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엘리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자신들의 일원이 아닌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계급"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분리하고 구별지어 주는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엘리트들은 훨씬 더 "잡식성"이어서, 사회적 경계나 차별점들을 꽤나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들을 문화적으로 구성해 낸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배제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그들이 가진 힘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데서 생겨난다. 엘리트들을 엘리트로 특징짓는 표식은 단일한 관점이나 단일한 목적이 아니라, 사회계층 전반에서 (나오는 것들을) 고르고 선택하고 결합하고 소비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인텔리 속물(고급문화만을 향유하려 하는 인텔리층)"은 이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자리를 대체한 건 상류 문화와 하류 문화,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소비하는 범세계적인 엘리트이다.

그들은 세상 어디에 있든 편안해 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사회 엘리트들에게 이런 잡식성 다원주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귀족적인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건 영국 여왕과 함께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지만 동시에 맥주 한 잔을 놓고 접이식 의자에 앉아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편안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ㅡ 셰이머스 라만 칸 "특권" 281~282쪽



저자는 과거의 특권층이 일종의 배타적인 귀족주의를 보였다면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잡식성 다원주의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전자는 가시적인 장벽을 세워서 엘리트와 비엘리트를 구분했다면 후자는 외관상으로는 벽을 허물어서 공생공락의 미덕을 강조하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벽을 구축해서 여전히 경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각주에도 나오지만, 오바마와 문재인 같은 일국의 지도자들은 일반 서민들과 함께 맥주 미팅을 갖는 장면을 종종 연출한 바 있다. 이들은 과거의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권위적(백악관)이거나 폐쇄적(궁정동 안가)인 공간에서 과감히 나와서 자신도 일반 서민들과 다르지 않으며 누군가를 함부로 배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한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2010년경에 "진보집권플랜"의 공동저자였던 조국 교수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피씨방에 들러서 트위터로 다수의 네티즌들과 열띤 소통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이날 조 교수는 3000명이나 되는 네티즌들로부터 팔로워 신청을 받았고 트윗을 통한 대화는 약 75분 동안 이어졌다. 

저자인 셰이머스 라만 칸의 견해에 따르자면 우리 시대의 엘리트는 일견 개방적이고도 민주적인 이들로 보이며 나아가 평등화라는 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들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접근 기회와 가능성은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져 있지 않으며 도리어 일부에게 편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언론인/교수 같은 이들이 대중문화(SNS, 유튜브, 치맥 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거기에 편안감과 즐거움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면 일종의 착시 현상이 생긴다. 이곳은 기울어진 운동장이자 장벽이 세워진 벌판인데 저들이 모두의 친구이자 아군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특권이란 일반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접촉하게 되는 지배층/상류층의 어떤 표식(자산가 부모, 고스펙, 고학비, 인맥, 학맥, 증여 등등)을 뜻한다. 엘리트와 기득권은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배타적인 서클이 아니며 오히려 민주적인 집단이라고, 아이돌의 음악도 들을 줄 알고 온라인 상에서의 소통도 할 줄 알며 서민적인 식당에 들러서 다른 이들과 소주잔을 부딪칠 수 있다고, 이처럼 개방되고 평등한 세상 안에서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여기서 상술했던 이들이 가졌던 표식은 희미해지면서 저들은 노력해서 출세한 재능 있는 사람들이자 포용성과 개방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시각이 생겨난다. 그리고 (실제로 공정하지도 않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님에도) 공정과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부상해서 엘리트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사용된다.

이제 삼 분의 이쯤 읽은 셈인데, 이 책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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