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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원래 유령은 자기가 유령인지 몰라.
유령은 죽은 사람이잖아요. 저는 살아 있는데요.
산 사람도 유령이 될 수 있어. │p.20
수험생, 취준생, 직장'생'으로 당연하고도 익숙한 '생'을 살던 '영'은 20대에 정리해고당하고 위기감에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과는 무관한 플라워 약국에 전산원으로 취직한다. 김약사와 조부장에게 약국 업무를 배워가는 과정, 또 약국을 오가는 단골손님들의 모습까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이야기여서 신선했다. 약국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나 조와 김약사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치기보다는 아주 조용하게, 영에게만 집중하여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치려 한다면 분명 괜찮은 포인트들이 있었고 그랬다면 '불편한 편의점'의 약국 버전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에피소드가 생길만하면 전개를 멈춘다. 1이 되기 위해 움츠리고 있는 영에게만 정성스레 집중하는 작가가 보였다. 영은 이야기의 주인공 '영'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1이 되기 위해 잠깐 움츠리고 있는 0이기도 하다. 불안과 무기력에 흔들리며 존재감 없이 살아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靈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약국에서 일하고 있는 무기력한 영과 삶에서 몇 차례 실패를 경험한 후 다시 약국에서 일하게 된 조, 남편에게서 분리된 이후에야 제대로 살게 된 김약사의 어머니까지 죽은 사람을 뜻하는 유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더없이 절묘한 걸지도 모르겠다. 산 사람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유령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요즘은 유령인 것 같아.
영에 어떤 숫자를 더하면 영은 사라지고 그 숫자만 남습니다. 영에 어떤 숫자를 곱하면 그 숫자를 영으로 바꿉니다.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영은 영 외에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숫자에 기댈 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p.246 작가의 말
0은 외로워 보인다. 불안하고 명확하지 못하다. 어떨 땐 0만 남고, 또 어떨 땐 0은 사라진다. 그래서 무해하거나 유해해 보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더 이상 0이 아니게 되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어렵고 피곤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가며 사는 것이 사람이듯 비록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0'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0은 예비 '1'이다. 선명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무수한 픽셀 중의 하나.
* 하니포터 3기 도서지원
아침서가 - @morning_book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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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관‘하게 만드는 선택을 해도 되는 걸까. - P10
나는 부식된 면이 바스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자리에 머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자리를 옮겨 앉는 순간 어긋난 틈을 메우지 못한 채 자꾸 벌어지기만 했다. - P130
하나의 세상에서 제거되어 부재자가 되는 경험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 P133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귀담아듣고 연민했으며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몇 년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어머니에게 딸이란 약국에서 구입하기 쉬운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복용해도 병세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기에 차도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에 불과했던 약의 역할을 거부했더니 어머니의 한탄은 비난으로 바뀌었다. - P135
해일처럼 넘어오는 정보에 발이 젖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선택하는 과정은 젖은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멈추기 전에는 발을 말릴 수 없었다. - P163
조에 비해 내가 겪는 비극은 흔하디흔하고 산개되어 있었다. 하나씩 짚어 말하면 평범한 일상으로 보인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서른이라는 섬에 얼마나 지쳐서 도달했던가.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 P218
관계는 가까워질수록 편협해지고 멀어질수록 공평해진다. 친절에 대한 보답은 그러므로 역시 친절뿐이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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