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걸어놓는다.
감개가 무량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화장실에 수건을 바꿔놓는 것과는 역시 차원이 다르다. 날짜 지난 달력을 곧바로 휴지통에 쑤셔 넣지 못하고 조심스레 어루만지거나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나는 하루가 지나면 넘겨버리는 일력이 아닌, 한 달 단위로 된 꽤 큰 달력을 쓰고 있다. 날짜 밑에 메모를 할 수 있는 네모난 칸이 있어서 거기에 그날 일정을 써넣는 식이다. 끝이 말려 올라간 달력에 빨간 색연필이나 볼펜으로 쓴 열두 달의 기록을 보고 있자면, 그날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바로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얗게 비어 있어 뭘 했는지 알 수 없는 날도 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특별한 일도 없이 그저 맥없이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써넣지 않았을 뿐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더라도 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날인지도 모른다. 밥알에 섞인 돌을 무심코 씹은 것 같은 사소한 불쾌감을 나도 모르게 잊어버린 날일 수도 있다.
지나고 나면 이미 떠올릴 수조차 없는 시간과 감정이 겹겹이 쌓인 게 바로,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의 날짜 지난 달력인 것이다. 그냥 가지고 있을까 하는 미련을 떨쳐버리듯 조금 사납게 휴지통에 던져 넣는다. 그러고는 못이 튼튼한지 확인하고 새해의 새하얀 달력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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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구니코 작가는 재미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실린 어떤 글은 베게에 관한 다양한 일화가 나옵니다.
1981년에 돌아간 드라마 작가인데도 전 세계 곳곳을 여행했습니다. 아마도 우리 나라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것이 1980년대 말(1989년)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집니다. 업무가 아니라면 해외 여행을 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때입니다. 물론 작가도 업무상으로 갔겠지요? 그래도 1929년생이 젊은 나이에 아프리카까지 여행한 것이 놀라웠습니다. (물론 몇 세에 아프리카에 갔는지 나오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차이를 포착한 글들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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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홈드라마를 쓸 때면 큰 무대장치나 소품을 담당하는 분에게 세 가지 희망사항을 말씀드린다. 현관에서 부엌으로 가는 통로에 구슬로 엮은 가리개 같은 걸 걸어놓지 말라는 것과 전화기에 강아지 누비옷 같은 커버를 씌우지 말라는 것, 한 뼘이라도 되는 다다미방이 있으면 슬리퍼를 놓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특히 주부에게는 슬리퍼를 신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세 가지이다. 구슬 달린 가리개는 통과할 때 나는 잘그락잘그락 소리가 듣기 싫고 색색의 구슬이 흔들리는 게 영 눈에 거슬린다는 내 개인의 취향이 작용했지만, 슬리퍼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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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구니코 작가는 1929년에 태어나 1981년에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 비행기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려고 시동(?)을 걸고 얼마지나지 않아, 한 승객이 강력하게 주장해 비행기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비행기는 이륙했고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내린 사람은 전직 전투기 파일럿이였는데, 엔진 소리에서 이상을 감지해 먼저 내렸다고 합니다. 작가는 그 이후 비행기가 이륙할 때마다 긴장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작가의 어머니는 처음 비행기를 탈 때는 많이 긴장했지만, 그 후에는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하셨고 심지어 비행기에서 사고가 나면 항공사에서 장례까지 치뤄준다고 좋아하셨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진짜로 비행기 사고로 돌아갔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만에서 이륙하는 비행기 사고였다고 합니다.

1929년생이 각본을 쓴 드라마 <아수라처럼>도, 이 책도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리한 관찰,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분량 등이 리드미컬합니다. 작가는 경제적으로 꽤 여유있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1981년은 버블경제가 오기 전이었는데도, 위스키에 졸인 무화과 등 작가의 생활이나 소재는 꽤 여유가 있습니다.

*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왜 혼자만 내렸을까요? 비행기 소리가 이상하다고 주장을 했더라도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살아남은 생애동안 어떤 마음이었을지...무겁게 다가옵니다.

* 어쩜 이렇게 뒤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 무코타 구니코 작가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짧고 쉬운 듯 하지만, 글에 담겨있는 여러 상황들을 해석해보는 건 독자 혹은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콘텐츠의 풍부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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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인간 관찰기’라는 문구가 딱 어울립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집입니다. 드라마 <아수라처럼>이 재밌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세 자매의 모습에 드라마 작가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유쾌하고 예리하게 관찰한 내용들이 재미있습니다.

* 드라마 <아수라처럼>의 둘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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