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내 수중에 들어온 책은 결말을 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내 취향껏 고른 책이 아니라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데다가 읽는다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세 다른 책으로 넘어가버리기 때문이다.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는 한(책장 정리라는 최소한의 이유라도 있지 않는 한) 그 끝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 <행성 대관람차>는 받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펼쳐들었다. 팬톤이 뽑은 2018 올해의 컬러 보라색이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표지, SF 장르 다운 <행성 대관람차>라는 제목, "지구에서 화성으로 우주선이 계속 오고 있기는 한 거죠?"라는 뒤표지의 카피. 흥미를 자극할만한 요소들의 조합에 손이 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용마저 괜찮아서 책을 다 읽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기존의 SF 장르들과는 조금 다른 색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SF 소설이라고 하면 대개 허를 찌르는 반전과 독특한 세계관으로 감탄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낯선 세계에 매료되고 속도감 있는 전개에 푹 빠져든다. 그리고 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어떠한 깨달음이 오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에 비해 <행성 대관람차>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세계관에 이야기 전개는 지극히 여유롭다(가끔 늘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심지어 몇몇 반전은 알고 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성 대관람차>는 매력적이다. 먼저 이미 여러 권의 소설집을 냈다는 작가는 그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해 첫 시작을 연다. 화자가 자신을 괴롭힌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시작하는 "천사가 앉았던 의자", 뜻깊은 행사의 기념사로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독자들은 모르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달라며 시작하는 "전송절 기념사", '최면치료소' 앞에 서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망했다" 등 작품 하나하나가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열심히 끝을 향해 내달리는 대신 여유롭게 진행된다. 어딘가 맥이 풀리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독자 개인의 상상력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틈들이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 대신 독자들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독자가 함께 만드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게다가 마지막의 반전. 상상 그 이하를 보여준다고 할 정도로 허탈한 반전은 독자들의 기대감을 채워주는 대신 독자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아니, 이렇게 돼야 더 재미있지!'라는 생각에 상상은 더욱 멀리 뻗어나간다. 그렇게 한 편의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나면 다시 원래의 결말이 곱씹어진다. '아아. 그거 말 되네.' 또는 '음. 이것도 나름 괜찮은 결말이야.'라고. 친절한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각각의 이야기를 쓰게 된 사연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는데, 이 역시 다시 한 번 결말을 곱씹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기존 SF 소설들에 붙는 흥미롭다, 독창적이다, 스릴 있다 같은 수식어는 이 책에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행성 대관람차>는 자신만의 수식어를 가진다. 이르자면 독자들의 상상과 감성을 자극하는 '감성 SF'랄까. 여유로운 전개 속에서도 이따금 그 존재를 드러내는 날카로운 시선과 위트, 이성대신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어루만지는 여유로운 이야기, 막연한 미래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어'라며 공감하게 되는 결말. 이런 작품을 쓴 작가도, 이런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도 모두 다음이 기대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