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회화에 투영시켜 생각해 보면 근대문학을 특징짓는 주관성이나 자기표현이라고 하는 발상 자체가 세계는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파악된 것이라는 사태와 대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하학적 원근법은 객관뿐만 아니라 주관까지 만들어내는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산수화가가 묘사하는 대상은 하나의 주관에 의해 통일적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 하나의 (초월론적) 자기라는 존재는 없다. 문학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투시도법과 같은 화법이 성립하지 않는 한 근대적인 '자기표현'이라는 관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2쪽.


다시 말하면 주위의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내적 인간'에 의해 처음으로 풍경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풍경은 오히려 '외부'를 보지 않는 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37쪽.

미가 감각에서 연유하고 또한 사물의 '합목적성'의 발견에 의한 것인데 반해, 숭고는 사람을 압도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에 의해 발생한다. 42쪽.

나는 풍경이 실제의 (미적인) 대상을 거부하는, 또는 대상에 전혀 무관심한 '내적 인간'에 의해 발견된다고 말했다. 구니키다 돗포는 그러한 전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전도는 숭고가 대상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생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그것이 불쾌한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 자체가 미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와 같은 풍경을 묘사한다. 그것이 리얼리즘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낭만파적인 전도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42쪽.

우리들이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이미 내적 풍경 그 자체이며 결국 '자의식'인 것이다. 47쪽.

프로이트의 생각으로는 유머란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 초자아(어른)가 그런 건 별거 아니라고 격려하는 식의 것이다. 자기 자신을 메타레벨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의 고통이나 고통 속에 있는 자기를 (때로는 미시마 유키오처럼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멸시함으로써 가능한 고차원적인 자아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낭만적 아이러니와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러니가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에 비하면 유머는 왠지 그것을 듣는 사람도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93쪽.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고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 의지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결코 참회가 아니다. 고백은 나약해 보이는 몸짓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우치무라 간조는 '나는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진실이 있다. 고백이란 이런 것이다'라면서 '너희들은 진실을 감추고 있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최소한 진실을 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실'이란 사실은 아무도 두말 못하게 만드는 권력이다. 123쪽.

국가 정치의 권력과 자기나 내면에 대한 성실함을 대치시키는 발상은 '내면'이야말로 정치이자 전제 권력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일이다. '국가'쪽에 선 사람과 '내면' 쪽에 선 사람은 서로 보완하는 관게에 지나지 않는다.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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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이 순조롭게 읽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고진의 글에는 기기묘묘한 이론적 곡예나, 현학에 도취된 난해한 문장이 별로 없다. 때로 그의 글이 어렵게 읽히는 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극이 넓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들이 A라는 대전제를 말한 뒤 A-1과 A-2, A-3을 차례로 열거한다면 고진은 A를 말하고는 곧바로 A-2로 가거나, 혹은 B라는 또 다른 전제로 도약해 버린다. 이것은 그의 글이 지닌 고유한 스타일이면서 한편으로는 난해성의 혐의를 어느 정도 띨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진의 글은 오늘날 한국에서 평론이라는 이름으로 써지고 있는 다수의 글보다는, 훨씬 쉽게 읽히며 도저한 통찰들을 간직하고 있다. 고진은 확실히 표면적 현상의 심층으로 들어가 우리가 망각하고 은폐해 왔던 기원을 추적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언제나 생각해볼 거리들을 독자에게 한가득 던져준다. 그야말로, 진짜 비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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