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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심하지만 뇌는 비웃는다
데이비드 디살보 지음, 이은진 옮김 / 모멘텀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내용은 굉장히 좋습니다. 인지과학의 새로운 결과들을 풍성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각 장의 제목입니다. 장 제목이 그 장의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장 제목만 보아도 그 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문단 제목과 문단의 내용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지과학 분야의 전문적인 용어들과 새로운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들이 많은데, 너무 가벼운 분위기의 제목을 붙여 놓다 보니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습니다. 안철수에게 싸이의 옷을 입힌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두 번째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내용 중간 중간에 삽입해 둔 글상자(다양한 연구 결과에 대한 설명)가 독서의 흐름을 끊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상자 안의 내용을 무시하고 내용을 읽으려 해도, 전체적인 흐름상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내용이 담겨져 있을 때가 있어 참 곤란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굳이 거기에 넣지 않았어도 될만한 주변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흐름과 관련이 있다면 아예 본문 가운데 녹여 넣었으면 좋았을텐데, 왜 그런 방식의 구성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글의 전체적인 흐름도 매끄럽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저자의 첫번째 저술이라는 점이 그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의 기질이 다혈질이라고 한다면 조금 이해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악평부터 늘어 놓는 이유는, 잘못된 구성 때문에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내용을 배우게 되어 굉장히 고마우면서도, 지루하고 재미없는 강의 방식 때문에 욕이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면 적절한 설명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건 개.별.적.인. 내용은 굉장히 좋습니다. 우리가 뇌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해 오던 것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사실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이나 논리적인 맥락을 파악해 가며 읽으려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욕 나옵니다. 이 책을 지혜롭게 읽는 방법은 소제목들을 다 무시하고 옆에 노트를 두고 새롭게 깨달은 내용들만 따로 정리해서 옮겨 가며 읽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뇌가 굉장히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뇌는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하기 때문에 왠만하면 자기 주인을 생각없이 움직이게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면 조금 이상하더라도 그냥 넘어가고, 또래 집단이 이야기하면 생각없이 동의해 버리고, 평소에 습관적으로 해 오던 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뇌는 불편한 것을 싫어한다, 뇌는 안정성과 일관성을 원한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게으른 뇌에 대해 지나친 기대나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뇌가 얼마나 게으른지, 나태한지, 멍청한지를 알고 그 뇌를 부지런히 똑똑하게 움직이게 하기 위해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 낸 그러한 방법들을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가치있게 느껴졌던 부분은 바로 부록에 소개되어 있는 인지과학에 관련된 좋은 도서들의 목록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나 '설득의 심리학'처럼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책들은 물론이고,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책들까지 다양한 책들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뇌가 더 게을러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 번 읽는 것으로 맥이 잡히지 않는 책을 만나면 굉장히 짜증이 납니다. 좋은 내용이고 뭐고 읽기가 싫어집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은 다른 좋은 책들을 소개해 주는 것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충분히 상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래 저래 건질 것은 많은 책입니다. 국물은 버리고 건더기만 잘 건져내어 물에 깨끗이 씻어 먹는다면 체력 보강에 많은 도움이 될 만 한 음식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