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들의 용맹함과 대위의 용맹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건, 그게 무슨 말이든 어떤 대단한 말이 내 영웅의 마음을 간질이더라도 그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확신한다. 첫째, 그는 대단한 말을 하다가 그로 인해 위대한 일을 망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위대한 일을 할 사람이라면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습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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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터에서 사람들이 재미있게 일하도록 하려면 직장 내에 선택의 폭을 가능한 많이 넓혀주고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많이 제공하면 된다.
출퇴근 시간부터, 작업의 순서, 작업의 내용 등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많이 제공하면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내적 동기에 의해 행동하듯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를 ‘지각된 자유감 perceived freedom’라 한다. 실제의 자유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 선택으로 느꼈는가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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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다양한 신화에 있는 비슷한 점을 알게 된 것도
좋았습니다.
알기 어려웠던 신화의 전승 이유와 의미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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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2. 내면으로의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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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토요일마다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 되면 한 주일 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더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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