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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교회되게 - 래리 크랩의
래리 크랩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처음에는 읽으면서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용 전개가 매끄럽지도 않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감도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윤종석님의 번역이 예전만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번역에 문제가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반부에 이르러서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래리 크랩이 원래부터 글솜씨가 별로 신통치 않은 저자라는 사실을요. 래리 크랩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에서 기독교 상담학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거의 20년 전에 래리 크랩의 책을 읽을 때에만 해도 대학 교재라서(학문적인 책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영적 가면을 벗어라(나침반 출간/복있는 사람에서 개정증보출간)'라는 책을 읽었을 때에도 왠지 글전개가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때에도 번역의 문제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 와 생각 하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로부터 서평을 시작하는 이유는, 저자의 글솜씨에 대해 '별로'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 책을 읽어 나가야 이 책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저자의 글솜씨와는 달리 글의 내용 만큼은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자는 오늘날 복음주의권 기독교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상담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담학을 먼저 공부한 다음,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고, 암투병을 하시면서 깊어진 '삶에 대한 성찰'로 인해 많은 영향력과 감화를 끼치고 계신 분입니다. 이제 연세가 60세가 넘으셨는데, 도대체 이 분이 교회다운 교회라고 생각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하는 궁금증으로 인해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앞부분을 읽는 동안에는 내용 이해가 쉽지 않아 많이 답답했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중간 이상 읽고 나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감이 잡히더군요. 물론 한 문장 한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었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윤곽을 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이 답답함의 이유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60세가 넘은 어르신이 '나는 이런 교회는 싫다. 나는 이런 교회도 싫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시는 게 왠지 푸념같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 연세가 되도록 '자가발전'이 안 되서 교회에 의존해서 신앙 생활을 하려는가"라는 생각에 저자의 푸념이 영 마땅치 않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로서는 20대 후반에 이미 그런 고민을 끝내고 "내가 원하는 교회는 나와 상관이 없는 교회다"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로서 자기 맘대로 교회를 선택할 수 없는 좁은 입지 때문에 그런 결정을 그렇게 일찍, 그리고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나서 "이제는 나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연세 지긋한 분이 이제까지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공감이 잘 안 되었던 것 가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저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아 중독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자아 중독자이며, 사실은 하나님께 중독되고 싶은 사람인데, 스스로 그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중독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회를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었는데, 그 고백이 얼마나 제 가슴을 먹먹하게 하던지요. 저 역시 지금까지 그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를 간절히 기대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개척한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이분이 나와 동일한 소원을 가지고 씨름하고 계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저자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가슴에서 솟아 올랐습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이 저자의 그러한 소원이 저자의 삶에서 여태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저자가 우리 교회에 오더라도 만족하기는 쉽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기대치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저희 공동체의 부족함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 인용해 놓은 클레어보의 베르나르가 말한 사랑의 네 가지 차원은 저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네 가지 차원은 '첫째로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는 차원, 둘째로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 셋째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 넷째로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사랑하는 차원'이었습니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바로 네 번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저자는 성도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교회는 '영적 진리를 진지하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교회'요, '영성 계발을 중요하게 여기고 도와주는 교회'요, '공동체의 중요성을 이해하기에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교회'이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 가지 조건에 기초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제가 생각하고 있던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따라서 저에게는 많은 격려와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더라도 이미 형성된 교회관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목회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이 교회관을 돌아보고, "어떤 교회가 진정으로 성도들을 위하는 교회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역시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제대로 채워줄 수 있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깨닫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소망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중독된 자'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수준'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더욱 더 많이 늘어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