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고 하면서도 고난에 무기력한 이유

악과 고난에 관해 크리스천들이 가진 첫 번째 자산은, 인격적이고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주관하신다고 믿는 신앙이다. 이는 변덕‘스러운 운명과 가늠할 수 없는 우연이 삶을 쥐고 흔든다는 악의 문제 앞에서 더할 수 없는 위안을 준다.
두 번째 결정적인 교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셨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신은 세상사에 멀리 떨어져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세계관과 대척점에 서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세 번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를 믿음으로 구원을얻는다는 신념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미 값을 치르셨으므로 살아가며만나는 힘겨운 일들은 우리가 지난날 저지른 죄의 대가가 아니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게 만든다. 세속주의는 이런 믿음을 줄 수 없다. 덕을 쌓고 선행을 베풀어 구원을 받으라고 주문하는 종교들도 마찬가지다.
네 번째는, 믿는 이들마다 어김없이 죽음을 이기고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교리다. 기쁨과 위안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완결하는 신념이다.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망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이들과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죽으면 무로 돌아가거나 인격이 없는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관념보다 훨씬 큰 진정한 위로가 된다. 부활은 육신을 세상에 버려 둔 채 영혼만 하늘나라로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아름답게 회복한 모습으로 몸을 돌려받게 된다.
...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이런 교리들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세속화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찾기보다 차라리 그분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편이 비극적인 사태와 마주하는 더 좋은 대비책이라고 본다. 오늘날 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구원을 받고 주님 품에 안겼다는 확신이 있는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돌아가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지, 예수님과 성도들이 육신으로 부
활했고 또 그렇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지 물어보면 고개를 가로젓거나 눈만 껌벅거리는 반응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난에 제대로 맞서려면..

루터는 고난에 제대로 맞서려면 ‘거리낌 없는 양심‘을 으뜸이 되는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와 화평하기 위해 인내를 동원하려 해선 안 된다. 시련을 참고 견디려면 이미 그리스도와 화평한 상태여야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차고 넘치도록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깊이신뢰해야 그분처럼 어려움을 견뎌 내는 시늉이라도 시작해 볼 수 있다.
흠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음을 알고 있다면,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가 혹독한 고통과 괴로움을겪는 시간 동안에도 삶 가운데 동행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 곁을 지키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무심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므로 우리의 고난을 그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시는까닭이다(행 9:4; 골 1:24). - P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루터는 인간의 힘으로는 자신의 구원에 터럭만큼의 힘도 보탤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설교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거저 주시는 거룩한 은혜로만 온전한 용납을 얻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는 합법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이해하고 단단히 붙잡는다는 것은 곧 사회나 가족, 남들은 물론이고 스스로에게까지 자기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숙명에 대한 불안감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을 더없이 자유롭게 하는 사상이다. 십자가 덕분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한편이 되며 부활의 결과로 마침내 모든 문제가 회복될 것을 알기에 고난에 맞설 수 있다.

고난은 ‘내 삶을 다스리고 구원할 힘과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망상을 몰아내 준다. 인간은 ˝역경을 지나면서 텅 빈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은혜로 채울 여지가 생긴다.
루터는 말한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것도 빚어내실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로지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주시고, 병든 이들만 치료하시며, 눈먼 이들만 보게 하시고, 죽은 이들에게만 삶을 되돌려주신다. 죄인들만 거룩하게 하시며, 어리석은 이들만 슬기롭게 하신다. 한마디로, 그분은 가엾은 이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들리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사랑이 고통을 이기게 한다.


페리는 말한다. "전반적으로는 사랑을 집착으로 보고 강하게 비판해 왔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상이 신인 경우에는 그 감정을 애써 몰아내지 않았다." 풀이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속한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가짐이 불필요한 고통과 슬픔에 이르게 한다는 이방 작가들의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물질을 덜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가르쳤다. 더없이 큰 사랑, 목숨과도 바꿀 만큼 사랑을 쏟는 대상이 하나님일 때에만 무슨 일이 닥치든 고통 속에서 침몰하지 않을 수 있다. 큰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사랑과 소망을 품고 스스로 정련되며 새 힘을 낼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사랑과 소망에 기대 성숙하게 슬픔을 처리해내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서 위로를 얻는다. - P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동이 저주가 아니듯 쉼도 죄악이 아니다.


피퍼는이렇게 적었다.

여가는 찬양하는 심령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여가는 긍정을 먹고 산다. 단순히 활동을 멈추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연인들의 대화에 문득 끼어든 침묵과 같다. 인체감에서 비롯된 정적이다. … 성경에 적혀 있듯,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쉬실 때, 하나님의 눈에비친 세상은 보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창 1:31).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여가 역시 찬양, 지지, 내면의 눈으로 창조의 실체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시선들을 모두 포함한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