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세대가 본 논어 1
배병삼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배움 : 공자의 호학(好學)



인생의 책을 한 권 꼽으라면, 그리고 누군가에게 반드시 추천을 해준다면 그것은 바로 논어. 논어는 가볍게 넘기는 책이 아니라는 생각에 필기를 하며 꼼꼼하게 읽었다. 논어는 많은 것을 바꾸어 주었다. 말을 할 때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더욱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공자에 대해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울러 동양철학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9월 한 달 동안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논어 한 권이라면 9월은 충분했다. 작년 12월부터 읽기 시작한 책의 여정이 논어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논어는 그만큼 가치 있는 책이다.







1) 배움의 자세 : 호학



논어 1편인 ‘학이’에서 마지막 ‘요왈’에 이르기까지 공자가 계속 강조한 것은 ‘배움’, 즉 호학의 자세이다. 오히려 공자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보다도 더 자주 등장한다. 공자는 스스로를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세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기 마련이라며 배움의 자세를 강조했다.





1-01-1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20-03-3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하는 법. (不知言, 無以知人也)





우리는 계속 ‘공부’한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배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공자가 말하는 호학이란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仁)이며, 서(恕)와 충(忠)을 의미한다. 남을 의식하며 내 몸을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 하는 공부(爲人之學)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의식하며 스스로를 수양하는 공부(爲己之學)이다.







2) 잘못된 유교사상의 폐해 : 공자는 잘못이 없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기업 문화, 국가 조직 등에 대해서 그 탓을 ‘유교사상’으로 돌린다. 유교사상으로 인해 위아래 질서가 뚜렷하다, 복종의 문화가 있다느니, 등등. 그러나 과연 공자는 그렇게 말했을까?공자는 무조건 위에 복종하라고만 했을까?



11-23-3

이른바 ‘대신’이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안 되면 곧 그만두는 존재인데, 지금 자로와 염유는 구신이라 이를 수는 있겠지요.



12-23-0

자공이 벗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곡진하게 깨우쳐주고 잘 이끌어주되,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 관계지. 욕을 자초할 것은 없을 터이므로.



그렇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끊을 수 없지만, 임금과 벗을 대하는 관계는 끊을 수 있는 관계이다.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치에 어긋나려 하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되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알려주되 고치지 않는다면 ‘쿨하게’ 가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3)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냐는 질문에 공자는 인(仁)을 행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애매하게 대답하지 않는다.공자의 대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12-07-0

자공이 정치를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경제를 넉넉히 하고, 안보를 튼튼히 하며,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지.

자공이 말하였다.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이 셋 가운데 무엇을 앞세우리까?

말씀하시다. 안보를 버려야지.

자공이 말하였다. 만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나머지 둘 가운데서 또 무엇을 앞세우리까?

말씀하시다. 경제를 버려야지. 예로부터 죽음은 다 있게 마련이지만, 백성이 믿어주지 않으면 (공동체는) 성립하지 못하는 법이니.





16-01-8

내 듣기로, 국(國)이나 가(家)를 경영하는 자는 (생산량이) 부족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분배가) 고르지 않음을 걱정하며, 또 가난이 아니라 (사회의) 불안을 걱정한다더구나. 대개 균등하면 가난한 줄 모르고, 화목하면 부족한 줄을 모르면, 평안하면 나라가 기울 수가 없는 법이니.





백성에게 믿음을 주는 것, 분배가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 현재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국가를 믿고 있으며, 분배가 균등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우리의 상황은 좋지 않다. 국민은 국가를 믿을 수 있고, 분배가 고르게 이루어지는 곳.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일. 이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도 논어를 다시 읽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 정약용과 노키즈존

 노키즈존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공공장소나 식당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않는 부모들이 늘어가고 있어서 결국 아이들을 받지 않는 곳이 생겨난 것이다. 친구 같은 아빠, 친구 같은 엄마가 대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지.엄마나 아빠가 친구가 된다면 아이들의 잘못은 대체 누가 알려줄까? 집에서 혼내지 못해서 학원으로 혹은 학교로 이 역할을 떠넘기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우리 가족이 아닌 ‘남’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제대로 아이들을 혼내줄까?


명시해 두어야 하는 것은 친구는 친구. 부모는 부모. 가족은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사회적 집단인데 여기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면 학교나 회사에서는 어떻게 될지.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정약용을 읽어야 한다. 아버지인 그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것도 멀리 유배를 가서 보내는 편지. 정약용이 말하는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지.


 존경하는 인물을 말하라고 할 때, 자신의 부모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친구 같은 부모보다는 존경할 수 있는 부모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스승과 제자가 된다면, 그래서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1. 학자 정약용 : 공부해라, 아들아.

왕에게 사랑을 받아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유배를 가게 되었다. 집안은 폐족이 되었고, 공부할 마음은 당연히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오신다. 그것도 자주!



“공부하고 있니?”

“오늘은 무슨 책 읽었니?”

“내가 지난번에 말한, 그 책 읽었니?”

“폐족이라고 공부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려고!”



위 상황은 정약용의 편지를 받은 아들의 마음을 가정한 것이다. 정약용의 심정은 백번 이해한다. 폐족이 된 상황에서 아들이 책을 손에서 놓을까봐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이쯤되면 정약용을 대치동 엄마에 버금가는 극성 학부모라고 볼 수도 있겠다.그러나 정약용은 아들이 장원급제해서 자신의 한을 풀어주기를 바란 것 같지는 않다.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의 입장에서 책을 들춰보지 않는 아들이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워 보일까. 정약용은 아들에게 단순한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1) 폐족도 성인이나 문장가가 될 수 있다 + 경전 공부에 대하여

너희들 편지에 군데군데 의심이 가고 잘 모르는 곳이 있어도 질문할 데가 없어서 한스럽다고 했는데 과연 그처럼 의심이 나서 견딜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적어서 인편에 부치지 않았느냐? 아버지와 아들이면서 스승과 제자가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2) 독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 내리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천번 백번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릇 독서할 때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2. 아버지 정약용 : 바르게 살아라, 아들아.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바르게 살아라.” 아버지 정약용이 아들을 위해서 하는 말들은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왜 우리 친척 중에는 그 흔한 국회의원이니, 의사니, 경찰이니, 법조인이니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일까? 결국은 신세타령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친척들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입장이 아니라 빚보증만 서달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척 중에 내세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자라면서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이 더 서글퍼졌지만.

 폐족이 되어 미래가 암담한 아들에게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아버지 정약용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길을 보여줄 뿐이다. “너에게 있어서 옳음을 지켜라.”



(1)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도와주라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기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오기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삶의 두 가지 큰 기준 + 용기와 노력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경우이다.



무릇 하나의 하고픈 일이 있다면 그 목표되는 사람으로 한 사람을 정해 놓고 그와 같은 사람의 수준에 오르도록 노력하면 그런 수준에 이를 수 있으니, 이런 것은 모두 용기라는 덕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해를 꼭 풀어야 하나요?


선생님의 유서가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왜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는지. 이미 죽은 사람으로 마음 먹고 계속 살아가고 있는 선생님. 그리고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의 친구 K.


 

-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어.

 


사실은 별일 아니었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친구 K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 죽었다 하더라도 선생님은 그를 잊고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항상 나의 의지대로 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이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실천하지 못했고, 결국 내 마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살아가면서 안타까운 것은 나의 마음을 입으로 혹은 행동이나 글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누군가 알아채주었다면.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듯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얘는 이래서 그런 거야, 라고 말을 해주었더라면.




그러나 나의 행동은 많은 오해를 불러왔으며, 나는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아, 오해야. 라고 해명을 했다. 아니면 그런 오해를 불러오지 않으려 `착하게` 행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행동마저도 번거로워졌다.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사이는, 그런 사이. 어떻게 노력을 해도 그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런 사이. 그래서인지 사람을 만나는 일이 꺼려진다. 만나도 기분이 좋거나 오해가 없는, 아니 오해가 있어도 결국은 풀리는 사람만 보게 된다. 

 

나도 선생님처럼 될까봐 두렵다.   



-나는 적막했어. 이 세상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었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간다는 것은 권태의 연속

-그녀는 과연 누구를 사랑했을까?

 

 

엠마는 세 남자를 만난다. 남편인 샤를, 레옹, 로돌프. 그녀에게 사랑은 불타는 무엇이었고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그 무엇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왜!

 

 

왜 삶은 권태의 연속인 것일까?


 

그렇다. 삶은 권태의 연속인 것이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어떻게 삶이 매 순간 짜릿하고 황홀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영화나 연극에서처럼 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지만, 사회에서 역사에서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저 그런 보통의 사람.


 

권태의 끝. 결국 엠마는 스스로 권태를 끝내게 된다. 그녀는 과연 누구를 사랑했을까, 정말 사랑하긴 했을까?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를 너무 사랑했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환상에 집착했으며 그 안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혹은 전혀 사랑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은 안정감을 주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권태를 준다.

 

 

지금의 나도 권태에 빠져 있다. 권태에 익숙해지거나, 어쩌면 다른 형태의 권태로 바뀌거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구의 시간

가구를 만져본다 언제 샀더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흠집하나하나 전부 시간의 흔적이다. 박형준의 시는 가구처럼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의 순간을 슬퍼하지도 조바심내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