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울타리 아래에 의지하다.

  寄人籬下(기인이하)

 

남제 시대에 장융(張融)이란 지식인이 있었다. 키도 작고 못 생긴 데다 성격까지 괴팍하여 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도성(蕭道成)은 황제가 되기 전부터 장융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재능을 누구보다 인정했다. 소도성은 그 뒤 남제 정권을 세워 황제가 되었지만 장융과는 격 없이 잘 지냈다. 장융 또한 거침없이 황제 앞에서 바른말을 했다. 두 사람은 황제와 신하라는 벽을 허물고 수시로 시국과 학문과 예술에 관해 토론했다. 한번은 소도성이 장융의 글씨를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부자와 비교하며 그가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비평했다. 그러자 장융은 그 두 사람이 자기보다 부족하다고 해야지 옳지 않겠느냐고 응수했다. 소도성은 크게 웃으며 다시는 비교하지 않았다. 장융은 글을 짓는 데 늘 자신의 스타일을 강하게 보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사내대장부라면 공자가 ()‧『()를 편찬하고 예악(禮樂)을 제정했듯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창조해야지 남을 따라 마치 참새처럼 다른 사람의 울타리 아래 빌붙어야 하겠는가.”라고 했다. 여기서 개성 없이 남을 따라하거나 의지한다는 기인이하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남사(南史) 장융전(張融傳)

 

 

 

 

 

중국사의 오늘 :

11021030(북송 휘종 숭녕 원년 9월 기해)

송 왕조에서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단예문(端禮門) 앞에 세웠다. 간신 채경이 집권함으로써 자신의 정적들을 간신으로 몰아 그 명단을 비석에 새기고 그 가족들까지 박해를 가했다.

 

* 원우간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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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사이가 좋지 못하다.

   積不相能(적불상능)

 

왕망(王莽)이 세운 신나라가 갖은 모순과 폐단으로 불과 10년 만에 무너졌다.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한 황실의 일족인 유현(劉玄)도 한 왕조의 부흥을 외치며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점쟁이 출신의 왕랑(王郞)이란 자도 한 왕조의 후손임을 사칭하며 한단을 기반으로 황제로 자칭했다. 이에 유현은 사궁(謝躬)을 보내 왕랑을 치게 했다. 사궁의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유현은 유수(劉秀)에게 지원하게 하여 한단을 점령했다. 그런데 사궁과 유수는 지금까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궁은 툭하면 유수를 공격했다. 이제 두 사람의 군대가 함께 한단에 주둔하고 있으니 뭔 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사궁은 유수를 깔보았고, 유수는 차분히 기회를 기다렸다. 사궁의 아내가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는 사궁에게 유수를 미리 방비하라고 충고했다. 사궁은 아내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 뒤 유수는 사궁에게 함께 봉기군을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사궁은 별 생각 없이 이 제안에 응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끝내는 피살되었다. 사궁은 유수의 허허실실 계략에 말렸던 것이다. ‘적불상능은 오랫동안 반목해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 이런 사이라면 경계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후한서(後漢書) 오한전(吳漢傳)

 

* 광무제

 

 

 

 

 

 

중국사의 오늘 :

891029(동한 화제 영원 원년 9월 경신)

() 태후의 오라비 두헌(竇憲)이 대장군에 임명됨으로써 두씨 외척 세력이 기승을 부렸다. 동한 외척 발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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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과 벌레의 득실

   鷄虫得失(계충득실)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가 기주(夔州)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집에 닭을 몇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인이 닭을 꽁꽁 묶어 시장에 내다 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닭은 두려움에 온몸을 퍼덕이며 울어 댔다. 두보가 하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집안사람들이 이 닭이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고는 닭에게 힘없이 먹히는 작은 벌레가 가여워 닭을 내다 팔기로 했다는 것이다. 두보는 그들이 가련한 벌레만 알고 팔린 닭이 직면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왜 작은 벌레에게는 은혜를 베풀려 하면서 닭에게는 이렇게 각박하게 대한단 말인가? 두보는 닭을 풀어 주게 했는데 문득 닭과 벌레 둘 다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벌레를 죽이지 않고 닭을 삶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잡한 마음에 두보는 산 위의 누각에 올라 서늘한 강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당시의 불안한 사회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박계행(縛鷄行)이란 시를 남겼다. 그 뒤 계충득실은 중요한 것과는 무관한 아주 작은 득실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박계행(縛鷄行)

 

* 두보

 

 

 

 

 

 

중국사의 오늘 :

6981028(무주 성력 원년 9월 병자)

여성 황제 무측천이 여릉왕(廬陵王) 이현(李顯)을 황태자에 복위시켰다. 당 왕조를 무너뜨린 무측천은 당시 여론의 향방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가 기민하게 이런 결정을 내림으로써 민심을 안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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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의 붕어

   涸轍之鮒(학철지부)

 

명예와 이익에 관심이 없었던 장자(莊子)는 가난했다. 그래서 감하후(監河侯)라는 사람에게 양식을 빌리러 갔다. 양식을 빌려주기 싫었던 감하후는 녹봉을 받으면 은자 300냥이라도 빌려주겠다고 했다. 눈치를 챈 장자는 감하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날 장자가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고인 물에 사는 붕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붕어는 물이 다 말라 죽게 생겼으니 물 한 바가지만 갖다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남쪽의 오나라와 월나라 국왕을 설득하여 장강의 물을 퍼서 네게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붕어란 놈이 물 한 바가지면 충분히 살 수 있는데 그 따위로 말하다니 차라리 말라 죽어 건어물이 되거든 생선 가게에서 나를 찾는 것이 더 빠르겠다며 버럭 성을 냈다. 이야기를 마친 장자는 감하후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당장 들어줄 수 있는 작은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감하루를 우화로 비꼰 것이다. ‘학철지부는 당장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급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비유하는 성어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

 

* 장자

 

 

 

 

 

 

중국사의 오늘 :

8051027(당 순종 영정 원년 10월 정유)

저명한 지리학자 가탐(賈耽)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730년생). 그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서북 변강의 지도를 제작하는 등 지리학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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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좋은 선생

   好好先生(호호선생)

 

동한 말기 사마휘(司馬徽)는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남달랐다. 그가 추천한 유명한 인물이 다름 아닌 삼국 시대를 주름잡는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이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두 사람은 훗날 유비(劉備)의 책사가 되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정치 정세가 어지러웠기에 사마휘는 시골에 은거하여 인재를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제시해야 할 때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늘 좋다고만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호호선생이라 불렀다. 어느 날 사마휘가 길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사마휘의 근황을 물었고 사마휘는 당연히 좋다고 답했다. 얼마 뒤 한 친구가 사마휘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뜬 이야기를 했다. 사마휘는 이런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도 아주 좋아라는 반응을 보였다. 친구가 간 뒤 그의 아내가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냐며 나무라자 사마휘는 좋아! 당신 말은 더 좋아라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난세를 그런 식으로 헤쳐나간 사마휘였다. 이 이야기는 풍몽룡(馮夢龍)고금담개(古今譚概)에도 나온다.

 

통속편(通俗篇) 품목(品目)

 

* 사마휘

 

 

 

 

 

 

중국사의 오늘 :

18941026

일본군이 중국 구련성(九連城)과 안동(安東)을 점거했다. 중일 갑오전쟁 중에 일본이 맨 먼저 차지한 중국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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