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가을

 

두목(杜牧, 803853)

 

서리 덮인 나무 저만치에 누각이 서 있고

거울처럼 맑은 하늘 구름 한 점 없구나.

종남산과 가을빛

그 기세 함께 드높아라.

 

* 두목

 

         

 

 

 

 

長安秋望

 

樓倚霜樹外 

鏡天無一毫

南山與秋色

氣勢兩相高

 

 

 

* 두목은 당나라 후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흔히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이목’(李牧)으로 불린다. 또 작품의 성향이 두보(杜甫)를 닮았다고 하여 작은 두보’, 소두’(小杜)라고 불리기도 한다.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아방궁부(阿房宮賦)는 그중 대표작이다. 소소한 일에 매이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쇠락해 가는 당나라를 위해 무던 애를 썼다. 이 때문인지 군사와 병법 연구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이 시는 드높은 가을 하늘과 종남산(終南山)을 함께 놓고 그 높은 기세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첫 구절 서리 덮인 나무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처연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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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가 없는데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나?

   皮之不存, 毛將焉附(피지부존, 모장언부)

 

춘추 시대 진()나라 공자 이오(夷吾)는 정쟁의 와중에 이웃한 강대국 진()나라 목공(穆公)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귀국하여 국군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가 혜공(惠公)이다. 당시 혜공은 목공에게 자신이 국군으로 즉위할 수 있게 해 준다면 하서 땅 다섯 개 성을 보답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혜공은 이 약속을 무시했다. 얼마 뒤 진()나라에 가뭄이 발생하여 진()나라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자 진()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반대 상황이 되자 진()은 식량 원조를 거절했다. 이때 혜공의 외숙 괵사(虢射)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식량을 원조하는 것은 털만 있고 껍질은 없는것에 비유할 수 있다면서 껍데기도 없는데 털이 어디가 붙을 수 있겠냐며 원조에 반대했다. 경정(慶鄭)이 나라 간 신의를 저버리면 장차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누가 도와주겠느냐며 반박했지만 혜공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식량 원조를 거부했고, 결국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이 성어는 근본이나 기본이 없으면 여기에 기댈 모든 것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백성 없이 나라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14년조

 

 

 

 

 

중국사의 오늘 :

1626730(명 희종 천계 68월 경술)

후금 태조 누르하치가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1559년 출생). 요령성 심양의 복릉(福陵)이 그의 무덤이다.

 

 

* 누르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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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가르고 진주를 감추다.

   剖腹藏珠(부복장주)

 

당나라 때 서역의 상인이 뜻하지 않게 대단히 귀한 진주를 얻어 장안(長安)으로 가서 비싼 값에 팔기로 결심했다. 상인은 가는 도중 진주를 빼앗기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자신의 배를 가르고 그 안에 진주를 감추었다. 비단길을 따라 수만 리 천신만고 끝에 장안으로 들어온 상인은 숙소를 잡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작은 칼로 자신의 배를 갈라 진주를 꺼냈다. 하지만 먼 여정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이라 출혈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사건의 진위를 확인한 당 태종은 사람들이 그저 진주만 아낄 줄 알고 자기 몸은 아끼지 않는구나. 관리들이 법을 어기고 부정한 짓을 저지르다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망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번 그 서역 상인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라며 탄식했다. ‘부복장주는 물건 때문에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거나,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바꾸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유하는 성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태종 정관 원년

 

 

 

 

 

중국사의 오늘 :

1972729

중국과 일본이 북경에서 장기간 지속되어 온 양국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끝내기로 합의 서명했다. 이로써 두 나라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그로부터 20년 뒤인 1992년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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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말라서야 우물을 파다.

   臨渴掘井(임갈굴정)

 

춘추 시대 노나라 소공(昭公)은 실권자인 계손씨(季孫氏)를 토벌하려다 오히려 반격을 받아 제나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나라 경공(景公)은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 국군이 어쩌다 나라를 잃었느냐며 그 원인에 대해 반성해 보았느냐고 물었다. 소공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애를 썼는데 정작 자신은 그들을 무시했고, 그러다 보니 주위에는 아부하는 자만 넘쳐났다며 나뭇잎과 가지가 너무 많으면 뿌리가 뽑히는것에 비유했다. 경공은 젊은 소공이 자신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장차 가망이 있겠다고 생각하여 안자(晏子)에게 의견을 물었다. 안자는 누군가 물속에 빠진 다음 왜 물에 빠졌는지를 생각하고, 길을 잃고 나서야 길을 찾으려는 것은 위기가 닥친 다음에 무기를 만들어 반격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음식이 목에 걸려 삼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우물을 파서 물을 얻으려는 것은 아무리 빨리 우물을 파도 이미 늦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임갈굴정은 평소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터진 다음에야 방법을 찾느라 부산을 떠는 것을 비유하는 성어이다.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잡 상(內篇雜上)

 

 

 

 

중국사의 오늘 :

1392928(명 태조 홍무 259월 경인)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그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서는 사신을 보내 책봉을 청했다. 명 왕조는 이날 이성계 정권을 승인하고 고려라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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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모습을 황하가 맑아지는 것에 비유하다.

   笑比河淸(소비하청)

 

북송 때 사람인 포증(包拯)철면무사(鐵面無私)의 청백리로 흔히 포청천’(包靑天)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그는 단주(端州)라는 곳에 근무하다 전근을 가게 된 그에게 누군가 그 지방 특산물인 벼루를 기념품으로 선물했지만 이마저도 받지 않았다. 이런 결벽증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적지 않은 오해를 했다. 그래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그의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검은 얼굴로 묘사하는가 하면, 포청천이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는 황당무계한 소리까지 다양했다. 어느 쪽이나 그의 엄정한 법 집행을 대변하는 이야기들이다. 그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포청천이 좀처럼 웃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포청천의 웃음을 황하가 맑아지는 것에 비유했다. 황하는 늘 누렇게 흐려 있다가 천 년에 한 번 맑아진다는 전설이 전해 올 정도이다. 포청천이 얼마나 근엄했으면 그가 웃는 모습을 천 년에 한 번 맑아진다는 황하에 비유했겠는가만 사실 포청천은 백성을 아주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대했다. 그렇다면 이 성어는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가차 없이 법을 집행하는 그를 시기하고 미워했던 나쁜 권력자들의 심경의 일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송사(宋史) 포증전(包拯傳)

 

* 포증

 

 

 

 

 

 

중국사의 오늘 :

1510927(명 무종 정덕 58월 무신)

환관 유근(劉瑾)이 모반죄로 주살되었다. 유근은 무종이 태자 때부터 모시면서 온갖 놀이에 심취하게 유인하여 큰 총애를 받으면서 조정 권력을 좌우했으나 같은 환관 장영(張永)의 음모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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