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 부는 바람
크리스틴 해나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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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부는 바람 (원제 : The Four Winds 2021)

크리스틴 해나

이 이야기는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더스트볼, 먼지모래 폭풍과 끝을 모르는 가뭄으로 인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고 가축도 사람도 먹을 것이 없어 죽어나가는 그런 시대.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읽어 본 것이 처음이라 나는 이 이야기가 마치 SF 재난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먼지모래 폭풍이라니. 집 안으로 들이닥치는 먼지모래, 자고 일어나면 온갖 곳에서 먼지모래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몸의 구멍마다 검은 모래가 끼는... 거기다 끝날 줄 모르는 가뭄. 내가 몰랐던 또 하나의 역사였다.

부유한 집안의 첫 딸이지만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한 채 사랑이나 유대감을 모르고 자란 엘사는 자유를 꿈꾼다. 하룻밤의 일탈로 청년 레이프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길로 집에서 쫓겨난 채 마르티넬리가의 가족이 된다. 그곳에서 엘사는 시부모님과 풍요로운 대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사랑과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두 아이를 낳고 살아가던 중 먼지모래 폭풍과 가뭄으로 인해 상황은 급변한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은행은 문을 닫았으며 키우던 가축들도 몸속에 모래를 가득 남긴 채 죽어간다. 사람들은 더 버티지 못하고 젖과 꿀이 흐른다는 광고 전단지를 보며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농부가 되길 원한 적 없던 남편 레이프는 이런 상황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족들을 떠나버렸고, 결국 엘사도 두 아이를 데리고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없었다.

삶의 관건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관건은 바로 두려움 속에서 행하는 선택이었다. 우리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이 아니라, 두렵기에 용감했다. Ι p.550

이야기는 결국 엘사의 인생 여정이고 그 속에서 발현된 용기와 사랑이다. 주목받지 못한 역사를 배경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쓰길 좋아하는 작가는 이번에도 역시 대공황 시대에서 나아가는 여성의 인생을 그렸다. 시모, 로즈는 엘사가 자신의 가족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엄마의 사랑과 여성 유대의 힘을 가르쳐 주었고 아이들을 낳으면서는 절대 끊어질 수 없는 끈끈한 사랑을 알게 됐다. 언제 생을 포기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대로, 노예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아이들을 지켜냈다. 엄마보다는 아버지와 유대감이 깊었던 딸 로레이다와는 여정 내내 대립했는데 이 모녀관계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엘사도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보다 자유를 원하는 여성 아니었던가. 그들만 몰랐을 뿐 모녀는 누구보다 가장 비슷한 사람들이었을 거다. 그걸 알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 길었다. 아무튼 그런 엘사가 뜻하지 않게 마르티넬리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동안 이제는 그녀의 딸 로레이다가 자유를 갈망한다. 그런 시대를 살면서 자유와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는 이유로 레이프와 로레이다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콱 쥐어박고 싶긴 했지만)

상황이 더 낫기를 바라며 떠난 여정 끝에 다다른 캘리포니아의 실상은 끔찍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끝도 없이 몰려들고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자신의 일자리가 줄어들까 봐, 창궐하는 병균들이나 이주민들에 의한 범죄로 인해 해를 입을까 봐, 또 자신들의 세금이 이주민들에게 쓰이는 상황들이 못마땅하다. 현재의 난민 문제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다. 역시 역사는 이어져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우고 생각한다. 부유한 농장주들은 노숙하는 이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이런 농장주들과 대립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싸움 속에서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엘사와 로레이다는 용기를 낸다. 이 시대가 빨리 끝나길 진심으로 빌면서 읽었다.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는 훌쩍훌쩍했다. 엘사가 용기를 내면서 가르쳐 준 그 끊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을 안고 로레이다는 어떤 여성이 될까? 나 역시 작가처럼 로레이다의 이후 인생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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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 - 전2권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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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원제 : L'affaire Alaska Sanders (2022)

조엘 디케르

조엘 디케르의 작품은 처음 읽어본다. 두 권이라는 분량도 그렇지만 11년 전의 사건을 재수사하는 이야기라 시점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기 시작했다. 흥미로워서 페이지는 술술 넘어간다. 맨 앞에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되어 있는 등장인물 지도를 함께 보면서 초반 몰입에 신경 쓰며 읽으면 성공적으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사건 자체의 자극이 도드라지는 범죄 소설이기보다는 조금씩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가는 촘촘한 수사물에 가깝다.

이 소설 속 주요 인물인 마커스 골드먼은 작가다. 과거 자신의 친구로 인해 사건의 수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을 책으로 써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유명한 작가. 그때 함께 수사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페리 경사의 부인이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는다. 이 죽음이 11년 전에 일어났던 한 사건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커스 골드먼은 또다시 재수사에 뛰어든다. 11년 전 마운트플레전트라는 평화로운 작은 동네의 호숫가에서 한 젊은 여성이 살해된 채 곰에게 먹이가 되고 있는 것이 목격된다. 이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는 바로 미인대회 출신의 '알래스카 샌더스'다. 사건 당시 그녀의 연인이었던 월터 캐리와 그의 친구였던 에릭 도노반이 수사망에 올랐고 모든 증거는 연인이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문 과정에서 월터 캐리가 에릭 도노반이 공범이라고 밝힘과 동시에 자살해버려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고 에릭 도노반은 종신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대체 이 사건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스토리를 굉장히 많이 밝힌 것 같지만 저것은 아주 일부일 뿐이다. 저 사건에는 감춰진 이야기들이 아주 많다. 인물들 모두가 '자신에게 해가 될까 봐.'라는 이기심으로 감춘 이야기들 말이다. 1부는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이 펼쳐지면서 마커스 골드먼의 이야기가 주로 진행되는데 이전에 쓴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이 특이했다. 극 중 작가가 쓴 책이자 실제 작가가 쓴 작품이라 더 그런 것 같은데 난 이번이 작가의 첫 책이다 보니 좀 소외감 느껴졌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해리는 마커스 골드먼과 아주 유대가 깊은 인물로 나오고, 자신의 사촌과 관련된 볼티모어 이야기도(<볼티모어의 서>) 계속 언급되는데 그걸 몰라서 아쉬웠던 것. 전작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런 부분은 굉장히 반가울 듯.

2부에 가면서 마커스 골드먼과 페리 경사의 수사는 손발이 착착 맞으면서 드디어 진실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게 되는데 아, 이 작가님 진짜 촘촘하시네 싶었다. 거짓말 하나 밝혀내면 또 거짓말 하나 나오고 또 거짓말... 이런 식인데 별것 아닌 이야기도 별것인 듯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 듯하다. 마지막엔 진범과 함께 사건의 진상을 쫙 정리하면서 재구성해주는 친절함까지. 추미스 소설 많이 읽으면서 잔혹성에 물들어 초반엔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지만 인물들이 숨긴 비밀들을 하나하나 까발려가는 과정이 좋았다. 덩달아 나도 공들여 읽은 느낌이 든다. 기력이 좀 쇠하긴 했지만. ^^ 이렇게 촘촘하게 수사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고 생각보다 재밌어서 주말이 홀랑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다음은 <가비 로빈슨 사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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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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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찬의 가슴 언저리 위로 손을 가져다 대고는 동그란 공이라도 잡은 듯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게 사과라도 된다는 듯 한 입 베어 먹는 시늉을 했다.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방금 내가 네 여름 먹었잖아. (뭐?) 네 가슴에서 자꾸만 널 괴롭히는 그 못되고 뜨거운 여름을 내가 콱 먹었다고. 이제 안 뜨거울 거야. 괴롭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거야. 두고 봐. Ι p.186


조용히 제목을 읽어보았다. 여름이 마치 사과라도 되는 듯 한 입 베어 물었다는 제목 때문인지 청사과의 풋내가 나는 듯했다. 여름의 한가운데 같은 싱그러운 표지를 보니 여름에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지만 생각한 것만큼 달콤하고 싱그럽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조금은 쌉싸름한 이야기라고 할까.


아픔을 가진 두 아이 하지오와 유찬의 이야기다. 하지오는 미혼모인 엄마와 둘이 살아간다. 어느 날 큰 수술을 앞둔 엄마의 결정으로 아빠가 있는 '번영'이라는 동네로 가게 된다. 아빠의 존재도 몰랐다가 난데없이 아빠랑 살게 되니 좋기는커녕 혼란스럽고 미움만 커진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 유도를 시작했을 정도로 지오는 엄마를 사랑하므로 엄마를 아프게 한 아빠가 더 미웠던 것이다. 지오는 아빠 네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리고 번영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유찬.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유찬에게는 아무도 믿지 않을 비밀이 있다. 5년 전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혐오하며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며 지낸다. 하지오가 전학 오면서 유찬에게 변화가 생긴다. 이상하게도 지오의 속마음만은 들리지 않을뿐더러 지오가 유찬의 곁에 있을 땐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까지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유찬에게 그런 지오는 궁금한 존재다. 알고 싶고, 계속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존재.


번영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유찬과 지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화재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조금씩 밝혀진다. 번영 사람들의 끈끈한 결속력이 유찬의 상처를 만들었고, 지오의 상처도 헤집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결속력으로 단단하게 받쳐주고 보듬어주기도 했다는 걸 알게 된다. 화재사고와 관련해서는 아프고도 슬픈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지오와 유찬의 슬픔과 분노, 유도부 선배 새별의 사정, 옳지는 않다 해도 최선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결정을 해야만 했던 번영 사람들의 투박하고도 정 깊은 이야기에 가슴이 무지근했다. 하지만 아프고 괴로워도 부딪치며 성큼성큼 나아가는 아이들만큼 눈부신 건 없다. 새큼하고 풋풋하지만 찬란한 여름 같은 이야기다. 꼭 쥐고만 있던 상처를 놓아주고 또 서로를 안아줄 줄 아는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여름을 보내는 지금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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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었어. 그래서 듣고 싶었어, 네 속마음. 그 말 한마디에 지오는 주저앉아 버린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 목 놓아 운다. 가슴을 치며 발을 바닥에 비벼 대며 자꾸만 화가 난다고, 그래서 미치겠다고 그렇게 울어댄다. 나는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저 함께 앉아 있어 준다. 언젠가 내가 그랬을 때, 다른 누군가가 그래 주길 바랐던 것처럼. - P58

어렵고 힘든 것들이 늘 그러하듯 답이 없는 문제는 언제나 가슴을 세게 짓눌렀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른 채 원망만 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 P128

큰일이다. 이제 매미 소리도 모자라 저 태양만 봐도 지금이 생각날 테니까. 그냥 알 것 같았다. 이 아이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내가 겪은 여름 중 가장 찬란하고 벅찬 여름이 될 거라는 걸. 마주하는 순간마다 그리워하게 되는,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었다. - P187

혼자인 줄 알았던 이들 곁에 너무도 따뜻한 이들이 언제나 함께였음을 알게 되는, 햇살만큼 반짝이는 이야기가 되길 바라며 글을 썼다. 이 이야기가 마음이 닿지 않아 힘들어하는 이에게,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이 답답한 이에게 위로가 되기를, 그리하여 당신의 삶이 여름의 햇살만큼 눈부시기를 바란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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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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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을 읽고 너무 좋아하게 된 작가 개브리얼 제빈. <비바, 제인> 이후 언제쯤 새로운 작품을 읽어볼 수 있으려나 했기에 이번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두께감이 좀 있는 책이라 빨리 시작했는데 막상 다 읽었을 때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계속 읽고 싶었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내가 싫었다. 자연스러운 대화체, 반짝이면서도 착착 감기는 문장의 맛, 캐릭터성,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섬에 있는 서점>을 읽고 너무 좋아하게 된 작가 개브리얼 제빈. <비바, 제인> 이후 언제쯤 새로운 작품을 읽어볼 수 있으려나 했기에 이번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두께감이 좀 있는 책이라 빨리 시작했는데 막상 다 읽었을 때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계속 읽고 싶었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내가 싫었다. 자연스러운 대화체, 반짝이면서도 착착 감기는 문장의 맛, 캐릭터성,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게임이 뭐겠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Ι p.540

샘과 세이디는 각자의 이유로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병원의 휴게실에서 소년 소녀는 처음 만나 마리오 게임을 하면서 친해지게 되고 이후에도 여러 게임을 하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어떤 오해로 인해 샘은 상처받고 세이디에게 절교선언을 했다. 시간이 흘러 샘은 하버드에서, 세이디는 MIT에서 공부하게 됐고 어느 날 하버드 스퀘어 매직아이 광고판 앞에서 재회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세이디는 게임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었고 샘 역시 여전히 게임을 좋아해서 세이디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동참해 함께 게임 제작을 하게 된다. 이 둘 사이의 중재자로 샘의 친구 마크스가 합세하면서 세 청춘들의 우정과 열정, 고민, 질투, 오해들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매직아이, 슈퍼마리오, 닌텐도, 동키콩, 다마고치 같은 추억의 게임들이 많이 나와서 정겹다. 게임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잘 몰라도 충분히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오랫동안 앓아 온 신체적인 고통과 한계로 인해 샘은 자신의 이상이 담긴 게임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몰두하는데 이해가 돼서 더 빠져들었다. 그들이 만든 '이치고'란 게임은 해보고 싶을 정도. 또 세이디가 그 시대 여성 게임 디자이너로서 느꼈을 차별적 시선 때문에 샘과 자신의 훌륭한 상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만의 게임을 고집하는데 무척 현실적이었다. 대중적 성공과 예술적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것도 좋았고 훌륭한 게임 디자이너이자 자신의 교수인 도브와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마크스에 대해서는 스포가 되는 것 같아서 쓸 수는 없지만 마크스로 인해 많이 슬펐고 결국은 훌쩍훌쩍하면서 후반부를 읽었다. 이 책은 사랑이 가득하지만 흔한 로맨스 소설은 아니다.

전엔 몰랐는데 작가가 한국계 어머니와 유대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소설의 세계에서 샘이 바로 그러하다. (한국인 이민 1세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피자 동&봉을 운영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안전하게 속하지 못한 채 외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혼혈 '애나 리'들의 삶도 놓칠 수 없다. 자살한 여인 '애나 리'와 싱글 맘이자 배우로서 살아가려고 고군분투하던 샘의 엄마 '애나 리'(대타로 뽑힌 방송의 전임자의 이름도 '애나 리') , 마크스의 엄마는 일본계 미국인인 애나 리.(마크스가 친구 샘에게 그렇게도 헌신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ㅠㅠ) 마크스의 엄마는 자신의 본명이 애란이라고 했는데 실제 작가의 어머니 이름이라고 한다.

살면서 대체로 샘은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그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로 보였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일단 누군가를 사랑하면, 듣기 지겨워질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 말이 의미가 닳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한다. 안 그럴 이유가 있는가? Ι p.615

이 소설 속에서 샘은 지치지도 않고 세이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너무 귀엽고 좋았다. 파트너를 읽고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세이디를 구하기 위해 세이디가 좋아하는 <오리건 트레일> 과 비슷한 게임을 만들었던 샘. 그 게임 세계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파트는 무척 독창적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훌륭한 파트너이면서도 자주 오해하고 자주 싸웠다. 생각해 보니 그런 그들에게 마크스는 '봄날의 햇살'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아낌없이 지원해 주고 살펴주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진심 어린 존재. '마크스가 마크스였기 때문에 샘과 세이디는 샘과 세이디일 수 있었다.' (p.501)를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책이 끝날 때 책이 끝난다는 아쉬움만큼 마크스가 그리웠다. 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뜨겁고, 슬픈 이야기를 다들 읽어봤으면 한다. 아,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와 양윤옥 번역가의 조합만큼 개브리얼 제빈과 엄일녀 번역가의 조합도 너무나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다. 표지도 읽고나서 보니 딱 이 소설 그대로다. 영화화 된다고 하는데 고작 두시간으로 괜찮을까? 미니시리즈 형태로 드라마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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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 훌쩍 도약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이 이기심과 원한과 불안으로 똘똘 뭉친 독종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세이디는 비범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의지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행복한 사람들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
- P604

하여간 나는 그쪽 세계가 더 좋아요. 완벽해질 수 있으니까. 내가 완벽하게 만들었으니까. 현실 세계는 마구잡이식 재난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잖아요. 늘 그렇죠. 현실 세계의 코드에 대해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젠장 하나도 없잖아.
- P532

마크스가 마크스였기 때문에 샘과 세이디는 샘과 세이디일 수 있었다.
- P501

은 O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상의 기초적인 오류였고, 샘은 머리 뚜껑을 열고 두뇌를 꺼내서 그 불량 코드를 삭제하고 싶었다. 불행히도, 인간의 두뇌는 애플의 맥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폐쇄적인 시스템이었다.
- P306

마크스는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독서가였고, 그에게 세이디는 마치 여러 번 읽어도 좋은 책, 항상 새로운 뭔가가 튀어나오는 책 같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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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
로리 넬슨 스필먼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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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 (원제 : The Star-Crossed Sisters of Tuscany (2020))





폰타나 가문에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가 있다. '이 가문의 둘째 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만날 수 없다'라는 저주다. 이 가문의 둘째 딸인 에밀리아와 루시는 어느 날 이 가문에서 거의 내치다시피 한 포피 이모할머니가 자신의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아 계획한 이탈리아 여행에 동행해 줄 것을 부탁받는다. 가족들은 모두 반대하지만 포피는 자신과 여행에 동행하면 가문에 전해져내려오는 저주가 깨질 거란다. 도대체 이 여행은 무슨 여행일까?



가족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결국 포피 이모할머니, 에밀리아, 루시 셋의 이탈리아 여행이 시작된다. 알고 보니 포피는 젊은 시절 리코라는 동독 남자와 사랑했지만 냉전이라는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든 번째 생일에 사랑을 약속했던 성당에서 다시 재회하기로 약속했던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 일정 동안 포피는 리코와의 사랑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준다. 에밀리아와 루시는 황당했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이야기의 결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포피가 뇌종양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포피와 리코의 만남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파티시에로 일하며 저주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고 자신했던 에밀리아와 저주를 믿기에 그것을 꼭 깨길 원해 남자에게 집착하던 루시는 이 여행으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이 억눌러왔던 자신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자신의 가능성과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의 이탈리아 여행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포피 할머니와 리키는 재회할 수 있을까? 포피의 언니이자 폰타나 가문의 권력, 에밀리아의 가능성을 억눌러왔던 로사 할머니와 얽힌 사연과 비밀까지!! 책이 끝날 때까지 이야기는 꽉 차 있다.



결국은 해피엔딩이었다. 난 해피엔딩이 좋다. 어쩐지 읽는 보람이 있달까? 따로 스포하진 않겠지만 해피엔딩이란 말은 적고 싶었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이 이야기는 자신의 젊은 시절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한 독자와의 편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둘째 딸들에게 내려진 저주라는 허무맹랑하고 판타지스러운 소재는 결국 실재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저주에 지레 겁먹고 가능성을 애써 눌렀던 결과라고밖에 할 수 없다. 중반까지 에밀리아와 루시는 너무 답답했지만 포피의 애절한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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