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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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열 네살 소녀의 감수성이 깨어나,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랑 그 자체로 사랑인 사랑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처음 그 때처럼 설레보고 싶고, 처음 그 때 처럼 뜨겁게 바라보고 싶고, 처음 그 때 처럼 조심스러워지고 싶을 때 말이다. 그럴 때마다 현실에서 남편 아닌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결론적으론 불륜이 될테니, 뭐 드라마나 책 같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라도 간만에 샐쪽이 삐져나온 열네살 소녀의 감수성을 어루만져 주어야 하지 않겠나.

 

박물관의 브라키오사우루스 공룡의 잔해 앞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남편도 버리고 딸도 버리고, 나이가 아흔인지 백살인지도 모를 그 때까지, 그와의 사랑을 곱씹으며 사는 여자의 이야기라니.

매력적이지 않은가. 도대체 그 정로도 지독한 사랑의 정체가 뭐길래.

 

하지만 웬걸. 

사변적인 여성 작가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런 소설이, 더 이상 내게 정말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은, 나의 여성성과 소녀적 감성이 무디어 졌다기 보다는 취향의 변화 때문이라고, 혹은 작가의 역량 부족이라고 믿고 싶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소설인데, 몰입도 잘 되지 않았고, 막판에 가서는 짜증까지 날 정도였으니까.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끊임없는 질문들만 일어날 뿐. 

 

프란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스무살 무렵의 나였다면, 아마도 너무나 슬프고 절절한 사랑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를일이다만, 마흔이 가까운 내게, 주인공의 감정들과 행동들은 오히려 집착에 가까운 소유욕으로 보인다. 그녀가 사랑한 것이 과연 프란츠 자체였는지, 인생에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걸 느낀 후, 죽기 전 오롯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서 비롯된 신기루 같은 가공의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아니었는지. 혹은 기이한 시대가 그녀와 사람들로 부터 빼앗아 가버린 사랑, 자유, 평화, 순수 같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싶은 욕구는 아니었는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광적인 집착, 그리고 기억의 왜곡과 불확실성. 사랑과 집착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결국 이 소설의 모든 것들이 내게는 모호하기만 했다. 주인공의 나이도, 주인공의 기억도, 프란츠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도, 주인공을 향한 프란츠의 사랑도, 사건들도, 그리고 프란츠의 죽음마저도. 통일 후의 모호하고 혼돈스런 독일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 봐 준다면, 잘 쳐주는 셈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에, 여성 취향의 감수성 폭발 문체와 시대적 아픔을 덧입혀 그럴듯 하게 뽑아내려 했으나, 아직은 미숙함이 느껴지는 유치한 작품. 그냥 나한텐 그랬다고. 아마 기대가 너무 컸던 듯.

 

마지막으로, 그녀의 사랑이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이 강하게 인상에 남는다. 그녀가 공항에서 자신의 아내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프란츠를 본 그 순간, 자신에 대한 프란츠의 사랑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의 불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책 접기>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꿈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여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섞인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 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 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ㅎ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 두기만 하면 사랑은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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