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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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 목소리라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적 사고 같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에게 휩쓸리지 않고 제 처지를 파악해서 그를 성장시킬 욕망과 기호를 구축하는 자유는 삶의 여러 순간에 유용하니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적합한 표현으로(Proper Expression) 전달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성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성은 공평하지 못하다. 누구나 삶에서 늘 최선의 수를 두고 고군부투하고 욕망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건 이래서 좋아요. 그건 싫습니다. 더 원해요. 이제 바꿉시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타인이 오해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만한 표현으로 문해력과 문장력, 나아가 매체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너무 가난했거나, 배우지 못해서, 목소리가 작아서. 그래서 지성은 곧잘 권력이 된다.

바로 그 권력을 갖지 못한 집단 중 하나가 20세기 여성들이다. 20세기의 여성들은 제대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과거를 치를 권리, 조정에 진출할 권리, 투표를 할 권리, 제단에서 설교를 할 권리. 권리가 생겨도 어색해 했다. “오빠가 대학에 가야 하니 너는 일찍 시집이나 가라”. 배우고 말하는 방법 대신, 더 큰 목소리를 가진 남성에게 선택 받는 법에 길들여진 여성들에게, 역사의 불공평한 기록에 항의하고 수정을 제안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옅어지는 희망이 있더라도 높은 확률로 대물림될되었을 것이다.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이 빛나는 이유는 바로 ‘그 목소리를’ 전달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20세기라는 혼란한 시대의 무자비한 굴곡을 동일하게 겪었음에도, 투박하고 고집스러운 노인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부터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작가로 대접받는다. ‘매일 더 나아지는 섹스의 미덕’을 말하는 세련된 위트를 가졌으며, 자신을 사랑한다며 자살한 ‘남성 예술가의 폭력성’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고발할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여성들의 입에서 들어보지 못한 21세기의 무엇과 가까운 발언은 멋스럽고 신선하고 강하다.

그런데 나는 독자로서 시선의 반짝이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시선처럼 세련되지 못했던 20세기의 수많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그림자를 만났다. 시선처럼 살아 남지 못해 자신의 문장을 남기지 못한 그들이 살아남았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한편으로는 그들보다 더 배운 내가 때로 ‘그 시절 그들은 그저 순종적이었다’거나, ‘너무 무지했다고’ 쉽게 오해했던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들도 다만 모두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끝에서, 혹독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을 위해 노력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매체를 갖지 못했을 뿐이라고.

시선이 이번 생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림만 잘 그려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시선이 학대와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고 그것을 발휘할 ‘매체’를 사수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소품 취급하던 남성 작가 마티어스의 유화 나이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텨 예술 학위를 따냈고, 힘든 시기 속에서도 만난 여러 네트워크를 활용해 한국 예술계로 데뷔하기도 했다. 남편인 요제프 리가 혼자 독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정도로 ‘시선은 사랑과 자신의 언어 중에서 언어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여성에게 목소리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는데, 갖기도 어려운 것이었던 것이다.

심시선이 아닌 20세기 여성들을 떠올리며, 극중에서 화수의 어느 대사를 떠올려 보았다.

“할머니도 PTSD에 시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중략)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p.111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화수의 대사

나는 이 문장이, 시선 처럼 세련된 글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역시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20세기 여성들에게 전하는 21세기의 격려처럼 읽혔다. ‘당신들이 쓰지 못한 이야기 속의 학대와 불균형, 소외와 기회의 불공평함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고. 구구절절 쓰지 않아도. 기억을 메우지 못하신다 해도.

“언니, 할머니를 원망하면 안 돼.”

“원망하지 않아.”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p.182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화수와 지수의 대사

나도 어른이지.

나도 어른이지."

"언제까지고 딸, 손녀, 보호의 대상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어른으로 살 수 있지? 이미 어른이지만 제대로 된 어른으로? 하루 종일 잠으로 시간을 보내서는 어려울 것이다.”

p.182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화수의 대사

전쟁터를 지나, 굶주림과 환난을 지나, 국경을 넘어.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해낸 가장 멋진 일은 말할 권리를, 쓸 수 있는 언어를 배울 기회를 물려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심시선의 외연은 아닐지라도, 억척스럽고 느리며 찌든 모습일지라도, 덕분에 우리는 전보다 더 들리는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매체에 자리가 없으면 달라고 할 줄도 알게 되었다. 소설 속 ‘가짜 희망’이라도 되어 보겠다며 있는 힘껏 회사를 지키는 경아처럼, 여자가 아니라 컨셉 아티스트로 평가받을 우윤이처럼, 이대로 라면 '새'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잘 들리는 목소리와 매체를 점유할 해림이처럼.

<시선으로부터>가 보여주는 어느 여성 예술가의 성공과 부, 그리고 그의 일가가 해낸 어느 환상 제사가 반가운 것은 그래서다.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삶에 대한 경의를 나누는 즐거움이 있어서다. 그들은 이제 없다. 그들이 남긴 글만이, 그들의 실제 삶과는 무관하게 남거나 상상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리는 마음 속에서 가족들은 각자의 성장과 행복을 찾아 훌라 춤을 추고, 무지개를 찍고, 커피를 구한다. 누구 하나 비슷하지 않지만, 누구 하나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제사였다.

그래서 이 책이 보여준 하와이의 어느 제사는, 우리 공동체의 아직 닿지 못한 세계로운 단맛 나는 상상이다. 우리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고 있찌 않을까? 물론 그것은 여자만 하는 일은 아니다. 온화하고 투명한 태도로 단 맛을 나눌 줄 아는 태호와, 잘못을 사유하고 변화에 도전할 줄 아는 규림처럼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여정은 우윤이 서핑을 배우는 것만큼 느리고 위태로운 질감으로 나아가겠지만 분명한 계단의 형태로 좋아졌으면 한다. 여자 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지나간 여성의 서사가 부재한 시절에, 드물게 삶을 딛고 일어선 여성을 희망 삼아 더 나은 공동체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소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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