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시적 발전은 한국의 현대시 50년의 핵심적인 실패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초기시의 특징은 한쪽으로는 강렬한 관능과 다른 한쪽으로는 대담한 리얼리즘을 그 특징으로 했다. 이것은 육체와 정신의 필연적인 갈등,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시에 있어서의 종교적인 또는 무속적인 입장은 그 직시적(直時的)인 구체의 약속으로 그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켰다. 서정주는 매우 고무적인 출발을 했으나, 그 출발로부터 경험과 존재의 모순과 분열을 보다 넓은 테두리에 싸쥘 수 있는 변증법적 구조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것들을 적당히 발라 맞추어 버리는 일원적 감정주의로 후퇴하였다. 그 결과 그의 시는 한국의 대부분의 시처럼 자위적(自慰的)인 자기 만족의 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여, 서정주의 실패는 한국 시 전체의 실패이며, 이것은 간단히 말하여 경험의 모순을 계산할 수 있는 구조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이다."

 

지금은 인문학자로 나아간(?) 김우창(1936~)의 '한국 시와 형이상'이라는 글에서 발췌한 대목이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예컨대 '서정주의 실패는 한국 시 전체의 실패'라고 단언하는 대목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된다. 한 사람의 문학적 역량의 높고 낮음을 문학사 전체의 성패 여부와 관련 지으려는 판단은 성급하다)도 있으나 서정주 문학 세계의 성취와 한계를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 판단된다. 무엇보다 그의 시가 (말 그대로 현실의 온갖 부분들을 싸안으려는) 복잡한 구조를 개척하고 지향하려는 험로를 포기하고 자기만족과 자기위안의 비단길로 퇴행하려는 후기의 경향을 지적하는 부분은 날카롭다.

다만, 문학 편력의 초창기에 나왔던 이 책이 김우창 평론의 절정이자, 끝이라는 생각도 든다. 김우창은 한때는 예기와 투지가 넘치는 평론가였으나 필봉을 문학 이외의 영역(철학, 사회학 등등)으로 돌려서 인문학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순간부터, 범박한 수준의 이론가에 머물고 만 느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최근의 김우창이 '좀 더 현학적이고 학술적인 이어령' 같아 보인다. 후카시 잡고서 그럴듯한 말은 많이 하는데 실속은 별 거 없는 말글을 풀어놓는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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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2017-09-2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너무 긴 전집에 대해서는 마지막 대담 권들을 권해드립니다. 학문이 혼자 세우는 게 아니라 사이에서 나온다고 할 때 김우창의 진면목이라고 할 것을 저는 대화에서 봤습니다. 더 별거 없는 한국 학자들에 비해 솟아오를 때도 그렇고, 가라타니고진 로티 등 외국의 학자들 앞에서 어떻게 막히느냐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김우창 이어령 등 어르신들을 한명한명 평하는 데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다맨 2017-09-23 08:03   좋아요 0 | URL
로티와 나누었던 대담은 언젠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기억은 잘 안 나네요. 어쨌거나 대담집은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누군가를 평하는 데서 벗어나라‘라는 군자님의 주문은 과도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초창기 문학평론가로서의 김우창은 흠결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나 중후반기 사상가로서의 김우창은 (다방면에 있어서 적확하고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점은 존중할 만하나)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 한에서만 자신의 담론과 진단을 풀어 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저는 김우창이 말하는 ‘심미적 이성‘(이것은 아마도 메를로 퐁티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아는데)이라는 개념이 공허하게 느껴지더군요. 물론 그가 일구어낸 사유의 틀과 지평은 후학들에게 이론적 양분을 제공하고, 학문하는 방법론에 대해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김우창을 사상가나 전천후적 인문학자가 아니라 (한국에서 ‘근대‘라는 이름이 붙은 학문들의 기초를 세우는 데 주력한) 후학들의 선생님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저는 김우창이 창조적인 건축가가 아니라 수집가이자 수입상에 가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쨌거나 얘기가 길어졌군요. 군자님이 추천하신 책은 읽어보겠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자 2017-09-27 12:01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대댓글 감사합니다. 어르신들을 평하는 데서 벗어나자는 말은 물론 수다맨님의 김우창 평에 제가 모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저자신 오랫동안 생각한 내용이라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궁핍한 시대의 시인>에 들어있던 윤동주 시론과 최근까지도 김우창이 쓰고있는 서정주 평론에서 제가 배운 것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김우창은 드물게도 윤동주가 미숙한 시인이었다는 인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서정주가 달관으로 가는걸 일찍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평론으로 한 일은 그들이 왜그랬는지를 한국의 상황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었죠. 그뿐입니다. 수집가와 수입상의 역할자체가 각자의 가치가 있을뿐더러 제 소견은 김우창의 역할이 그와 같지는 않고 부족할지언정 비평가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