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침묵 -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이선영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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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과장이려니 했다. 1억원이라는 고료를 지불해야 했던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이기에 그렇게라도 해서 본전이라도 건지려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 책을 띄우려 하는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도 이 작품은 띠지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우주적 상상력이나, 댄 브라운의 방대한 스케일을 넘보는 그런 종류의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은 전혀 우주적인 상상력이나 방대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 조금도 밀리지 않을 정도 수준의 작품이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단지 그들의 작품과 분위기가 달랐을 뿐. 이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찾자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정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소설을 손에서 놓아왔던 만큼 기대감을 가질 법도 하지만, 그동안 한국인에 의해 쓰여진 이런 류의 작품에서 느껴온 실망감 때문에 그렇게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 게다가 작가의 첫 장편이라니. 그런 몇가지 이유들로 인해 기대감을 반쯤은 접고서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탁월한 내용 전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문장의 전개에 아무런 걸리적 거림이 없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미련맞게도 마음 속으로 소리를 내어 읽어가야만 하기에, 문장의 전개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어색함도 마뜩잖아 했던 나인데도, 그런 거슬리는 부분을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용의 치밀함은 더욱 완벽했다. 과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더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학원에 입학했을 뿐 아니라, 수 년 동안 이 작품 하나를 위해 준비하며 씨름해 온 결과물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작품 속에서 현자가 이루어낸 학파라는 세계는 오늘날 지성의 산실이라 불리우는 대학이라는 세계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현자의 모습은 제자들의 발견을 자신의 발견인양 발표하는 대학교수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고, 학파의 불문율을 깨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상징적인 죽음은 대학교수들의 비리를 폭로한 학생들이 더이상 그 세계에 발붙일 수 없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현자의 모습 속에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탐하여 온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또한 그의 자리를 넘보았던 제자 히파소스의 모습 속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서까지 권력을 손에 쥐고자 했던 현자였지만, 그러나 그에게도 순수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나이들어 가면서 그와 같이 변질되어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그럼에도 작가는 현자에 의해 살해당한 제자 디오도로스의 동생 아리스톤을 그 수렁과 같은 탐욕의 굴레 밖으로 밀어내 주었다. 그와 같은 존재가 있어야만 진실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독자가 생각했던 간결한 결말과는 완전히 다른, 허를 찌르는 듯한 의외의 결말은 언제나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참주 킬론이 과연 자기 아들의 아기를 가지고 자신을 이용해 보려는 코레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것이 내내 궁금했다. 모든 계획이 마무리 된 후 단순하게 살해해 버리는 데에서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 죽음까지도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참주 킬론의 모습에서 작가의 치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가 그려낸 참주는 작가의 설정에 너무나 충실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현자 못지 않게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을 어찌 그리 탁월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주인공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히파소스가 역사적 기록과는 달리 행복한 결말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작가의 치밀한 반전에 의해 완벽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히파소스가 당연히 역사적 기록에서처럼 비참하게 죽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글을 읽어 갈수록 작가는 끊임없이 그를 살리려고 하는 듯이 보였고, 행복한 결말을 주려는 듯이 보였다. 정말 그렇게 믿고 싶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더니 예상외의 반전으로 그 기대를 배신해 버렸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인해 한편으로는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하지 않은 마무리에 감사했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허를 찌르는 반전의 결말로 인해 이 책은 자신이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글의 전개상 꼭 필요했던 수학에 관한 내용은 읽는 내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대충 무시하고 지나가도 되었을텐데, 완벽주의적인 기질이 그럴 수 없게 했고, 덕분에 단단히 고생을 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가 수학에 관한 내용을 만날 때마다 멈추어 설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 이 책의 단점이라면 단점일까. 하지만 오랜만에 머리 복잡하게 지냈던 청소년기의 수학 시간을 떠올려 볼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이 던져 준 선물이라면 선물일지 모른다.

책을 덮으면서 궁금한 것 몇 가지가 숙제로 남았다. 작가는 왜 현자의 자녀가 셋이었다고 했을까. 책의 내용 중에는 단지 두 명의 자녀만이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는데. 혹시 내가 중간에 놓친 것은 아닐까. 또 왜 작가는 현자의 딸 다모가 아리스톤과 맺어지게 했을까. 다모는 아리스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궁지로 몰아넣었음도 알고 있었을텐데, 과연 무슨 이유로 그에게 접근해 그와 결혼하고 그의 아기를 가졌던 것일까. 그녀가 단지 어머니 테아노의 정염을 그대로 물려 받았기에 과거에 한눈에 반해버린 아리스톤에게 접근했다고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은 결코 이 소설의 구성이나 내용 전개가 제대로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아니다. 그저 사적인 궁금증일 뿐. 

이 책은 내게 있어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오랜만에 읽은 치밀하고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특별한 교훈과 도전과 감동을 목적으로 쓰여진 신앙 도서를 위주로 독서해 오던 나에게 이 책은 오랜만에 인간의 더러운 본성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기회를 주었고, 소설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탐욕스러운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나 역시 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신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귀한 통찰의 기회를 던져준 작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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