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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내가 주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김삼환 지음, 강석환 사진 / 마음서재 / 2021년 4월
평점 :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부터 부쩍 시간의 흐름에 민감해진 기분이다. 마냥 학생일 것 같았던 시기를 지나 밥벌이를 하며 온전히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시기가 되니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진해지면서 하루하루가 가슴에 묵직하게 얹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별이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실감한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더욱 짙어진 주름과 염색으로 다 가리지 못할 정도로 늘어난 흰머리를 하고 계신 부모님, 기력이 떨어지고 등이 굽어 걸음이 점점 더 느려지신 할머니들을 보며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내 소중한 사람들을 볼 수 없는 시기가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까. 잠깐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들어간다.
<사랑은 내가 주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이별의 아픔을 앓게 된 저자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내고 새로이 용기를 얻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산산조각 난 일상을 떠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또 생전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머나먼 땅 우즈베키스탄까지 떠나간 그의 여정과 사유가 이 책에 담겨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떠나서 돌아오기까지 내가 어떻게 눈물을 이겨냈는지, 그 방법과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7p)"
저자의 기록은 시간순으로 이어지는 대신 크게 네 가지 주제로 정리되어 있다. 그 안에는 먼 길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먼 길 떠나 홀로 채워간 삶과 그곳에서의 경험, 함께 또 홀로 걸으며 길 위에서 보낸 여정,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의 사유가 섬세하게 담겨있다.
첫 번째 기록 "나는 떠났다"에서는 이별의 아픔을 안고 떠나 먼 이국 땅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까지의 여정을 들려준다.
아내가 떠나고 "감정적인 동요가 티끌만큼도 일어나지 않(19p)"는 봄을 맞은 저자는 괴로움을 피해 걷고 또 걷다가 코이카 국제봉사단 교사 한국어 교사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다. 생전 아내가 함께 하자던 한국어 교육 봉사를 하기 위해 홀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를 거쳐 서부 사막도시 누쿠스로 향하고, 그곳에 적응하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나간다. 낯선 곳에서의 낯선 경험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밀려오는 고독과 고통을 어루만지는 법을 익히면서 그의 사유는 더욱 깊어진다.
두 번째 기록 "나는 그리워했다"에서는 급작스러운 이별과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에 대해 들려준다.
즐거웠던 여행길,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쓰러진 아내가 다시 눈을 뜨지 못했던 순간을 되새기며 저자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자고 마음먹는다. 그다음은 하늘의 뜻에 맡길 뿐(100p)"이라고 말하는 한편, 가만히 있어도 흘러넘치는 추억과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그리움은 아내에서 시작해 어머니와 지난날의 인연들을 거쳐 다시 아내로 되돌아와 가슴 정중앙에 짙은 자국을 남긴다.
세 번째 기록 "나는 걸었다"에서는 함께 또 홀로 국내외를 오가며 걷고 또 걸으면서 보낸 여정과 길 위에서의 생각과 깨달음에 대해 들려준다.
저자는 지난날 아내와 함께 걸었던 차오프라야 강변길을, 함께 보았던 바이칼 호수를, 함께 뜨거운 국물을 마셨던 한겨울의 삿포로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이제는 홀로 또 다른 길 위를 걷는다. 걷고 또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새로이 한 걸음을 내딛는다.
마지막 네 번째 기록 "나는 가르치고 배웠다"에서는 사막도시 누쿠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그들에게 배우면서 보낸 일상과 그 속에서 얻은 희망에 대해 들려준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새로이 이곳에서의 생활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저자는 아픔을 치유하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늘 그렇듯 예기치 못한 상황은 찾아와 일상을 바꾸어놓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가슴에는 먼 땅에서 얻은 강렬한 영감과 잊지 못할 추억, 그리고 단단한 힘이 자리 잡고 있다.
현직 시인인 저자의 사유와 표현은 굉장히 섬세해서 한 줄 한 줄이 가슴을 울렸다. 아름다운 문장에 감탄하고,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고, 사유를 공유하고 곱씹으며 느린 걸음으로 그의 여정을 함께했다. 나 역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여정이었고, 무형의 힘을 나눠 받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발맞추어 걷다가 홀로 선 지금,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만약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슬픔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별의 순간 속절없이 휩쓸려 파도와 함께 떠돌게 뻔하지만, 조금이나마 그 해답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사랑하는 이와 같은 색으로 물들며 정말 멋있는 꽃길을 함께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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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 누쿠스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을 감는다. 눈 감아도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다. - P105
비는 떨어져서 생을 마치지만 나는 아직 살아야 할 날들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 P107
나는 당신과 함께했던 길 위의 시간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당신과 우연히 주고받은 말을 기억한다. - P164
이제 나는 더 이상 꽃길을 찾지 않겠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길을 찾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살았다면 1미터쯤 정말 멋있는 꽃길을 걸었다고 생각하겠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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