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
니나 리케 지음, 장윤경 옮김 / 팩토리나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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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이고 암울하고 고통에 가득 찬 이야기는 듣는 이를 지치게 만들기 마련이다. 아무리 남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도, 공감 능력과 이해력, 포용력이 높은 사람도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듣다 보면 그 자신의 감정과 생활마저 무너져버리게 된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감정은 예고 없이 뒤집어쓰게 된 구정물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게 물들여 버린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를 거부하라고 남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관련 영상과 책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기만의 울분과 슬픔과 분노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나기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폭발할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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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의 주인공 엘렌은 강도 높은 감정노동을 겪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잘나가는 동네 의사인 그에게는 굉장히 다양한 환자들이 찾아온다. 치질과 항문 가려움증으로 찾아온 사람부터 심리상담사에게 가져갈 소견서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 건강과 관련된 노력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진료만 받으러 오는 사람, 귓속에 습진이 있거나 다리나 손, 목 등이 아픈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증상과 이유로 사람들은 병원을 찾아 엘렌의 앞에 서고, 엘렌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필요한 조언을 하거나 처방을 내려준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을 쏟아내길 원한다는 것이다. 엘렌은 책의 초반부터 말한다. "환자들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천천히 접근하라고, 현재에 만족하며,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등의 조언을 결코 귀담아듣지 않는다."(12p)라고.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의 말을 뒷받침해 준다.


하루 열 시간을 일하며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그가 긴장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와인을 마시며 드라마를 보는 것. 하지만 이 역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가 경각심을 느낄 정도로 너무 많은 술을 마시고 있으며,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콜 중독. 여기서 더 큰 불행은 그런 그를 말려주고 보살펴줄 수 있는 남편은 매사에 무심한데다가 엘렌 못지않은 스키 중독이라 저를 보호하기 위해 엘렌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사는 지역의 문화는 또 어떤가. 겉보기에는 자유롭고 포용력 있는 곳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규칙이나 관례가 없이 모두가 평등했으나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규칙들이 있었다. 다른 문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 정원을 정돈하거나 집 안을 깨끗하게 치우는 등 일상에서 긴장감을 가지거나 여유 없는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는 것, 약속에 대해 예민하게 굴면 안 된다는 것 등 보이는 규칙보다 더욱 숨 막히는 규칙들이 존재한다. 엘렌은 그 규칙에 긍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제법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이 터져버릴 것 같은 환자들과의 시간, 보이지 않는 여러 규칙과 직업상의 이유로 스스로에게 행하는 억압, 권태로운 남편과의 관계, 하나도 힘든데 이 모든 것들이 섞인 엘렌의 일상은 평탄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최악에 가깝다. 그리고 더욱 최악은 남편과 결혼하기 전 만났던 옛 연인과 재회하게 된 데다가 그와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엘렌은 제목 그대로 '바람난 의사'가 된다.


과연 새로이 시작된 관계는 그를 어떤 길로 이끌어나가게 될까. 끊임없이 찾아오는 환자들과 지역 주민들, 그러니까 미친 이웃들을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 같은 그의 생활은 바뀔 수 있는 걸까. <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은 엘렌에 대한 걱정과 답답함과 이해심과 배신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안고 끝까지 달려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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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엘렌이 바람을 피운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바람을 피운 데에 어떤 변명이 더 필요할까. 그는 무조건 유죄였다.


하지만 그가 받고 있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와 그가 자라온 환경과 그를 둘러싼 환경들을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냐고 붙잡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 한편에는 등짝을 한 번 세게 내리치고 그의 곁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를 구제하거나 도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최악으로 달려나가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연민만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시종일관 시니컬한 말투로 환자들과 스스로에 대한 어리석음을 토해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에 뜨끔하기를 몇 번이었다. 게다가 그는 수없이 노력했음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체념하고 포기하면서도 묵묵히 성실하게 제 역할을 해나갔다. 그에게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규칙이나 규율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간섭과 애정을 쏟아낼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엘렌의 이야기와 그가 오랜 세월 여러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얻은 날카로운 시선은 예민하고 병들어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주었다.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와 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게나마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는 스스로를 긍정하게 해주었다. 그동안 스스로 실망스러웠던 모습을 떠올리며 후회하고 괴로워했다면, 지금은 '속으로 욕 좀 하면 어때. 말과 행동이 좀 다르면 어때. 그게 뭐가 대수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물론 이게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유쾌한 제목으로 인해 가볍게 봤다가 (긍정적인) 뒤통수를 맞았던 책 <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 스스로에 대한 긍정과 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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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제공 받아 자유롭게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리 모두는 돌려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긴다. - P42

요즘 보면 자기가 특별히 예민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더라. 그런데 사실 특별히 예민한 사람은 없어. 우리는 모든 예민해. 그 예민함 덕분에 종일 두려움에 떨지. - P169

나는 인간들을 향해 끊임없이 비웃음을 날린다. 그중에서도 나라는 인간을 가장 많이 비웃는다. 내 자신과 내 생각을 비웃는다. 보고만 있어도 우습다. 여기서 우스꽝스러운 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누가 웃는 걸까?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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