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8년은 소설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아담 포드의 출생연도입니다. 왜 이 사람의 출생연도가 중요한가 하면,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새로운 단계의 진화가 이루어졌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으로 인해 3차 대전의 진행과 더불어 건립된 공화국의 경직된 체계가 무너지게 되었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2058 제너시스(창세기)가 된 것입니다. 원제에는 2058이라는 년도수 없이 그저 제너시스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편집자가 성경의 창세기와 혼동되는 것을 막기 이 숫자를 제목 앞에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2058년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담 포드가 아트와 만났던 2076년이 더 중요한 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담 포드와 아트의 만남으로 인해 아트에게 인간의 관념이 스며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변화가 가장 확연하게 나타난 것이 2077년이었기에 어쩌면 그 해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연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우기 아담 포드가 죽은 해가 그 해였으니 말입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기가막힌 반전을 접하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책을 읽어 가다 보니 저자가 반전에 앞서 얼마나 많은 복선과 힌트를 깔아 놓았는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주인공 아낙시맨더가 아담 포드의 감정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저의 감정에는'이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아담 포드와 아트의 탈출이 아트 스스로의 결정이었으리라는 아낙시맨더의 말에 시험관들이 보였던 미소에 숨겨진 사악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말을 읽어 보기 전에는 도저히 그것이 복선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많은 복선을 보면서도 눈 뜬 장님처럼 결말에 이르기까지 아무 의심도 없이 원래의 흐름을 좇아갈 수 밖에 없도록 치밀하게 구성된 스토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담 포드와 아트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은 조금 좇아가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처음 접해 보는 이론들과 개념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가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마치 암초에 부딪친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대충 넘어가더라도 그렇게 큰 문제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담 포드와 아트의 대화 속에서 아트에게 마치 감정이 생긴 것 같은 반응이 나타나는 시점인데 그 부분은 결코 가볍게 지나쳐서는 곤란합니다. 그 사소한 차이가 아트의 변화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 포드가 처음에 아트에게 보여 주었던 반감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러한 행동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던 점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어쩌면 아트라는 존재가 아담 포드가 답답해 하는 공화국 체제를 대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쨋거나 저자가 진화의 개념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정신적인(관념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신선한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설을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새로운 단계의 진화에 관해 설명해 내는 솜씨도 상당히 탁월하게 느껴집니다. 단지 역자가 가끔씩 사용한 '순수한 우리말'이 이야기의 몰입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몸피'라던가, '오라기가 들어'라는 등의 생소한 단어를 왜 번역에까지 사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수한 자신의 창작물이라면 몰라도, 번역서는 원저의 내용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에 못지 않은 반전이 돋보이는 스토리이지만 영화로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주인공을 소설에 묘사된 모습과 다르게 묘사하지 않는 이상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영화화해 볼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없이 읽으면서 시간을 죽이는 용도로 읽기에는 아까운 책입니다. 한 번만 읽어 가지고는 저자의 치밀한 구성에 숨겨진 복선을 절반조차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충격적인 반전을 접하는 순간, 다시 처음부터 읽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