixon이 아닌 가능세계란 없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가능세계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유명 ‘Nixon’이 고정 지시어라는 점이다: ‘Nixon’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이에 (9)와 같은 형식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한 용어의 고정성 여부를 검사하는 문장함수로 사용될 수 있다:

 

만약 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의 두 공란에 임의의 한 용어를 대입한 결과 문장 전체가 거짓일 경우 그 용어는 고정적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정적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Nixon’이라는 이름은 지금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즉 현실에서 ‘Nixon’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 Nixon‘Nixon’이라고 불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Nixon을 부르는 이름이 ‘Nixon’이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Nixon’이 고정 지시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니다. 고유명이 고정 지시어라는 아이디어의 요지는, 현실세계의 우리가 ‘Nixon’을 관습적인 의미로 사용할 경우라면, 다른 어떤 가능세계 내지 상상가능한 상황에 대해 말하더라도 동일한 사람인 Nixon에 대해, 즉 현실적으로 ‘Nixon’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절에서 살펴본바 고정 지시어에 대한 Kripke의 생각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a) 진정한 고유명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다(반면 (5) ‘3보다 적은 양의 정수의 개수사례가 보여주듯이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즉 모든 고정 지시어가 진정한 고유명 형태인 것은 아니다]).

(b) 진정한 고유명은 모두 직접 지시한다refer directly.

(c) 직접 지시하는 표현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지만, 모든 고정 지시어가 직접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이 역시 (5)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8)

 

8) (a)(b)(c)로부터 도출된다. 모든 고유명이 직접지시표현이고 모든 직접지시표현이 고정 지시어라면, 모든 고유명은 고정 지시어이다(Aristoteles 정언논리학의 1-AAA식인 소위 Barbara 형식에 해당).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외연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고유명의 외연이 가장 좁고 고정 지시어의 외연이 가장 넓으며, 개념적인 내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고유명 개념은 고정 지시어 개념을 함축하되 그 역은 아니다. 고유명과 직접지시표현 간의 정확한 포함관계는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는 불분명하다.


 

지시 고정하기: 인과의 사슬

 

Kripke의 평가대로 기술주의 이론이 틀린 이론이라 하자. 그렇다면 어떤 지시이론reference theory이 참이겠는가? 만약 당신이 Haydn을 짚어내게끔 해 줄 여하한 기술구를 알지 못한다 해도 ‘Josef Haydn’이라는 이름만으로 Haydn을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면, 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Kripke는 여직껏 아무도 그러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단순하고도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을 내놓는다. 다시 ‘Haydn’ 사례로 돌아가보자. 이름 ‘Haydn’을 사용 할 때 당신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Haydn”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미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당신에게 ‘Haydn’이라는 이름을 말해 준 사람들, 예컨대 당신 주변의 친구들, 책이나 잡지의 저술가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사람들 등을 일컫는다. 편의를 위해 그러한 사람들 전부를 대표하는 한 인물 A를 상정하자. A‘Haydn’을 통해 누구를 의미하는가? A 역시 다른 누군가인 B로부터 그 이름을 듣고 나서는, ‘“Haydn”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B‘Haydn’을 통해 누구를 의미하는가? B 역시 C로부터 그 이름을 들었을 것이며, CD에게서 들었을 것이며 등등 이렇게 계속된다. 요컨대 ‘Haydn’을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는 당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사슬historical chain이 얽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슬이 이어진 방향을 당신에서 시작하여 추적해 간다면 어디에 이르겠는가? 아마 최종적으로는 Haydn을 실제로 알았던 사람들, 그를 직접 보아서in person 알았던 사람들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한 남성 내지 한 어린 아이를 소개받으면서 얘가 바로 Haydn이에요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름 ‘Haydn’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그의 부모이다. 그의 부모는 까르륵거리며 웃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자식을 보며 애 이름은 “Josef”라고 합시다하고 말했을 것이다. 부계 성을 따른다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그 아이의 이름은 ‘Josef Haydn’이 된다. 이것이 Haydn에 대한 명명식(命名式)dubbing/ceremony of naming의 현장이다. 그 시점 이후로 부모는 그 아이를 지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부모로부터 그 이름을 듣게 된 사람들은 그 부부가 지시하는 아이를 지시하기 위해 역시 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며, 그렇게 ‘Josef Haydn’의 사용에 관한 역사적인 사슬이 시작된다. 종종 활용되는 경제학적인 비유를 들어 말해보자면, Haydn의 부모는 이름을-사용하는 관행name-using practice에서 ‘Josef Haydn’생산자producer이며, 그 이름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소비자consumer인 셈이다.

이 이론의 장점은, ‘Josef Haydn’으로 칭해지는 사람이 누구인지 설사 정확히 모른다 하더라도,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 작곡가를 성공적으로 지시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당신이 그 이름을 통해 누구를 지시하느냐 하는 사안은, 그 이름과 얽힌 어떠한 의사소통에 참여하고자 (암묵적으로) 의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시 고정하기: 기술구

 

[고유명을 사용할 때 기술구를 경유하여 대상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술구의 사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앞 절에서 말한바 고유명을 사용할 때 암묵적으로 떠올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름 N을 통해 지시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표현 역시 기술구가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기술구가 이름 N의미를 부여give the meaning하지는 않는다. [고유명을 사용할 때 그러한 기술구가 개입된다고 해도] 기술구 이론에 대한 Kripke의 반박논증은 여전히 주효하다. Haydn이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은 Haydn에 대한 우연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이라는 기술구 역시 Haydn과 우연히 결부되었을 뿐, ‘Josef Haydn’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서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이름 ‘Josef Haydn’A로부터 듣게 되었다 가정한 뒤,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자:

 

(10) Josef Haydn = 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

 

이 문장은 참이며, 따라서 두 단칭용어 ‘Josef Haydn’‘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은 사실상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표현의 의미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두 표현은 전연 동등equivalent하지 않은바, 필연적으로 동등하지도 않으며 인식론적으로 동등하지도 않으며 개념적으로 동등하지도 않다. Frege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두 표현의 인지적 가치는 다르다. Haydn‘Josef Haydn’으로 불리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라면 (10)은 거짓이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A‘Josef Haydn’을 통해 Josef Haydn을 지시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Kripke에 따르면 ‘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과 같은 식의 기술구는 이름에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름의 지시를 고정fix the reference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Frege(Russell)는 언어-사용자language-user의 마음속에 이름의 지시체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intention가 있어서, 그 의도의 내용content of that intention이 이름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였다. Kripke가 보기에 결정적인 문제점은 두 번째 주장이다.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것이 반드시 이름의 의미 내지 이름의 인지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술구가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 이름은 아니다.

Kripke의 생각을 이에서 더 밀고 나가볼 수도 있다. 한 언어-사용자가 어떤 이름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그 사람은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가? [즉 이름의 지시체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름의 성공적인 사용에 대한 필요조건인가?] 그렇지 않다! 표현될 수 있는 모종의 인지적 가치를 이름이 반드시 지녀야만 한다는 생각을 일단 폐기하고 나면, 우리가 관심하는 사안은 오로지 이름이 무엇을 지시하는가일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시이론에서 우리가 필요한 전부란 어떤 사실이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해주느냐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화자의 마음속 명백한 의도라는 것이 그러한 사실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 쌍의 의미론적 규칙을 상정할 수 있다:

 

1   A가 어떤 주어진 대상을 이름 NN으로 명명한다면, NN을 사용할 때 ANN을 통해 그 A대상을 지시한다.

2   C가 이름 NNB로부터 들었고 CNN을 사용한다면, BN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 든 C 역시 NN을 통해 그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의미론적 규칙 내지 규약은 (설사 화자가 그 규칙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화자가 한 이름을 통해 지시하는 바를 결정한다.

지시-고정reference-fixing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고 나면, 고유명의 지시체가 Frege Russell이 생각한 바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는 방식으로 고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옷가게 점원은 가게에 자주 와서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한 손님을 지시하기 위해 굼벵이 아가씨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고 약정(約定)stipulate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점원은 그 이름의 지시체를 단지 명시하고 있을 뿐, ‘굼벵이 아가씨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점원은 굼벵이 아가씨라는 이름과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그 손님이라는 한정 기술구가 동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자와 다르게 전자는 고정 지시어이다. 점원은 이러한 약정을 활용하여 , 오늘은 굼벵이 아가씨가 쇼핑하러 오지 않았음 좋겠다!’ 하고 말할 수는 있다. 다만 그러한 약정을 하고 그것을 아무리 자주 활용하더라도, 그 점원은 다음 문장이 명백히 우연적으로만 참이라 생각하지 그 어떤 의미에서도 필연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11) 굼벵이 아가씨 =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그 손님

 

이렇듯 한정 기술구는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렇기에 [고유명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Josef Haydn’ 사례에서 보았던 바와 같은 명명식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활용될 경우의 기술구는 [마치 대상에 이목을 끌기 위해 동원되는 손가락이나 지휘봉처럼] 대상을 가리키는-장치[(손가락이 실제적물리적으로 대상을 가키리는 것과 유사하게 대상을 언어적으로 가리키는 장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그런데 고유명에 대한 Kripke의 그림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들이 있다: 첫 번째로, 어떤 이름의 경우엔 기술주의 이론에 더 잘 부합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스의 역사 이전 시대의 실제 사실이 어떠하였든 간에 이름 ‘Homer’가 지금도 그러하듯이 애초에 IliadOdyssey의 저자라는 한정 기술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의도된 이름이라 생각할 것이다. 앞서 고찰했던 사례들과 달리, 그 기술구는 단지 ‘Homer’라는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기 위해서만 동원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토막 살인마 JackJack the Ripper’9)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이 이름 내지 별칭은 누군지를 특정할 수 없는 살인사건의 범인에 적용될 법한 특정 기술구가 단지 축약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토막 살인마 Jack은 토막 살인마 Jack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전연 이상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Nixon’은 진정한 고유명이기에 NixonNix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명백히 거짓인바 앞서 살펴본 고정성 검사를 통과하는 반면, ‘토막 살인마 Jack’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그 사람과 같은 한정 기술구의 축약일 뿐이기에 고정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9) 1988년 영국 이스트엔드 지역의 윤락가 화이트채플에서 일어났던 미제사건의 범인에게 붙여진 별명. 우리말의 김철수와 같이 아무개를 의미하는 범용한 이름 ‘Jack’, 발견된 시신 다섯 구 대부분이 처참히 훼손된 상태였기에 갈가리 찢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ripper’가 활용되어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슈퍼맨이라든가 ‘Santa Claus’와 같은 소위 허구적 실체fictional entity를 지칭하는 고유명에 관해서는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 그러한 이름들은 단지 지시하도록 가장(假裝)pretended to refer것일 뿐, 실제로 무언가를 지시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들이 단순히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기에, 허구적 고유명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는 그 지시체로 의도된 허구적 대상이 만족할 법한 모종의 기술구가 개입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Kripke의 이론에 대한 진정한 반례인지 여부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 Kripke의 주장을 통상적인 사례에 속하는 고유명으로 한정하여, 즉 앞서 고정 지시어말미에 있는 박스에서 언급된바 진정한 고유명에만 한정하여 그러한 이름들의 경우엔 기술주의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으며, 이는 기술주의 이론에 부합하는 이름이 일절 없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여도 Kripke 이론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사례가 Gareth Evans에 의해 제시되었다.10) 알려진 바에 따르면 Madagascar 섬은 본디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고 한다. ‘Madagascar’는 원래 아프리카에 있는 한 해안가의 일부를 일컫는 명칭이었는데, 유럽의 탐험가들 및 지도 제작자들의 착오로 인해 그 해안가의 앞바다에 있는 거대한 섬의 이름으로 잘못 전이되어버렸다는 것이다. ‘Homer’ 사례와는 다르게 이번 사례의 경우 ‘Madagascar’는 기술구가 축약된 이름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Madagascar’는 진정한 고유명으로서 분명 Kripke가 제시한 논증들이 적용되는 종류의 이름이다. 이와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사례들은 얼마든지 많이 제시될 수 있겠으나 여하간 그 모든 사례들의 공통점은, 한 이름을 현재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칭하는 대상과 최초에 그 이름을 생산한 사람들이 본디 지칭했던 대상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정확히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앞선 두 사례와는 달리 Kripke 이론에 대해 명백하고 심각한 문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어떤 해결책이 되었든, 언어 공동체 내에 이어져 온 역사적 사슬이 예상치 못하게 어그러질disrupted 수 있다는 사실, 즉 이름이 사용되어온 역사적 사슬의 한 지점에서 이름과 그 지시체에 대한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가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0) (原註) 이 사례 및 여타 예시들에 관해서는 G. Evans, 이름에 대한 인과이론The Causal Theory of Names(G. Evans 選集, 옥스퍼드: 옥스퍼드대학교출판부, 1985, 1-24쪽에 수록) 참조. 본문에 제시된 ‘Madagascar’ 사례는 11쪽에 제시되어 있다.


 

FregeRussell에서부터 계속되는 문제들

 

Russell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진정한 고유명은 아니라고 믿었다. 통상적인 고유명은 단지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며, 그의 이론에 따르면 한정 기술구는 단칭용어가 아니라 양화사이다. 오직 감각-자료(및 자아)를 지시하는 이름만이 논리적 고유명이다. Frege와 달리 Russell의 관점에서 논리적 고유명은 아무런 기술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 Frege가 말한바 지시체의 결정 규칙 및 지시체의 현상방식 따위를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직접지시론은 Russell주의적이라 칭해진다.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이 기술적 내용을 갖는지 여부의 문제에 대해 Frege에 반대하고 Russell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도 고유명은 아무런 기술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지시론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진정한 고유명 즉 논리적 고유명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Russell과 관점을 달리한다.

통상적 고유명에 대한 Frege Russell의 기술주의 관점에 반대하는 Kripke의 논증은 매우 강력하다. 그런데 Frege로 하여금 뜻 이론을 정립하도록 추동하고, Russell로 하여금 직접대면된 항목만이 논리적 고유명의 지시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견지하도록 만들었던 인식론적 이유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컨대 직접지시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겠는가?:

 

Hesperus = Phosphorus.

JohnHesperus가 행성이라고 믿는다.

JohnPhosphorus가 생성이라고 믿지 않는다.

 

Kripke의 관점에서 보자면 ‘Hesperus’‘Phosphorus’는 어쨌든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동일한 인지적 내용을 갖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 경우 위의 세 문장은 분명 동시에 참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Vulcan’과 같이 비존재에 대한 이름과 얽힌 문제는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처리될 수 있겠는가? 분명 ‘Vulcan’은 단순한 허구적 이름이 아니며 통상적인 고유명으로서 진지하게 의도된 이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시체를 갖고 있지 않기에 Kripke‘Vulcan’과 같은 이름이 무의미하다는 잘못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는 2에서 살펴본바 지시와 의미를 동일시하는 소박한 지시론이 봉착하는 것으로 Frege가 진단했던 바로 그 문제로서, 소박한 의미론의 기본 원리를 그대로 고수하는 직접지시론 역시 이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Vulcan’‘Nessie’는 공허한 단칭용어이기에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는 동일하게 무의미하며, 따라서 ‘Vulcan은 뜨겁다‘Nessie는 뜨겁다가 동의적 문장이라는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세 가지 가능한 선택지가 있는 듯하다. 첫 번째는 기술주의적 관점과 직접지시론적 관점을 적절하게 통합하는 것으로서, 언어의 인지적 차원에 대해서는 FregeRussell이 발전시킨 설명을 받아들이되, Kripke가 지시 및 필연성에 관해 지적한 사실들 역시 수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Kripke의 논증을 다시 논박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Kripke의 논증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Frege반대하는 것으로서, 언어표현의 지시에 관한 문제와 인지적 차원에 관한 문제를 날카롭게 구분한 뒤, 언어철학적으로 개입해야 할 유일한 문제로서 전자에 대해서는 Kripke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후자는 인식론, 심리철학, 심리학 등의 문제로 남겨놓는 것이다. 우리는 8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추가적인 논의: 내포 의미론

 

미국의 44대 대통령은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44대 대통령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두 기술구는 동일한 개체를 짚어내지만,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두 기술구가 동일한 대상을 필연적으로 짚어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미국의 42대 대통령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다.

박쥐는 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이다(날다람쥐는 나는 게 아니라 활공할 뿐이라고 가정하자).따라서 두 술어 ‘𝛼는 박쥐이다‘𝛼는 날 수 있는 포유류이다-외연적이다. 즉 박쥐의 집합은 날 수 있는 포유류의 집합과 정확히 동일하다. 하지만 두 술어는 분명 동의적이지 않다. 두 술어표현의 의미는 다르다. 이는 현실세계에서 박쥐의 집합과 날 수 있는 포유류의 집합이 정확히 동일하긴 하지만, 두 집합이 일지하지 않는 다른 가능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어떤 가능세계에는 두 술어 중 하나만을 만족하는 생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대응성에 주목한 많은 철학자들은 언어표현의 의미가 이런 식의 가능세계에 따른 작동방식behaviour across possible world 즉 언어표현의 양상적특질‘modal’ feature과 부합해야 된다는 생각을 제시해왔다. 모든 언어표현은 하나의 내포(內包)intension를 가지며, 이 내포는 각 가능세계에 따라 그 세계에서의 한 외연(外延)extension을 결정한다. [다르게 말하면 언어표현의 내포는 가능세계로부터 외연을 사상하는 함수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의 내포는 현실세계에서 Barack Obama를 그 외연으로 결정하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Jesse Jackson,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또 다른 대상을 그 외연으로서 결정한다. ‘𝛼는 날 수 있는 포유류이다의 내포는 현실세계에서 ‘𝛼는 박쥐이다와 동일한 외연을 결정하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가령 날아다니는 웜뱃의 집합과 같은 다른 외연을 결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명제를 문장 전체의 내포와 동일시해볼 수 있다. 1이후로 우리는 명제를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과 유사한 구조를 갖는 추상적인 대상으로 가정해왔다. 이제 이러한 명제개념 대신, 명제를 문장 및 발화의 맥락context of utterance으로부터 그 문장이 (주어진 그 발화의 맥락에 따라) 참인 세계들의 집합을 사상하는 함수(函數)function로 생각해볼 수 있다. 문장의 내포는 각 세계에 따라 그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현실세계에서 ‘Barack Obama는 미국의 44대 대통령이다의 진리치는 ‘VoltaireCandide를 저술했다의 진리치와 같다. 하지만 이는 현실세계에서만 성립할 뿐, 다른 가능세계에서 두 문장의 진리치는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는 문장이 보이는 양상적 작동방식modal behaviour의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표현이 보이는 양상적 작동방식의 측면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문장의 뜻을 문장의 진리-조건으로(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표현의 뜻을 그 표현의 지시-결정조건으로) 특징지은 Frege의 생각과 잘 부합한다. 즉 문장의 뜻이 곧 문장의 진리-조건이라는 말은, 문장의 내포가 곧 문장이 참이 되는 환경들의 집합이라는 말과 같다.

이러한 소위 내포 의미론intensional semantics 및 그 다양한 변형태들은 지난 60여년간 의미를 해명하는 데 대한 가장 유력한 접근방식이었다. 이 이론은 매우 직관적이다. ‘은 빨갛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 무엇이 빨간 것으로 간주되는지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상황 즉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무엇이 빨간 것으로 간주될 것인지 역시 알아야 한다. 언어표현들 간 의미의 차이를 확실하게 판명해내는 가장 신뢰할 만하면서도 익숙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가상적인 추론을 진행해보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임의의 언어표현 AB의 외연이 일치하긴 하지만, 양자가 갈라지는 다른 가능한 상황이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AB의 의미는 다르다.

하지만 그 은 참이 아니라는 데에 내포 의미론의 난점이 있다. AB의 외연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일치한다고 해도, 양자의 인지적 가치가 항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2+2=4’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와 같이 AB그 자체로 필연적 참이라면, 두 문장의 진리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일치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두 문장의 의미가 같다고 여겨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포적 동등성intensional equivalence은 인지적 동등성congnitive equivalence을 함축하지 않는다. [즉 임의의 두 언어표현의 내포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외연을 결정한다 해도, 두 표현의 의미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한다.] 술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 필연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갖지만 인지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술어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𝛼는 둥근 사각형이다‘𝛼는 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이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집합empty/null set을 그 외연으로 갖는바 필연적으로 -외연적이지만, 양자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 단칭용어의 경우엔 방금 언급되었던 두 술어로 구성된 한정 기술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둥근 사각형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바 내포적으로 동등하지만, 인지적으로도 동등하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멀게는 1940년대 후반 Frege 철학에 토대를 두었던 R. CarnapAlonzo Church를 위시하여, 작금의 철학자들로는 Richard Mongtague, David Kaplan, David Lewis, Robert Stalnaker `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접근법과 해결책들이 제시되어왔다. 초기의 접근법은 문장의 구성적 구조compositional structure에 호소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둥근 사각형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갖긴 하지만, 동등한 내포를 지닌 구성 부분들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있지는 않다. 간단히 말해 두 표현은 동의성에 대해 Carnap이 요구한 내포적 동형성intensional isomorphism을 띠지 않는다. Carnap의 내포적 동형성 조건에 따르면 동의적인 문장들 즉 인지적으로 동등한 문장들은 내포적으로 동등intensionally isomorphic해야 하는바, 동일한 내포를 갖는 구성 부분들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Carnap의 이론 및 내포 의미론과 연관된 여타 이론들은 여기서 상세히 살펴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주제이다.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의미론 분야에서 FregeRussell의 이론마냥, 내포 의미론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우월하고 지배적인 위상을 갖는 하나의 이론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언어표현의 양상적 작용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성공적인 의미론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이라고 가정해보고자 한다. 그 어떤 형태가 되었든 의미에 관한 이론은 한 문장이 복수의 가능세계들을 걸쳐서 갖는 진리-조건에 대해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사항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명한 철학자들(특히 HumeAyer)은 선험성 후험성(또는 경험성), 필연성 우연성, 분석성 종합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쌍에 대해 각 쌍을 이루는 항목들이 서로 나란히 가는 개념들이라는 점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첫 번째와 두 번째 개념쌍은 세 번째 것으로 환원되거나 그에 의해 설명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선험적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기이한 인식론적 능력이 요구될 필요는 없으며, 필연적 참이라는 개념에는 아무런 불가사의함도 없다. 양자는 모두 의미론적 측면에서,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측면에서 남김없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전통철학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실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였던 사안들이 실제로는 단지 언어와 관련된 사안인바 진지한 해결책이 필요한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앞서 4에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FregeRussell이 체계화한 강력한 새로운 논리학으로 무장한 채, 이렇듯 선험성과 필연성을 분석성으로 환원하는 관점을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형이상학을 제거하고 인식론을 명료화하고자 도모하였다. Carnap세계의 논리적 구조(19671928)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1950: 의미와 필연성: 의미론 및 양상논리 연구(1956)에 수록), 그리고 Ayer언어, 진리, 논리(1936, 개정판은 1946년에 출간)는 이러한 관점을 천명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이었다.

한편 Kripke1971년에 논문 동일성과 필연성Identity and Necessity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이름과 이론을 널리 알리게 된 명저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1980년에 출간되었다. (사실 이 저서는 본디 Donald DavidsonGilbert Harman이 편집하여 1972년에 출간한 자연언어의 의미론Semantics of Natural Language에 수록된 것이 첫 공식 출판이었다.) 거기서 KripkeCarnapAyer에 반대하여 위의 세 개념쌍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논증을 펼치면서, 선험적(후험적)이면서 필연적인 명제 및 선험적이면서 우연적인 명제의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Kripke의 관점은 언어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인식론, 형이상학, 과학철학 등의 분야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Kripke의 관점은 Carnap을 위시한 논리실증주의의 대두 이후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던 형이상학을 부활 및 해방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Kripke의 저서가 출간된 이후로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이 단지 우리의 개념에 암묵적으로 포함되어있는 분석적인 것[(즉 실질적 지식이 아니라 개념 내지 언어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협소한 단서조항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마음껏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지성사의 위대한 변화들에서 으레 그러했듯이, Kripke는 이러한 혁명적 전환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David Kaplan, Peter Geach, Keith Donnellan, Hilary Putnam 등의 인물들이 1960년대에 소위 새로운 지시이론new theory of reference에 관해 많은 수의 저술을 남겼다. 이 이론의 핵심 착상은 Ruth Barcan Marcus1947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양상논리(樣相論理)modal logic에 관한 저술들에서 처음 제시되었던바, Marcus는 이름을 기술적이지 않은[기술적 내용을 갖지 않는] “이름표descriptionless “tag”로서 특성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전설적인 사건은 1962년에 열린 보스톤 과학철학 학술회Boston Colloquium for Philosophy of science에서 있었던 만남이다. 거기서 Barcan Marcus는 그녀의 1961년 논문 양상적과 내포적 언어Modalities and Intensional Languages의 결론을 발표하였다. 청중에는 W. V. QuineAlfred Tarski 같은 쟁쟁한 원로급 철학자들 사이에 젊은 Kripke도 있었는데, 열여덟 나이였던 1959년에 양상논리에 관해 발표했던 매우 중요한 글 한편을 통해 Kripke는 당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무엇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리고 Kripke가 거기서 듣게 된 것들을 얼마나 간직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쟁론이 분분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Barcan Marcus가 직접 지시론의 핵심 착상을 최초로 발견해낸 것이 맞을진대, 그녀는 그 아이디어가 함축하는 바를 Kripke만큼 날카롭고 철저하게 파헤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의 요약

 

이번 장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의미의 가능성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어떤 명제 p가 가능하다[가능적이다]는 말은. 설사 실제로는 p가 사실이 아니고 p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도, p였을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핵무기를 개발하였다는 명제는 실제로는 참이 아니지만 가능한 명제이다. 가능성과 필연성은 다음과 같이 상호-정의가능하다: p의 부정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p는 가능적이며[∼□∼p → ◇p], p의 부정이 가능적이지 않다면 p는 필연적이다[∼◇∼p → □p]. [이러한 양상성 개념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활용되는] 가능세계라는 개념은 [그와 연관된 형이상학적 문제를 차치한다면] 최소한 이론적 발견에 유용한 수단으로서, 단순하게 생각해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FregeRussell은 크게 보자면 고유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였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임의의 통상적인 고유명 N에 대해, N이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매 경우마다 그 이름은 F 형식의 한정 기술구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Kripke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1)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2)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선험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3)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분석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4) ‘N = F’(여기서 F는 그 자체로는 언어적 조건이 아니다) 형식의 아무런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더라도 N이 포함된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름의 지시체가 되는 대상을 기술하는 지식descriptive knowledge을 일절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이름을 통해 대상을 무리 없이 지시할 수 있다.

이에 Kripke는 무엇이 지시를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기술주의 이론의 대안으로서 다음과 같은 인과-역사적causal-history 이론을 제시한다: 이름 N을 사용할 때 나는 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는가? 나는 그 이름을 나 이외의 다른 언어-사용자인 A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A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였는가? A는 그 이름을 B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B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였는가? 이렇게 인과적-역사적으로 이어진 이름 사용의 사슬을 역추적해 가면, 가령 이 대상을 “N”이라 일컫기로 하자와 같은 말을 통해 이뤄지는 명명식에 의해, 혹은 F“N”이라 일컫기로 하자와 같은 기술구의 활용에 의해, 이름 N의 지시체가 고정되었던 시점에 최종적으로 이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의 경우 F’ 형식의 기술구가 단지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최초 지시-고정단계에서 도입된 기술구는 이름 ‘N’과 동의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바, 지시체를 고정하는 데에 기술구가 활용된다고 해서 ‘N’이 그 기술구에 의해 표현되는 여하한 개념적 내용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통한 지시가 성공적인지 여부에 대한 기준은 사용자가 그 이름 사용과 얽힌 역사적 연쇄를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와는 전연 무관하다. 즉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이름 사용의 연결고리가 어떤 경로를 거쳐 최초의 지시-고정행위reference-fixing act에까지 이어지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Kripke가 말하는 고정 지시어란 (지시체가 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제외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항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용어이다. 고정 지시어가 아닌 용어들은 -고정 지시어 내지 유연한 지시어라 칭해진다. 고정 지시어의 사례로는 사각형의 변의 개수를 들 수 있으며, -고정 지시어의 사례로는 미국의 42대 대통령을 들 수 있다. Kripke에 따르면 통상적인 고유명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다. 따라서 가령 ‘Charles Lutwidge Dodgson = Lewis Carroll’은 필연적으로 참인 반면, ‘Lewis Carroll = 이상한 나라의 Alice의 작가는 현실세계에서 참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 ‘Charles Lutwidge Dodgson Charles Lutwidge Dodgs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거짓인 반면, ‘이상한 나라의 Alice의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Alice를 저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참이기 때문이다.

내포 의미론이란 가능성 개념을 통해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미론의 한 조류이다. 한 문장의 의미를 앎으로써 임의의 가능세계에서 그 문장이 참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착상을 통해, 많은 철학자들은 의미를 양상적 진리-조건modal truth-condition과 동일시하는 의미론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다. 내포 의미론의 문제점은 한 문장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갖는 진리치를 안다고 해서 그 문장의 의미를 아는 데에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문장들의 경우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진리치를 갖겠지만 그 의미는 분명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탐구문제

 

1.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이론에 찬동하는 다음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름 N에 대한 임의의 사용자가 제시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술구가 존재하며, 그 기술구는 올바른 대상을 지시한다: ‘언어 공동체가linguistic community 이름 N을 통해 실제로 지시하는 그 대상’. 기술주의 이론에 대한 Kripke의 네 가지 반론 각각을 이 주장에 적용하여 검토해보라. Kripke의 반론은 이 주장에도 주효한가? 혹시 이 주장에는 악순환이 포함되어있지는 않은가?


2.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는 정말 아무런 개념적 자원도 필요하지 않은가? 대상에 대해 단순한 소음 이상의 유의미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지의 개념적 내용이 필요한 듯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언어-사용자가 고유명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이해하거나 혹은 의도해야만 하는 개념적 내용이란 무엇이겠는가?


3. Smith 부인이 산부인과에서 한 아이를 출산하였다. 갓 태어난 꾸물대는 아기를 건네받은 그녀는 애 이름은 ‘Roger’로 할 거야하고 말한다. 얼마 후 아기는 몸무게가 재어지고 건강상태를 확인받은 후 깨끗이 씻기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과정에서 Smith 부인의 아기는 그 산부인과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출생한 ‘Sam’이라는 이름의 다른 아기와 실수로 바꿔치기 되어버린다. 이러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하여 본디 ‘Sam’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아기는 Smith 부부 슬하에서 ‘Roger’라고 불리며 성장하게 된다.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 산부인과에서 있었던 사건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 아이는 Roger가 아니라 다시 Sam이 되는 것인가?


4. 파리Paris에는 한때 1미터 길이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간주되었던 이른바 표준 미터자라는 금속 막대가 있다. 따라서 그 기준이 통용되던 당시에는 표준 미터자의 길이 = 1미터가 당연히 필연적인 참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Kripke는 이에 반대한다. 이 사례에 관해 Wittgenstein이 언급했던 바와는 다르게, Kripke(특정 시점에) 표준 미터자의 길이가 1미터라는 명제가 선험적이면서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표준 미터자는 실제 그 막대의 길이보다 길거나 짧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정 시점에) 표준 미터자의 길이는 1미터이다는 단지 ‘1미터의 지시를 고정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Kripke는 이러한 주장을 하였는가?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5. ‘눈은 하얗다눈은 하얗고 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를 생각해보자. 두 문장은 동일한 내포를 갖는가? 양자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진리치를 갖지만,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의미는 분명 다르다. 내포 의미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직관에 부합하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주요 읽을거리

 

Kripke, S. (1980),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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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아트 - 인상주의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역사
한스 베르너 홀츠 바르트.라슬로 타셴 책임편집, 엄미정 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19세기 말 인상주의부터 동시대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미술사조 및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각 장별로 현대미술사의 한 사조를 할애하되, 첫 글로 각 사조를 전반적으로 개괄하는 글을 배치하고 이후엔 그 사조에 속할 법한 작가 내지 작품들을, 복수의 저술가들이 하나씩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구성이 특이하기에, 정석적인 미술사 서적으로 읽기엔 비교적 통일성이 부족하고, 개별 작가들 내지 사조들에 대한 해설서로 읽기엔 많이 빈약하지만, 현대미술사 및 미학이론에 다소 숙달해 있는 사람이라면 외려 그러한 점으로 인해 물러 앉아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한 사조 내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들만을 대강 알고 있던 차에, 그에 비에 좀 더 넓으면서도 엷은 스펙트럼에 할당될 법한 작가 및 작품들(혹은 대표적 작가들의 작품이되 대표작이 아니라 덜 조명되어 온 마이너한 작품들)을 각 사조별로 접해볼 수 있어 신선하였다. 


 책을 사면 책과 분리되는 겉표지가 있을 경우 거추장스러워 으레 걷어내어 그냥 버리고는 하는데, 먼로가 붉게 웃고 있는 이 책은 겉표지를 버리고 나니 본 책몸의 양장 표지가 새하앴다. 그 흰 배경에 붉은 색으로 쓰인 '모던아트' 네 글자 디자인이 참 괜찮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겉표지 없이 손때 묻혀가며 읽고 보니 이제는 책 모양새가 첫 샀을 때만큼은 영 꼴나지가 않는다. 혹여 책을 아껴 깔끔하게 읽어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먼로의 얼굴을 절대 버리지 말기를, 혹여 나같이 귀치않아 버리더라도, 어디 편한 데 퍼질러 앉아서는 독서대에 놓은 채 얌전히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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