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우선 이 책을 당장에 접하기 어려운 분들이라면 경향신문에 실린 박가분의 인터뷰를 읽으라 권하고 싶다. 며칠 전 폴리뉴스에 실린 서평도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의 압축적 설명이 나오는 인터뷰가 내 생각에는 더 괜찮고 미더워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베의 사상을 가리켜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고 요약한 뒤, "자신의 이상에 관한 환멸을 견뎌야 한다(247쪽)"는 전언을 일베에게, 더 나아가 우리 모두와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일베란 무엇인가?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그것은 독일의 네오나치나 일본의 넷우익과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첨언하자면 한국의 극우인 조갑제/지만원 패거리와도 더더욱 구분돼야 한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자가 좌절된 인정욕구를 가지고 타인(이주 노동자, 재일조선인 등)을 표적삼아 정치적 행동(시위, 성명서 발표 등)을 직접적으로 전개한다면, 후자는 (르상티망이나 동정적 정서 없이) 스스로를 강한 자라고 인지하며 타인(여성, 진보세력 등)을 희화화하는 일에 굉장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베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생겨난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일베의 직접적인 탄생 배경과 사상적 본질을 꼼꼼히 추적해 나간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베는 (어느날 난데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안에서 원래부터 존재했던 병맛 문화, 관심병 문화, 신상털기(220쪽)" 등에서 이미 맹아를 틔우고 있었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바로 "부정적인 호수성(220쪽)"이다. 이것은 인터넷 특유의 상호 인정방식으로, 예컨대 짤방이나 콘텐츠를 서로 증여하고 답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이러한 호수적(互酬的) 교환방식을 통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면서,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평등한 공간을 만든다(사실 이러한 부정적 호수성은, 인용에 기반한 진보 논객들(강준만, 진중권 등)의 위악적 글쓰기 방식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호수성에 힘입어 일베는 '모두가 우스운 인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강령을 내세우게 된다. 이들은 단순히 서로를, 타인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른바 공인된 역사적 의의(예컨대 5.18 광주민주화 운동)를 부정하고 모욕하는 차원으로까지 비약한다. 이러한 문제는 앞서 말했던 "부정적 호수성"만으로 해석하긴 어렵다. 여기서, 저자는 일베를 가리켜 "(2008년) 촛불시위의 몰이상적인 반동에서 나온 것(215쪽)" 같다는 진단을 내린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촛불과 일베는 쌍생아'다. 더 자세히 말해, 당시의 촛불이 스스로를 민주주의 세력이라 칭하며 국가에게 실현 불가능한 것을 요구했다면(이명박 하야 및 탄핵, 소고기 협상 완전 철회 등), 일베는 자신을 애국보수라 칭하며 확실히 공인된 사실(5.18은 민주화운동이다)이 날조된 것에 지나지 않다며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촛불과 일베 둘 다 '몰이상'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것이 또다른 이상주의적 태도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둘은 '욕망의 정치'가 배태한, 가망 없는 이상주의를 꿈꾸면서도 "사회적 적대와 모순을 표현할 수 없는 통로가 없다는 사실에 고통 받는(235쪽)" 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도발적인 주장을 내린 뒤, 저자는 (일베에게 향했던 메스를 돌려서) 진보 진영, 여전히 촛불 시위의 카니발과 환상에 잠겨 있는 이들을 질타한다. 그는 카니발적/문화적 행사(토크쇼, 콘서트 등)가 아니라 축제의 열기가 가신 뒤에도 "개인들을 (집회의 대의에) 연루시킬 수 있는 기획(251쪽)"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 대목은 사실 2011년 지젝이 월가 시위대에게 외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이혼했다"라는 연설문과도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그 당시 지젝은 카니발은 싸구려가 될 거라며 냉정하게 지적한 적이 있다).

  저자는 "일베의 사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난날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자기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을 바꿔야(241쪽)"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 말은 국가 권력을 변화(혹은 탈취)하는 데만 주안점을 두고 일상의 관계나 의식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던, 우리 모두를 겨누는 뼈아픈 직언이다. 사실 그가 결론에서 제시하는 말들은 (원론적으로는 타당하지만) 그다지 새롭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사회적 안전망을 새롭게 짜야한다는 것, 상호부조와 연대의 가치를 모두가 경험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결론부에 나오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유독 인상 깊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사상과 이념이 실패할 때 이보다 더 근원적인 공동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247쪽)" 나는 이 부분에서 박가분이라는, 나와는 동세대인 저자가 예전보다 명백히 진화했다는 걸 느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실감신앙(그 옛날 좋았던 공동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구, 일테면 이문구의 "관촌수필" 같은 소설에서 빈번히 나오는 욕구)'과 '이론신앙'이 주는 달콤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우상도, 이상도 없는 세계에서 무언가 변화를 꿈꾸는 자라면 카니발에 들뜨기 보다는, 오히려 쓰디쓴 환멸을 감수하면서, 그래도 조용히 전진해야 한다는 점을 강변하고 있다(이 대목은 루쉰의 단편 '죽음을 슬퍼하며'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동을 나에게 전한다).

  저자의 인문학적(?) 블로그인 '붉은서재' 초기의 글들과 지금의 글들을 비교해 본다면, 그의 문장은 지극히 평이하고 투명해졌다. 과거와 다르게 생경한 개념이 노출되는 빈도나 문장을 늘여서 쓰는 습관이 극도로 줄어들었으며, 본인이 확실히 숙지한 개념을 친절하게 풀면서 현상의 본질로 파고드는 솜씨는 전보다 더욱 노련하고 훌륭해졌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어려움, 일본의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한 것처럼 "추상적인 사고와 구체적인 삶에 대한 실감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동요(246쪽)"를 그 역시 느끼는 듯하다. 어쩌면 그가 겪을 어려움과 괴로움은 갈수록 심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저자의 열정과 패기를 믿고 싶다. 깊이와 박력이 있는 글을 써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정치하고 예리하게 분석해준 저자의 노고에 새삼 경의를 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