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회 추억
신영복 지음, 조병은 영역, 김세현 그림 / 돌베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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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모든 추억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만나는 곳은 언제나 현재의 길목이기 때문이며, 과거의 현재에 대한 위력은 연재가 재구성하는 과거의 의미에 의하여 제한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추억은 옛 친구의 변한 얼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대문에 그것이 추억의 생환生還이란 사실을 나중에 깨닫기도 한다.

생각하면 명멸明滅하는 추억의 미로迷路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삶 역시 이윽고 또 하나의 추억으로 묻혀간다. 그러나 우리는 추억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 추억은 화석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단히 성장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청구회 추억'의 추억 중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영인본에 실려있다는 이 글을 단행본으로 처음 만났다. 내가 대학 때 읽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가장 처음에 나왔던 책이다.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글과 어울리는 그림도 싣고, 영역英易으로도 나란히 실었다.

이 이야기는 신영복 선생이 옥에 갇히기 2년여 전인 1966년 이른 봄 학회 후배들의 초대로 서오릉에 답청놀이에 나갔던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 곳에서 만난 입성 초라했던 국민학교 7,8학년 아이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아이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그러나 한두 마디로 그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만한 첫마디로 어떤 말을 건넬까 궁리하는 신영복 선생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참 좋다.

 

이 짧은 한나절의 사귐을 나는 나대로의 자그마한 성실을 가지고 이룩한 것이었다. - 본문 33쪽

 

아이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자신들 모임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도 받고 헤어진 뒤, 그러나 얼마간 그들을 까맣게 잊고 지낸다. 아이들이 먼저 보내온 정성 깃든 편지를 받아들고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그날의 행위가 결코 장난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자체가 '한갖 장난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고백하는 모습도 너무나 인간적이다.



아이들 다니는 학교 이름을 따 '청구회'라는 모임이름을 만들어주고 매주 토요일 오후에 만나는 모임을 거의 2년동안 지속하지만 갑작스러운 구속으로 연락이 끊기면서 추억도 거의 끝이 난다.

중앙정보부의 심문과정에서 청구회의 정체와, 선생이 지어준 청구회의 노래 가사 중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는 부분이 문제가 되어 심각한 추궁을 받았던 일은 당시 우리 나라의 현실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일화이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과의 가슴 따뜻한 만남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이들의 선한 마음에 전염이 되고, 어리다고 얕보지 않고 진정성 가득한 태도로 그들과 어울려준 선생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보부 직원들이야 물론 이 모임의 실체를 불순한 세력의 배후조종 쯤으로 생각했겠지만 말이다.(생각할수록 실소가 나오는 대목이다. ㅡㅡ;;)

청구회에 얽힌 추억을 신영복 선생이 구속된 뒤에 옥중에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그것도 하루 두 장 지급되는 재생지로 만든 휴지에 기록했다는 점은 그만큼 그것이 소중했던 추억이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지금까지 읽었던 신영복 선생의 책들이 에세이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에 반해 이 책은 특정 기간 동안의 사건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구성해서  다분히 문학적인 작품이었다. 아이들과의 인연이라는 이야기 내용에 어울리게 곁들인 그림 또한 질박한 선과 먹물 번진 화선지의 느낌이 가득해서 더없이 여운이 남는다.

나는 이때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가 한창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었을 사회적 배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가 있었다. 아마도 그 분들이 읽게 된다면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현재와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서로 만나 더 의미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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