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말라서야 우물을 파다.
臨渴掘井(임갈굴정)
춘추 시대 노나라 소공(昭公)은 실권자인 계손씨(季孫氏)를 토벌하려다 오히려 반격을 받아 제나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나라 경공(景公)은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 국군이 어쩌다 나라를 잃었느냐며 그 원인에 대해 반성해 보았느냐고 물었다. 소공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애를 썼는데 정작 자신은 그들을 무시했고, 그러다 보니 주위에는 아부하는 자만 넘쳐났다며 ‘나뭇잎과 가지가 너무 많으면 뿌리가 뽑히는’ 것에 비유했다. 경공은 젊은 소공이 자신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장차 가망이 있겠다고 생각하여 안자(晏子)에게 의견을 물었다. 안자는 누군가 물속에 빠진 다음 왜 물에 빠졌는지를 생각하고, 길을 잃고 나서야 길을 찾으려는 것은 위기가 닥친 다음에 무기를 만들어 반격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음식이 목에 걸려 삼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우물을 파서 물을 얻으려는 것’은 아무리 빨리 우물을 파도 이미 늦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임갈굴정’은 평소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터진 다음에야 방법을 찾느라 부산을 떠는 것을 비유하는 성어이다.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잡 상」(內篇雜上)
중국사의 오늘 :
1392년 9월 28일(명 태조 홍무 25년 9월 경인)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그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서는 사신을 보내 책봉을 청했다. 명 왕조는 이날 이성계 정권을 승인하고 고려라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