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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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저 못생기고 뚱뚱한 한 찌질이 남자의 성장과 사랑이야긴가 보다 하고 심드렁히 읽기 시작했는데 뒤로 갈수록 윤곽이 드러나는 오스카 집안의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가족사와, 그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트루히요를 비롯한, 이 모든 사건들의 실질적 원인이 된 시대적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소설은 단순 애정 소설을 넘어 역사 소설로 탈바꿈한다. 

 

신기한 건, 이름조차 낯선 서인도 제도의 작은 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남미 작가 -국적이 미국이니 미국 작가라고 해야 하나? 암튼- 의 소설이 너무도 친근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지명등만 스페인어로 되어 있을 뿐, 무대를 한국으로 고스란히 옮긴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과 정서가 우리와 닮았다고 느꼈다.

 

트루히요라는 군부 출신 독재자의 장기 집권, 독재자 일가의 폭정, 무력한 법과 질서, 실종과 암살, 무차별적 폭력과 고문, 권력에 빌붙은 경찰과 깡패, 국민들간에 팽배한 불신과 상실감, 아이티와 스페인이라는 외부 세력의 침입과 식민지 역사, 미국의 개입, 그로 인한 디아스포라 등등. 주요 플롯은 또 어떤가. 한 때는 명문가였던 한 집안의 삼대에 걸친 몰락, 남자를 통한 탈출 시도와 계속되는 실패, 그 모든 비극의 원인조차 모른 채, 그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후손들. 책을 읽는 동안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해 이런 저런 한국사 책들과 한국 소설들이 언뜻 언뜻 떠올랐다.  

 

온갖 비주류적 요소의 총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오스카 와오, 그가 만약 진정한 자존감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 여자에게 모든 걸 걸지만 않았다면 - 물론 인류의 영원한 정답인 사랑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진 않지만 - 어쩌면, 길고 더더욱 놀라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오스카의 할아버지, 어머니, 누나 그리고 그 자신까지, 그들 모두의 선택을 십분 백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독재자가, 시대가, 그리고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 않게 잘 보여준 역량은 아마 그 자신 변방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도미니카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연민과 애정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그리고 벨라의 딸에게 거는 작가의 진심 어린 희망이 우리에게도 역시 통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어쩌면, 만약이지만 어쩌면, 내가 기대하는 만큼 이시스가 똑똑하고 용감하다면 아이는 우리가 겪고 배운 모든 것을 소화하고 고유의 통찰력을 보태 이 비극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게 바로 사기가 충천한 날들이면 내가 소망하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의기소침하거나 처연한 날들에 대한 이야기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맨해튼 박사가 우리의 우주에서 스러지기 전에 대답한다. "결국이라고? 결국이란 없어. 아드리안. 세상에 진정한 결말이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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