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이 이 서점 블로그에 썼던 리스트, 기억하세요?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라는 리스트였죠."

피터 스완슨의 신작이 나왔다.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정말 '핫' 했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읽었을 때 정말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출간되어 있는 다른 책들을 다 읽었는데(여기까지 쓰고 혹시 내가 안 읽은 책이 있나 싶어 서점사 검색해 보았다ㅋ) 피터 스완슨의 책 중 내가 제일 재밌었던 것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과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두 권이다. 근데 오늘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을 추가했다.

먼저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은 중고서점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맬컴이다. 그것도 추미스 장르만 취급하는 중고서점인 거다. 맬컴이 가장 좋아하고 심취했던 추미스 소설.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감추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FBI 직원이 서점에 찾아온다. 저 위 맨 처음에 써 놓은 질문과 함께. 오래전 서점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맬컴은 홍보를 위해 서점 블로그에 글을 썼다. 유명한 파워블로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가장 완벽한 살인이 나오는 여덟 권의 추미스 책을 소개하는 포스트였다. FBI의 말로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 포스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거였고 맬컴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알면 알수록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점점 더 사건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자, 어차피 스포 때문에 더 이상 쓸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점들이 몇 가지 있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일단 배경이 추미스 장르를 취급하는 중고서점이라는 점이 내 취향을 건드린다. 그리고 맬컴이라는 인물은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공감되고 정이 간다. 그리고 읽다보면 고전 격의 추미스 소설을 추천받게 된다는 것과 데니스 루헤인, 제임스 미치너, 애거서 크리스티, 존 르카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등 아는 작가들이 언급되는 점도 재밌었다. 성격적으로 조금 단조롭고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재능이 없는, 의뭉스럽긴 해도 선한 사람으로 느껴져서 어쩐지 굉장히 직업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재밌었다. 그러나 역시 누구나 비밀은 있고, 우리는 누구도 타인을 완벽히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작가의 위트 있는 문장 때문에 피식피식 거리게 된다.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언급한 것처럼 재미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캐릭터인데 아무래도 작가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래의 문장 같은 것들이다.

/ 누군가 내 리스트를 읽고 그 방법을 따라 하기로 했다는 겁니까? 그것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면서요? │p.33 (죽여마땅한 사람들ㅋㅋㅋ)

/ 나는 부엌을 둘러봤다가 타일이 깔린 아일랜드 식탁에 뚜껑이 열린 땅콩버터가 있고, 그 안에 나이프가 꽂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레인 존슨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고독사가 고소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p.146 (땅콩버터 ->고소 ㅋㅋㅋ)

/ 나는 후세에 영원히 남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순수문학 작가들이 늘 못마땅했다. 차라리 스릴러소설을 쓰는 작가들과 시인이 더 좋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질 게 뻔한 싸움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p.169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듯ㅋㅋㅋ)

나만 웃기냐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덟 건의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엄청 자극적인 소설은 아니다. 추미스이기는 하지만 그냥 재밌는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여러 건의 살인사건이 나오지만 사건이나 잔혹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특별히 피해자가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맬컴의 알 수 없는 생각들과 맬컴에게 있어 의미 있는 인물의 사건, 그 추적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후반에서야 진실을 알게 되는데 그마저도 어쩐지 맬컴스러워서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그게 또 좋았다. 그동안의 피터 스완슨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해서 인상적이었다. '죽어 마땅한' 코드는 익숙하지만 어쩐지 책을 좋아하는 맬컴에게 정이 간다. 기억에, 별로 미운 사람이 없는 책이다. 아, 한 놈 있다. 선생 놈.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https://www.instagram.com/morning.bookstore


사실 나는 이미 천직을 찾은 상태였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랬다. 나는 책을 파는 사람이었고, 하루에도 손님들과 수백 번씩 짧은 대화를 나누는 일상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독서를 제일 사랑했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천직이었다.
- P22

책은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독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책은 그 책을 쓴 시절로 우리를 데려갈 뿐 아니라 그 책을 읽던 내게로 데려간다.
- P48

당신을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다면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있는 셈이잖아.
- P94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결코 완전한 진실을 얻을 수 없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나 말을 나누기 전에도 이미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은 옷은 몸의 진실을 가리지만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준다. 옷은 직조이자 날조다.
- P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전까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그렇지 못했다.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알겠다. 그건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은 불안 속으로, 자청해서 걸어들어가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p.325 작가의 말

서점사의 신간 리스트를 훑다가 눈에 들어와 바로 구매한 책이다. 레이디 맥도날드라고 하면 잘 몰라도 '맥도날드 할머니'라고 하면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텐데, 나 역시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유튜브에서 영상을 다시 보기도 했다. 이 책은 그 '맥도날드 할머니'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방송에서 할머니와 나눈 내용들이 책 전반에 걸쳐 그대로 들어 있고 대신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그런 인생을 살게 됐는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까 와 같은 할머니의 내면은 작가의 시선으로 채워졌다.

마이 시크릿.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노코멘트.

아마 방송을 본 사람이라면 알 텐데, 완벽한 트렌치코트 핏과 박식함, 유창한 영어 실력, 종이 가방에 가득 들어있는 영자신문, 호텔 레스토랑이 너무 익숙한 듯한 모습. 그녀의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면 '맥도날드 할머니'보다는 '레이디 맥도날드'가 확실히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더 살펴보면 몸 하나 뉠 곳 없이 스타벅스, 맥도날드, 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꾸벅꾸벅 앉아 조는 영락없는 노숙자인 것도 맞다. 한국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외무성에서 일했고 결혼은 한 적 없다. 그 시절 여성에게는 눈치는 좀 받았을지 몰라도 더없이 화려한 삶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듯 누렸던 삶이 퇴직으로 끝나버렸다. 이후 맞닥뜨린 노년의 새로운 삶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절을 배회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번에 방송을 찾아보면서 밑에 달린 지저분한 댓글을 보고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레이디의 인생을 보고 누군가는 허영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자존심이라고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몰라도 너무 지저분한 댓글이 많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단정 지을 수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앞으로 레이디 맥도날드 같은 사람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서 아주 먼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걸 알았을 때 아마 작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서 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화려했던 시절처럼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몸에 밴 태도와 삶의 방식을 버릴 수 없었던, 아니 버리고 싶지 않았던게 맞는 것 같다 많이 배웠고 일했고 그 시절 많은 여성들이 선택해야만 했던 길을 가지 않은 채 늙어간 여성, 노숙인이면서도 노숙자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사람.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왠지 모를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또 작가는 누군가의 불행, 숨겨진 사연을 캐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방송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시청률을 챙기는 방송가의 행태들 말이다. 뒤표지에는 실제 방송 PD가 당시 생각했던 것들이 이 책에 다 담겨 있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제 할머니는 세상에 없다. 작가는 자신의 미래가 맥도날드 할머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하는 것,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별거 아닌 사소한 부탁도 절대 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도 하면서 책을 덮고도 정리할 마음이 많았다. 책 속 김윤자가 민수경에게 건넨 블루베리 케이크는 내가 아는 가장 쓸쓸한 블루베리 케이크였다.


아침서가 @morning.bookstore

https://www.instagram.com/morning.bookstore



미스 김이 왜 결혼을 못 했는지 나는 이제야 알겠어. 장가를 갔으면 바로 갔을 텐데, 시집을 가야 해서 결혼을 못 한 거지. 안 그래?
- P89

불행 포르노라고 아시나요? 불행 포르노란 남의 불행한 일상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하면서 그와 동시에 은밀한 기쁨을 느끼게 만들어진 선정적인 콘텐츠를 일컫는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 P145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트렌치코트를 벗고, 안에 입은 셔츠를 다시 매만진다. 분홍색이다. 엷은 분홍색의 빳빳한 셔츠.
- P155

김윤자는 그런 걸 따지는 생활방식이 지금의 자신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자신을 바꾸려고 한 적이 없었고,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었다.
- P196

레이디는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걸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남이 자기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 또한 견디지 못한다.
- P214

무엇보다 자기들처럼 살지 않는 레이디의 방식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잘 참아내지 못하니까. 신중호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레이디가 여태까지 몰랐던 걸 계속 모르더라도 문제없었다. 레이디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말이다. 그는 레이디가 살아온 칠십몇 년간의 방식을 부정해버렸다. (...) 그건 열등감 때문이었다. 레이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잘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껴서였다.
- P300

자신의 곤궁을 알아달라며 투정을 부리는 인간만은 되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바닥을 보이지 말자고 생각해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 P3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길을 잃는 것을 싫어하니?

그 질문의 울림은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아 있다. │p.304

지리산의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저자가 교사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삶의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덴마크의 세계 시민학교로 떠나 다시 배움을 얻는 과정이 수기로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겼다. 세계 각지에서 온 어린 학생들, 선생님들과 함께 공동의 일상을 보내면서 나누고 배우고 또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생활한다. 40의 나이로 한참 어린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에 힘이 부칠 때, 또 자유롭지 못한 언어능력 때문에 '느린 학생'이 되어 힘들기도 했지만 그 역시 교사로서의 저자에게는 훌륭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그러니까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덴마크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여행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리프레쉬 되는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에 온 학생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만큼 그들이 논의하고 배워가는 주제들은 그야말로 세계적이고 현실적이다. 아무리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 사람에게 듣는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이점인가. 또 전혀 관심이 없어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는 과정이 참 좋아 보였다. 특히 일본 정부가 많은 역사적 사실을 교과 과정에서 숨기면서 전혀 배운 적이 없어 무지했던 일본 학생들과 위안부 문제를 나누고 이해시키는 과정은 읽는 동안 참 벅찼다. 정말 일본 정부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그 심각성이 절실히 와닿았다. 실제로 저자는 매 학기마다 새로 들어온 일본 학생들과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들은 잘못 알아서 미안해하고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했다. 내가 그 학교에 갔다면 하고 생각해 봤다. 내가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내 무지함이 너무도 아찔했다.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이 모인 만큼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인식에 대해 공부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조혼과 할례 등으로 잘 알려진 나라에서 온 친구는 초반에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자국의 여성인권을 높게 평가했지만 수업이 끝날 때쯤엔 생각이 바뀌는 부분 말이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문화였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생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들의 문화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서 생각이 많았는데, 이런 어려움도 모두 모여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놀랍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민주주의와 복지에 관한 교육관은 또 어떻고. 아, 내가 한 공부는 다 뭐지.

어릴 때 나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남은 게 별로 없는 느낌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과목(수학)이 확정되고 나서부터는 그랬다. 하지만 배움 자체는 좋아해서 지금도 책을 읽을 때 벅찰 때가 있다. 나는 주로 문학을 읽으며 아름다운 문장을 탐미하는 사람이지만, 어려워도 꾸준히, 모자란 역사나 인문사회 책을 읽으며 조금씩이나마 알아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이 책은 나에게 벅찬 마음을 느끼게 해 준 배움과 나눔의 이야기지만 여행을 다녀온 기분도 들어서 어쩐지 설레고 기분이 환기되기도 했다.



아침서가 @morning.bookstore

https://www.instagram.com/morning.bookstore


고백하자면 그 시절 나는 학생이 부러웠다. 그들은 내가 받아 보지 못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다. 학생들을 부러워하는 교사가 학생들 앞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중학생이 교사에게 분노를 발산할 때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나도 억울하다고!‘라고 속으로 외치는 사람이 교사를 해도 될까.
- P9

나의 배움은 이들의 일상을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며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도 역시 인간이라 때로는 얼굴이 굳어지고, 감정 기복이 드러나고, 걸음걸이에서 허무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불완전한 한 사람을 매일 밥 먹으면서 옆에서 볼 수 있다.
- P111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 한화로 2만원이 넘는 최저 임금, 주당 33시간 근무, 평균 55퍼센트에 달하는 높은 세율, 촘촘하게 짜여 있는 사회 안전망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함께 노르딕 여행을 떠나게 된 두 덴마크인 선생님들은 각종 복지 제도의 혜택과 그 바탕인 조세 제도에 대해서 덴마크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라 살림을 운영하는 정부를 신뢰하며 보호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 P224

민주주의와 복지 제도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교육하는 일이 중요해. 우리가 신경 써서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거든. 요즘 자라나는 덴마크 아이들은 복지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하고 싸워 왔다는 걸 교육해야만 해.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지. 그 옛날 농부들이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했다면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이, 여성들이 나섰고, 지금은 이민자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어.
- P230

이제는 나의 제자들이 부럽지 않았다.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먼 나라에 와서 열여덟 살 친구들 사이에서도 특히 말이 서투른 학생이 되어 보살핌을 받아보니, 내가 받아 보지도 못 했던 것을 제자들에게 주려고 아등바등했던 나 자신이 더는 처량하지 않았다.
- P258

호이스콜레의 교육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삶에 걸친 계몽, 대중 교육, 민주주의 소양 교육, 덴마크가 19세기에 호이스콜레를 만들고 지금까지 세금을 투입해 학교를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국민이 무지에서 깨어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넘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성숙함을 요구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끊임없는 재교육만이 민주적 질서로 작동하는 복지 제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게 덴마크 사람들의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저술가, 비평가, 역사가,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의 회고록을 읽어보게 됐다. <멀고도 가까운> 책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이 책이 내가 읽어보는 저자의 첫 책이다. 누구보다도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있는 그녀에게도 한때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억압과 폭력이 일상이었던 시간, 저자의 말마따나 비존재로서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씁쓸하게도 이 책을 그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뭔가 불편했다. 책 내용이 그렇다기 보다는 '페미니즘 책'이라는 것을 볼 때 늘 느끼는 감정이다. 솔직히 나는 어떤 책을 '페미니즘 책'이라고 특정 지어 단정하는 것 부터가 불편한데 누군가의 관심, 또는 주저하면서도 다가가보려고 마음 먹을 누군가의 마음을 차단하는 역효과가 분명 있다고 생각해서다. 아무리 시대나 환경이 달라도 여자로서 살아가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있음에도, 이 책을 읽고 불편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 편하지 못한 거다.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거다. 여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선대의 많은 여성들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반발들은 당연히 불편하지만 변화에 있어 이런 문제들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젠더에 대한 의식이 양 극단을 오가고, 심지어 '젠더 갈라치기'를 이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어떤 것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는 책에 대해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예민하게 생각하며 읽을 수밖에 없다.

현대의 페미니즘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작가의 회고록은 폭력이 가득한 일상에서 그녀가 어떤 일들을 겪었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어떤 요령을 습득했으며 어떻게 책으로 도피했고 또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가로 진행된다. 말 그대로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 지나지 않아 이 책을 다 읽고서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는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해서 과거를 재방문하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쓰고 싶지도 않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니 얼마나 달라졌는지. 페미니즘은 올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야 하고 분란만 조장하는 것인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목소리인지 끊임없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많은 생각과 고민들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옳을 것이다. 회고록은 조금 씁쓸했다.(줄 친 곳은 너무 많지만) 지금의 그녀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 백인이라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후기가 무척 좋았다. 그래서 다른 책이 궁금하다.

사람은 사실 어떤 운명도 타고나지 않는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난다. 약간의 선천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그다음에는 사건들과 만남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좌절되고, 뜨겁게 데고, 격려를 받는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이 말은 한 사람을 저지하려고 들거나 그의 성품과 목적을 바꾸려고 드는 힘들이 있음을 뜻하고, '운명대로 산다' 이 말은 그 힘들이 완벽히 성공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것은 낯선 이가 내게 건넨 멋진 운이었다. 나는 그 운을 받아들였고, 더불어 내 운명은 어떤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금 간 곳을 추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가끔은 수선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 가끔은 가장 귀중한 화물을 담아 나르는 짐꾼 혹은 배가 되는 것이라는 느낌도 함께 받아들였으니, 그 화물이란 말해지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 우리를 자유롭게 할 이야기들이다. │p.302 후기 : 생명선



아침서가

인스타그램 - @morning.bookstore



자칫 폭력은 우리 중 일부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사실로 만들까 봐 걱정되었습니다. 폭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을 받은 여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 P08

정의란 변천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내 시대가 사실로 여기는 가정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 최소한 그것들을 너무 과신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뜻,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것들이 나를 괴롭히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 P138

때로는 명료하기 위해서 복잡성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 더는 줄일 수 없는 표현이 있다고 믿고, 어떤 심상을 일으키거나 환기하는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쭉 뻗은 고속도로 같은 문장보다 고불고불 오솔길 같은 문장이 좋다. 이따금 경치를 감상하려고 둘러 가거나 잠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는 길 같은 문장이 좋다.
- P158

그런 이들이 세운 장애물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출판계는 예나 지금이나 백인들의 세계이므로, 내 성별 때문에 닫힌 문이 있었을지라도 내 인종 덕분에 열린 문도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잘 알겠다.
- P206

성장은 크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마치 우리가 나무인 것처럼, 높이를 키우면 다 되는 것처럼. 하지만 성장이란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읽어냄으로써 차츰 완전해지는 과정일 때가 많다.
- P238

우리는 자신을 해친 무언가를 향해 다가가기도 하고, 그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다른 어떤 것 혹은 사람이 우리를 그것으로 도로 데려간다.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때 디뎠던 계단이 문득 폭포로 바뀐 것 같은 그런 시간의 미끄러짐은 본디 트라우마란 것이, 그리고 트라우마가 느끼는 시간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해서 과거를 재방문할 때도 있다. 닫힌 것이 다시 열린다. 가끔은 우리가 그것을 새로이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수선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다시 열린다.
- P2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을 때 나의 일관된 자세는 '이해하(려 해보)는 것'이다. 만화든 소설이든 논픽션이든 인간으로서 인간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 <관통당한 몸>을 읽으면서는 오로지 '알기 위해' 읽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수 없었으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내려두었다.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책.

'강간'이라는 단어만 오조오억 번은 읽게 되는 이 책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전쟁 무기로의 강간에 대한 책이다. 전쟁을 다루며 전시 강간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닌 책 한 권을 오로지 전시에 일어나는 집단적 강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정말로 처음 접해본다. 읽지 않아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은 하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책. 나 역시 그랬고 읽으면서도 힘들었다. 여자라는 생물학적 공감은 평소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저절로 발휘하게 해서, 또 '강간'이라는 두 글자에 차마 다 담지 못할 잔혹성 때문이다. 특히 콩고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만 읽고 싶어졌다.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활동한 저자가 르완다부터 베를린까지 위안부부터 IS의 성 노예까지 전시 강간의 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았다. 목숨을 내놓고 힘겹게 내어놓은 목소리가 무색하게 전시 강간의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어이가 없다. 단순히 한 인간을 부서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 가족, 공동체, 나라를 해체하는 것임에도 막상 그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전혀 적확하지 않다.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무기로의 강간이 자행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마음은 더 무겁기만 하다. 들여다보면 전쟁의 계기는 우습다. 종교든, 이익이든, 욕심이든 들여다보면 하잘것없는데 어째서 그 피해는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럼에도 빛나는 순간은 있었다. ISIS에게 납치된 야지디 소녀들을 구해내고 있는 (실제로 많이 구해낸) '압둘라 쉬림'과 콩고에서 강간으로 장기가 손상된 수많은 여성들을 위해 목숨의 위협을 받아 가며 의사활동을 하고 있는 '무퀘게 박사'다. 양 극단으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며 한 권을 읽었다. 읽는 동안 종종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릴 때 많은 분들이 읽기가 겁난다는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이 모든 일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침서가

인스타그램 - @morning.bookstore


전쟁 보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목격한 참혹한 일들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의 반만 들을 때가 많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 P17

남자 판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싶어 했죠. 더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이 증거들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자기들은 모르겠으니 저한테 맡기겠다고 하더군요. 강간과 성폭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의가 없었던 터라 저는 정의부터 내리기로 결심했어요."
- P175

그게 바로 강간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무기인 이유입니다. 강간했고 강간을 기획한 그들은, 강간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 P186

강간은 신체 절단과 살인을 동반하곤 했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러시아 군대가 접근하기 전에 미리 자살하는 일이 물결처럼 퍼졌다. (...) 1945년 봄에 북부의 한 소도시 뎀밈에서만 600명이 자살했다.
- P236

고문자들이 임신한 수감자를 출산할 때까지 살려두었다가 아기를 빼앗았다니 디스토피아 소설에나 나옴 직한 사악한 일이었다. 사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시녀 이야기>에 포함된 몇몇 실제 사례를 제공했다"고 썼다.
- P262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분노가 그들의 고향을 재건하거나 그들이 겪은 고통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 P303

그건 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수법입니다. 피해자의 내면에서 사람이라는 느낌을 빼앗는 것이지요.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걸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의도적인 전략이지요. (...)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사회조직을 파괴하려는 의도지요. (...) 전쟁 무기로서 강간은 주민 전체를 몰아내고 훨씬 적은 비용으로 기존의 무기와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요.
- P3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