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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의 바울 - 내러티브 관점에서 본 바울 신학
톰 라이트 지음, 순돈호 옮김 / 죠이선교회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들어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신학자와 신학분야를 말하라면 당연히 톰 라이트, 그리고 '새 관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저서 중 한 권인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를 읽어 보았습니다. 솔직히 '이신칭의'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면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언약'이라던가 '삼위일체'에 대한 저자의 집요하기까지 한 강조를 보면서 오히려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개혁주의적인 신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개혁주의를 말하는데 있어 '이신칭의 교리'를 제외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교리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하는 저자에 대해 비난이 없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톰 라이트의 바울'이라는 책은 앞서 언급한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와 비슷한 맥락에 서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톰 라이트의 바울'을 읽으면서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를 읽을 때보다 많이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번 읽어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아 같은 문장을 두 세 차례 반복해서 읽어야 했습니다.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를 먼저 읽어 보지 않았더라면 더 많이 어렵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리 읽어 둔 내용과 반복되는 내용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흐름을 쫓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저자의 탓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저의 신학적 소양이 무척이나 낮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최근에 불거진 '칭의논쟁'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신학에 관해 말하면서 '칭의' 부분을 다루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칭의' 문제를 뛰어 넘는 더 큰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바울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바울 신학을 바라보는 데 사용되었던 관점들에 대해, 특히 '대체신학'이 가지고 있는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바울 신학을 바라보는 데 있어 '신선한 관점'을 가져 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대체신학'은 '이제는 유대인이 아닌 교회가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입니다. 유대인의 실패와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교회를, 연속성보다는 단절과 대체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시각을 잘못된 것이라 주장합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동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기 민족에 대해 보이고 있는 애정이나 자부심을 보면 저자의 주장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는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신앙과 선택신앙, 종말론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계승하였으되, 단지 그것을 재정의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으로 언약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어왔던 신앙관을 재해석하고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믿어왔던 유일신앙을 삼위일체신앙으로 재정의하였고, 할례를 받은 이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재정의하였으며,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종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이미 성취되었으며 또한 성령에 의해 지속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재정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종말론에 대한 부분은 제 이해가 짧아 설명이 부족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이신칭의에 대한 논의도 살짝 짚고 넘어가고 있는데, 저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는 구절에 포함된 '믿음'이 사람 편에서의 믿음이나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신실함', 곧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배워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저에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강조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또한 이 점을 생각할 때 왜 저자가 '펠라기우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이 정말 올바른 해석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원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점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평을 하자면 지금까지 읽어 왔던 저자의 저서들, 특히 목회적인 관점에서 쓴 책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어렵게 느껴졌고, 좀 더 쉬운 말로 설명해 줄 수는 없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이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시리즈의 네 번째 책에 대한 맛보기와 같은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네 번째 책의 내용은 얼마나 더 어려운 내용이 될까 라는 염려가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바울서신을 바라보는 데 어떤 관점과 시각이 필요한가에 관해 제대로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씹어 먹기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몸에는 좋은 단단한 음식(히5:12,14)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신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가장 논리적이면서 가장 타당한 관점(또는 시각)이 무엇인지 찾고 있는 목회자(또는 신학생)라면 필히 읽어 보아야 할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