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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그려진 얼굴들 - 현대세계시인선 1
니까노르 빠라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선언문 낭독
니까노르 빠라
신사 숙녀 여러분
마지막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씀을-
시인은 이제 올림피아 산정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선배들에게
시는 사치품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필수품입니다
우리는 시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대단히 정중하게 말씀드리거니와-
선배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시인은 모든 사람처럼 평범한 인간일 뿐이며
담벼락을 손수 쌓는 미장이며
문짝과 창틀을 손수 짜는 목수라는 것을.
우리는 매일매일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마술적인 기호를 믿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시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무가 삐뚜로 자랄까 걱정되어서입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조물주의 폼을 잡는 시인을 고발하며
바퀴벌레 같은 시인
도서관의 쥐새끼 같은 시인도 싫어합니다
-대단히 정중하게 말씀드리거니와-
이런 모든 분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허공에다 성을 쌓아 올린 죄와
달빛 아래 소네트 쪼가리를 이어 맞추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마구 낭비한 죄
그리고 파리의 최신 유행에 맞추어
단어를 제멋대로 나열한 죄로
혼이 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은 입술에서 태어나지 않고
심장의 심장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색안경을 걸친
시를 거부합니다
망토와 칼을 찬 시와
유난히 챙이 큰 모자를 쓴 시도 싫어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눈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시와
가슴을 활짝 연 시
그리고 머리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시를 환영합니다.
우리는 바다에 산다는 요정이나 괴물 따위를 믿지 않습니다
시는 모름지기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삭으로 둘러싸인 소녀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무엇이.
그건 그렇고, 정치적인 면에서
우리 직계 할아버지가 되시는 그분들은,
훌륭하신 그 할아버지들은!
수정의 프리즘을 통과할 때
굴절되어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몇 사람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데
정말 그랬는지 나는 확실히 모릅니다.
공산주의자가 있었다고만 추측할 뿐입니다
한 가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민중의 노래를 모르는 시인들은
경건하신 부르주아 시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물은 원래의 그 모습대로 말해져야 합니다
단지 몇 시인만이
민중의 심장에 도달할 줄 알았습니다.
다른 시인들은
전진하는 시에 대항하여
현재를 논하는 시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 시에 대항하여
입술과 몸으로 싸울 것을 선언했었습니다.
공산주의자였다고 받아들여도
그들의 시는 일종의 재앙이었습니다
중고품 초현실주의
중고품의 중고품 데까당스
바다를 돌고 돌아 다시 온 낡은 패러다임들.
형용사적인 시
코와 목구멍에서 뱉어 낸 시
자의적인 시
몇 권의 책을 베겨 낸 시
언어의 혁명과
이념의 혁명으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명제 아래
발이 묶였던 시.
악순환의 시.
선택받은 열 명도 되지 않을 사람을 위한
「표현의 절대 자유」
무엇을 위해 그런 글들이 씌어졌는가?
우리는 오늘 그런 질문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게 됩니다
쁘띠부르주아를 놀래 주기 위해서?
아, 가엾게 낭비된 시간이여!
쁘띠들이 꿈틀 댈 때는
거짓과 위선을 말할 때뿐임을
귀하께선 아직 모르십니까?
시를 가지고 어떻게 그들을 놀래 준단 말입니까?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황혼의 시와
밤의 시에 넋이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새벽의 시를
제의합니다
시의 광채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메시지입니다
동료 여러분,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대단히 정중하게 말씀드리거니와-
작은 신의 시와
성스러운 암소의 시와
성난 황소의 시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바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시를 버리고
우리는 단단한 흙의 시를 쫓아가렵니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을 지닌
단호한 흙의 숭배자로서-
카페의 시를 버리고
자연의 시를
살롱의 시를 버리고
광장의 시와
사회 저항의 시를 쫓아가렵니다.
시인은 이제 올림포스 산정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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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이 다시 복간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