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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 한국 사회와 교회에 돌직구를 던진 <나는 꼼수다> 심층 분석
최규창 지음 / 강같은평화 / 2012년 7월
평점 :
저자가 저명한 신학자도 아니고 잘 알려져 있는 작가도 아니었지만, 한국 기독교 지성의 산실이라 일컬어지는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훈련받았고, 지금까지 활동해 왔다는 사실 때문에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저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모든 해석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보여 준 통찰력과 인문학적 깊이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저자는 마가복음 5:1-20에 기록되어 있는 거라사의 광인에 관한 해석으로부터 자신의 논리를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저자는 거라사의 광인이 그 마을 사람들에게 희생양과 같은 존재였다고 주장합니다. 헤롯과 로마로부터 받고 있는 억압에 대한 분노를 그 광인을 통해 대신 분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같은 정상인이 로마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거나 욕을 하면 큰 일을 당하지만, 그 광인이 그런 일을 하면 아무런 해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모습을 보는 자기들은 대리만족(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으로 그 광인이 광기에서 벗어나자 마을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분노를 해결할 통로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이후에 전개되는 나꼼수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저자가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광인이 어떻게 해서 광인이 되었을까에 대한 설명입니다. 폭력과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 폭력과 억압에 대한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분노를 또 다른 폭력과 억압으로 바꾸어 희생양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 광인이 미쳐 버렸던 것은 아마도 마을 사람들의 폭력과 억압을 견디지 못해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귀신은 분노를 틈 타 사람에게 깃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광인을 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당황했던 이유는 그 광인을 만든 것이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광인이 정상으로 돌아온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요? 광인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가면 나꼼수를 광인에 빗대는 것이 조금 어색해 집니다. 그래서 저자가 이 부분을 강조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거라사 광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어서 굶어 죽지 않게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적어 보입니다. 광인이라도 배가 고프면 뭐라도 잡아 먹거나 훔쳐 먹었을 것이고, 가끔씩 제정신이 돌아오면 구걸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폭력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분출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옳은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꼼수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나꼼수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과연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비폭력적 저항의 범주에 들어가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들도 폭력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나꼼수가 구사하는 욕설에 대해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말씀하셨던 것도 당시로서는 굉장한 욕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자의 주장에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나꼼수가 정치권의 꼼수와 비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일들은 원래는 교회가 감당했어야 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꼼수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꼼수가 지금까지 감당해 온 역할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빗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던 헤롯을 비판했던 세례 요한의 모습과 나꼼수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유사성에 대해 별로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조금 아쉽게 느껴졌던 부분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저자가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한국 교회는 사회 비판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오히려 폭력과 억압의 당사자들과 같은 편에 서 있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꼼수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난으로 맞설 것이 아니라, 거라사의 광인을 품어 주었던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꼼수를 품어 주고, 그들이 광기를 버리고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폭력과 억압의 구조를 해소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폭력과 억압에 대해 비폭력으로 맞서야 할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 역시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특히 비폭력 저항의 효율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역사적 통계를 보면서 비폭력 저항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꼼수에 대한 기독교계의 비판적인 시각만을 접하다가 나꼼수의 긍정적인 역할을 칭찬하는 시각을 접하고 보니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을 뿐 아니라, 저자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저자의 지적과 같이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폭력과 억압을 해소하고, 더불어 그로 인해 일어난 분노와 광기를 잠재워 정상적인 사회로 거듭나게 하는데 있어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