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 - 20kg의 짐, 779km의 거리, 40일의 시간
방멘 지음 / 방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께 엽서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인상적인 풍광을 엽서로 만드셨을 테니 순례길의 감흥이 고스란히 담겨 아름답더라. 잠시나마 그곳을 상상해 봤다. 혼자거나 둘이거나 혹은 여러 발걸음이 모여 걷는 곳. 종교적인 깨달음도 좋고 사유에 목적을 두어도 좋고 혹은 성찰을 위하거나 감정을 달래기 위해 남겨진 이야기들은 다양한 모습이다. 그들에게 걷기란 무슨 의미일까.

:

📖 112
이 바보들의 세계 안에서는 걸으면서 생각하면서 버리면서 나아가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이면 충분하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
📚 방태현 지음
📚 출판사 방

:

‘할까? 해 볼까?’
토요일 4교시가 끝났다. 어느 초여름 못지않게 해는 뜨거웠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무언가 시도하기에 좋은 날이라며 재촉하는 듯하다. 그래! 걷지 뭐. 걸어 보지 뭐!

학교에서 집까지는 약 8km. 선선한 날이라면 고민을 덜 했겠지만, 이런 날씨에 서원 기도를 작정한다는 건 조금 고민스러운게 사실이다. 놀기 좋아하고 잠자기 좋아하는 고3. 입시를 앞두고 좀 더 단단한 다짐이 필요했던 시간, 문득 이 어려운 걷기를 해내고 나면 수능까지 남은 시간 무얼 해도 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톨릭 학교를 다니는 내게 이 길은 순례길인 셈이니까. 그래! 걷지 뭐. 걸어 보지 뭐!

학교 운동장을 터벅 걸음으로 시작해 교문을 지날 때쯤, 시장 쪽으로 가서 군것질도 하고 버스를 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웃으며 넘겼다. 오거리 횡단 보도 앞이다. 신중하게 따져 본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면 집 도착 1km 남짓에 하나 있는 공중전화를 빼고는 도움을 청할 방법이 없다. (지나가는 차를 세우는 것 말고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걸을 수 있겠어?’

등하굣길 늘 버스를 타고 지나던 길이라 낯설진 않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은 새롭다. 이제 곡선 길 하나 걸었는데 무당집 뒤로 테니스장이 있었고, 저렇게 긴 지하도가 있는 줄은 몰랐다. 짧은 직선 코스로 접어드니 기찻길과 나란한 방향이다. 운치 있게 지나는 기차를 보면 손이라도 흔들 양이었는데 때마침 버스가 지나간다. 얼른 눈을 땅으로 돌렸다. 아는 녀석들이 날 보았을까. 뭐 어때. 난 내 의지를 실험하는 중이잖아. 아직은 걸을만 하다.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길가에 심겨 있는 덕에 한 번씩 그늘을 건네주거든.

어려운 코스다.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길인데 이곳은 제대로 된 인도(人道)가 없다. 줄지어 차가 온다면 아주 위험한 길이다. 아는 동네가 아니니 샛길 여부도 모른다. 물을 사람도 없다. 띄엄띄엄 있던 상가 몇 개도 지나쳐 버렸으니. 걷던 템포가 흐트러질까 빠른 결단을 내렸다. 계속 걷자.

착한 운전자들 덕분에 안전하게 내리막길까지 해결했다. 이제 남은 건 시원하게 뻗은 직선 구간. 그 끝에는 우리 동네가 있다. 그런데 말이지. 분명 눈에 보이는데, 난 열심히 걷는데, 그 거리가 쉽게 줄지 않는 이상 현상을 경험 중이다. 저것은 신기루인가. 헛것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먼지를 일으키고 버스가 지나간다. ‘어떻게, 다음 정류장에서 타..?’ 아니지, 아니지. 여기서 무너지면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잖아. 이 어려운 걷기를 마치면 밀린 학습도 해낼 거고, 대학에도 갈 수 있을 거라고! 발바닥이 아프다 못해 찢기는 기분이다. 걸터앉을 벤치는 커녕 나무 그늘도 없는 마지막 구간. 내 발엔 운동화 대신 검은 단화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안쓰러워 보인다.

​:

열아홉 살 소녀는 목적을 두고 걸었다. 이 큰 어려움을 극복해 내면 작은 어려움들은 쉽게 해 낼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맞는 걸까? 그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그때는 맞는 것으로 치자. (결국 강단 없는 의지의 다른 양상이었을 뿐이란 걸 지금은 잘 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방멘 작가는 말한다.

“얼마나 더 울어야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는지 생각하다 결국은 그만둔다. 이 길을 걷는 동안 거창한 사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걸을 뿐이다.” (p.152)

우리가 에세이라고 부르는 장르는 프랑스어 ‘에세(Essais)'에서 왔다고 한다. 에세의 동사형 essayer는 ‘시도하다’라는 뜻이고. 방멘 작가가 전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은 그가 시도한 걷기였고 그 안엔 쓴맛과 단맛, 절망과 환희, 눈물과 감동을 골고루 버무려 놓았다. 저자가 충분히 음미한 후에 쓴 책, 그러니까 ‘에세이’라 부르기에 딱 좋은 글이 아닐까 싶다.

독자에게 전하는 그의 여행은 무겁지 않다. 에피소드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인간적인 탓에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듯 보인다. 하지만 순간마다 머무는 생각은 결코 가벼이 스치는 문장으로만 볼 수도 없으니 순례길에 동참해 보고 싶은 이는 고민 없이 펼쳐 보길 권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순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사진이다. 때론 글과 어우러지고 때론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사진은 글이 다 전하지 못한 여행의 품을 느끼게 하고 동경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니까. 인상적인 사진에 매료될 준비, 시작! 허허허..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읽어낼 수 있는 책이지만 여행자로 함께 하고 싶다면 각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도 좋겠다. 당신의 순례길 안에 담고 싶은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극히 사적인 네팔 - 섞이지 않지만 밀어내지도 않는 사람들
수잔 샤키야.홍성광 지음 / 틈새책방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당일치기 여행이다. 운전을 하고 한 시간을 달려 주차를 하고 기차를 타고는 두 시간 반쯤을 가야 할 오늘의 목적지. 가는 동안 멍하게 가는 건 옳지 않으니까, 오늘의 책을 골라야 한다. 나와 두 시간 남짓 함께 할 책. 책장에서 기다리는 책이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맘에 드는 책이 있다면 더 다행한 일이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내비를 찍으니 도착 예정 시간이 기차 출발 시간이다. ‘3분만 남으면 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차역 주차장에서 도착해서 뛰어갈 3분만 벌면 된다. 마음이 급하다. 서둘러 시동을 켜고 아파트를 빠져나가 우회전을 한다. 이제 큰길이니 달리면 되는데 올라가는 길 차들이 정체되어 있다. 이건 또 무슨 일! 도로 확장 공사중이다. 왜 하필 오늘이니! 천천히 천천히라도 좋으니 어서 이 구간을 어서 빠져나가자. 마의 구간을 빠져나가 좀 달리나 싶으면 신호등이 멈추란다. 힘내자, 마음아. 괜찮을 거야.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조금씩 도착 예정 시간이 줄어든다. 나에겐 약 5분의 여유가 생겼다. 충분하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공영주차장을 알려 준다. 내비를 찍으니 내 목적지 주차장과 3분의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시간은 2분. 어렵다.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난 내가 정한 주차장으로 간다. 기차역 주차장 도착. 이왕이면 기차역 입구와 가까운 쪽으로 주차했다.

가방을 들고 차를 잠그고 뛰어가려는데 ‘공사중’ 팻말이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기차역까지 단번에 오를 수 있는 길이 막혔다. 당황한 기색으로 서성이는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러고 있어요! 뛰어요!’ 눈으로 말하고는 뚫려 있는 쪽으로 냅다 뛰었다. 모르는 길이지만 운 좋게 기차역에 오르는 다른 계단을 찾았다. (엘리베이터라면 더 좋았겠지만) 멈추지 않고 뛰었다. 이렇게 계단이 많은 곳이었던가. 플랫폼에 도착하니 열차가 들어온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외투 하나씩은 걸친 늦가을 옷차림이다. 반팔 셔츠 위에 입을 니트를 손에 쥔 채로 숨을 몰아쉬는 나만 여름 행색이다. 이제야 웃음이 난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았다. 때마침 남편의 전화. 거칠게 몰아 쉬는 숨에 대답할 수가 없다. 전화를 끊고 문자를 남겼다. 잘 탔다고. 쌕쌕거리는 숨에 건너편 승객들이 번갈아 쳐다본다.

유리에 비친 계절도 모르는 여자 하나가 즐겁다며 웃고 있다. 여행의 이런 시작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커다란 움직임 없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든다. 여행길에 읽을만한 책은 이런 거지. 여행을 위한 여행, 시작해 볼까. <지극히 사적인 네팔>
:

📖
히말라야의 신화,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진 곳
우리가 찾은 슴슴한 매력의 네팔

📚 지극히 사적인 네팔
📚 수잔 샤키야, 홍성광 지음
📚 틈새책방

:

‘지극히 사적인 네팔’은 한국에 13년 거주하며 JTBC 비정상회담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네팔 출신 수잔 샤키아 씨가 지은 책이에요. 안타깝지만 전 방송을 보지 못해서 저자에 대한 정보는 모르고 시작했다죠ㅋ

“자신의 나라를 더 알리기 위해 책을 쓴 수잔 사키야의 열정을 격려하며 추천한다”고 말씀하신 문 전 대통령님의 추천사도 있었지만 (저는) 이병률 작가의 추천사를 본 이상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데리고 왔어요.

저를 포함해 이 책을 읽은 이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부분은 이거요! <지극히 사적인 네팔>은 여행지로서 네팔을 소개하는 여행 서적이 아니라는 점! 제목에서 감 잡으셨겠지만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 네팔, 그곳에 살고 있는 선한 눈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나마스테’처럼 네팔 사람들도 잘 모르지만 네팔 사람과 문화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와 직접 히말라야를 오르며 겪은 셰르파와 네팔의 산에 대한 이야기, 또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로 추앙받다가 은퇴한 ‘머띠나 샤키야’와의 인터뷰를 통해 네팔의 쿠마리 문화를 다양한 시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요, 어디 한 부분 흥미롭지 않은 부분이 없어요.

특히 쿠마리처럼 살아있는 신으로 뽑히지만, 쿠마리와는 달리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남자 신 쿠마르 이야기는 한국에서 거의 소개된 적이 없는 이야기라 숨겨진 그들의 문화를 알아가는 맛까지 챙겨 볼 수 있었고요.

그 밖에도 현역 셰르파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네팔의 역사, 구르카 용병, 여성만을 위한 축제 등 네팔인만이 소개할 수 있는 네팔을 위트 섞인 에세이로 소개하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더라고요. 아! 네팔의 독특한 달력과 국기와 국가(國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어요!

대중교통을 이용한 장거리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지루한 시간을 딱 채워줄 네팔 이야기! 여행길에 챙겨 보시면 어떨까요~

:

네팔을 가 본 적도 없고, 갈 계획도 없었지만 <지극히 사적인 네팔>을 읽고 나니 무척 궁금해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행지의 문화를 알아보려면 시장에 가 보라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혹여 시장이 낯설고 두렵다 하시는 분들은 먼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해 본다면 한결 편안하게 걸음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행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수많은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 네팔 사람들의 네팔을 알고 싶다면 읽어 보시길 추천해 봅니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여행 무작정 따라하기 - 어쩌다 시작된 2주 동안의 우주여행 가이드북
에밀리아노 리치 지음, 최보민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호기심이 생기는 건 ‘그냥..’ 이라 답할 수도 있겠지만 ‘잘 몰라서..’ 혹은 ‘더 알고 싶어서..’ 쯤이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기 좋아하는 문과 출신 수학 과외 선생님이 이제 우주여행에 눈을 돌렸다. ㅋㅋㅋ

겉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 했지만 실은 시간 날 때마다 떠나는 우주여행에 재미가 들린 건 엄마였다. “얘들아~ 엄마 달부터 갔다 올게!”를 시작으로 “오늘은 수성 가는 날이야. 기다려 봐. 놀랄만한 정보 있음 얘기해 줄게.” 책 덕분에 아이들과 깔깔깔깔. 이게 얼마 만인지.

방학 동안 네 권의 책 읽기를 계획한 초등 아들은 정해진 시간쯤 되면 제 침대 한쪽을 허락한다. 그러면 나란히 앉아 독서 시간을 가지며 각자 책에 대한 이야기를 쫑알쫑알. 말이 많은 건 엄마였던 거 안 비밀. 😂

:

📖
이탈리아 국가상 수상!
누적 5만 부 이상 판매에 빛나는 이탈리아 인기 천문학자
에밀리아노 리치의 우주여행 가이드북

📚 우주여행 무정정 따라하기
📚 에밀리아노 리치 지음
📚 더 퀘스트

《우주여행 무작정 따라하기》는 이탈리아 최초로 과학 대중화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상을 받은 천문학자 에밀리아노 리치가 집필한 도서로, 2주 동안의 우주여행을 계획하는 지구인들을 위한 책이다.

:

이 책에는 천체별 필수 여행 코스부터 화성을 여행하기 위한 최적의 시기, 울퉁불퉁한 수성을 횡단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 금성을 여행할 때 챙겨야 할 물품, 착륙이 불가능한 가스행성을 탐험하는 방법 등 우주 여행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우주여행 상식을 담고 있어요. 아무래도 (상상의 여행 상품이지만) 국내에서는 최초로 발간되는 우주여행 가이드북이니만큼 많은 분이 관심을 가지실 텐데요.

‘과학은 어렵고 천문학은 더 어렵다’라는 편견을 깨뜨려 준 책 인정입니다! 우주여행 상품이라는 컨셉이 쉽게 접근하도록 도왔고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상세한 설명과 실감 나는 사진은 책에 빠져들기에 충분했어요. 진심 재미가 있는 책이에요.

긴긴 방학엔 할 게 많아야잖아요. 이참에 책 읽기 시간을 계획해 보시면 어떨까요. 두꺼운 책이라고 겁을 내는 아이들이 있다면 하루에 한 곳씩 우주여행을 떠나자고 슬쩍 떠보는 거예요.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하루에 두 곳은 안 된다는 위트를 섞어서 말이죠~

초보 여행자를 위한 우주여행 가이드북 여기!
에밀리아노 리치, [우주여행 무작정 따라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어찌나 맘에 드는지 적어 두고 자주 보며 그녀가 글에 담고자 했던 의도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의미를 담아 보곤 했다. 내 방에 쌓여 가는 이야기들.

:

“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기분이 널뛰기를 하네요. 나답지 않은 날들이에요. 이전에 난 참 수다스러웠던가 봐요. 요즘같이 말수가 적어진 모습을 보고 우울해 하는 걸 보면요.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면 내가 나쁜 사람일까요? 아이들이나 남편이라고 타박하면 기분이 나아질까요? 결국은 내 문제일텐데 자꾸만 왜 이럴까요.

끝이 안 보이는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잠을 못 자는 이유도 무서운 꿈이 문제인 거구요. 아.. 난 자꾸만 변명 거리를 찾아 대고 있네요. 비겁해졌어요. 말보다 글이 편한 이유는 본래가 소심한 성격이었기 때문이에요.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일 텐데. 그 때문에 불안한 구석도 있어요. 아니에요. 생각하지 않을래요. 난 씩씩한 아줌마가 됐으니까요. 미안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요. 누구에게도요. 그래서 미안해요. 신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이곳에 하고 있네요.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아도 돼요. 글의 내용을 묻는 질문은 하지 않을 거니까요.

잔다고 말했지만 책을 더 읽을 생각이예요. 읽다가 졸리면 그때 자려고요. 내일 아침엔 저희 집에서 모임이 있어요. 평소같이 이른 아침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청도에 가고 싶어요. 문학동네 시집이 책장 가득 꽂혀 있는 방으로 말이죠.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있어도 좋을 것만 같아요. 이것도 결국 꿈일 거에요. 혼자 꾸는 꿈이요. 주말엔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아.. 말하지 않아도 돼요. 즐겁게 지내시길 바란다는 뜻으로 물어본 거니까요. 세 번을 울컥했어요. 이 짧은 글을 쓰면서 눈물이 넘치려는 걸 세 번이나 참았어요. 다행히도 인내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예요. 잘자요. ”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애정하는 작가가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훌륭하다 평가 받는 글 뒤로 작가의 숨은 이야기를 알고 나면 독자들은 얼마나 더 그들을 이해하게 될까. 그녀가 좋아진다, 이전보다 많이. 서둘러 떠난 마지막까지도.

:

[p. 202]
나는 “유명한”,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모험을 계속할 것이고, 변화할 것이고, 내 마음과 눈을 열 것이며, 낙인이나 고정관념을 거부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차원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 박예진 엮음 편역
**센텐스

:

책을 읽다 보면 간간이 인용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맘에 드는 문장이라면 메모를 해 두고 필요시에 문장의 주인과 속한 글을 검색해 보는 거지. 그만으로도 끌림이 있다면 내 책장에 자리를 내어 주고 읽지 못한 다른 글들에 더 욕심을 내 보기를 반복중이다.

동시대 살았고 마련된 북토크 자리가 있었더라면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직접 전하는 문장 소개를 들었겠지. 불합리한 사회를 미워하는 시선을 보여줬을 테고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가는 문장 쓰기 팁을 알려줬을지도 모를 일이지. 여기는 힘을 주어 읽고 저기는 구부려 읽고 이 부분은 슬펐고 저 부분은 인내하며 쓴 글이라고. 아쉽게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답은 하나다. 이 책을 읽는 거.

그녀의 글이 처음인 이들과, 그녀의 글이 더 궁금한 이들과, 그녀의 글을 깊게 담고 싶은 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작가를 이해하는 동시에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장들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일러줄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루스트의 질문
이화열 편역 / 앤의서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맑은 날의 고요, 잊고 지낸 화분의 새싹, 창밖을 예쁘게 적시는 비, 새로 산 커피 향, 불쑥 배달된 책 선물, 오랜만에 미루던 만남,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 아직도 하고 싶은 밀린 꿈, 낯선 길 위의 혼자 여행, 폭신해 보이는 눈꽃, 유난히 붉은 석양, ..

행복은 조용하고 평범한 것.
삶은 그것들로 채우는 열심 그리고 누리는 소확행.

한 살 더 먹었으니 더 재미있게 살되 진중함을 보태고, 더 가치 있게 살되 체면을 앞세우지 말고, 가볍게 살되 소중한 것은 한껏 품어주며 살기. 매해 시작은 이런 지혜로움을 소망한다. 어느 정도는 실현되고 어느 정도는 다시 숙제로 남겠지만 이 또한 내 삶의 모양새니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고.

메모장에 실수로 적은 3024년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런 날은 어떨지 감히 상상도 안 되는 지금, 미지의 시간을 기대하기보다 현실에 조금 더 충실해 보기로 한다. 이번 해에,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나와 함께 할 책은 [프루스트의 질문, 감정과 취향의 보관 앨범]이다. 이 작은 책엔 100개의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우린 100개 이상의 답을 적어 볼 수 있겠지. 왜 100개 이상이냐고? 질문을 만나는 매번 우리의 답은 달라질 테고 정답은 없는 거니까.

:

📖
마르셀 프루스트 100주기,
위대한 작가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100개의 질문들

📚 프루스트의 질문 (감정과 취향의 보관 앨범)
📚 이화열 편역
📚 앤의서재

철학적인 질문부터 위트 있는 질문까지, 위대한 작가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100개의 질문! 하루 한 번, 일상을 기록하며 내 삶을 변화시키는 다이어리북!

:

<프루스트의 질문>은 제목에서 짐작해 본 예상과 달랐다. 실제는 프루스트가 만든 질문지가 아니라 그가 답을 적은 노트라고 한다.

** 1887년 어느 날, 프루스트의 친구가 가정교사로부터 작고 빨간 가죽 앨범을 선물 받는다. 프루스트는 친구가 가져온 ‘고백’이라는 글자가 찍힌 앨범의 질문들에 조심스럽게 답을 적는다. 그리고 그 노트에 처음으로 천재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그려진다.

이 고백 앨범은 1924년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는데, 그 뒤 프랑스의 유명한 텔레비전 문학 프로그램의 진행자 베르나르 피보에 의해 수정되었고,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인터뷰 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

마르셀 프루스트 100주기를 맞아 프루스트가 답을 적었던 질문에 더해 인생에서 한 번쯤 자신에게 던져보면 좋은 질문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한 번 적은 답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애초부터 정답은 없는 거니까.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는 질문은 또다른 답을 적게 할 테니 그저 편안하게 적어 보는 거다. 진솔한 기록은 자신의 감정과 취향을 발견하게 되는 방법이 되련다. 마침내는 진짜 ‘나’를 만나게 되는 걸음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프루스트가 직접 답을 했던 질문에는 연도별로 적은 작가의 답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프랑수아즈 사강, 움베르토 에코, 카미유 클로델, 우디 앨런, 장 뤽 고다르, 이브 생 로랑, 칼 라거펠트, 스티븐 킹, 맷 데이먼, 해리슨 포드, 나파엘 나달 등 프루스트의 질문에 대한 여러 예술가와 유명인들의 답도 만날 수 있다. 추가된 질문들에 프루스트는 과연 어떤 대답을 했을까.

100가지 질문 중 쉽게 쓸 수 있는 답이 있을 거고, 고민스러울 답도 있을 거고, 내일로 미루는 답도 있을 테다. 어느 경우라도 괘념치 말자.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나를 더 들여다보는 시간은 마음의 벽이 얇아져 무너져 내리려는 순간순간들에 힘을 실어줄 진짜 내 얘기가 될 테니까.

감정과 취향의 보관 앨범 <프루스트의 질문> 나를 위한 선물, 너를 위한 선물로 추천해 본다. 새해 선물은 요렇게 뜻깊은 책으로 전해 보면 어떨까.

앤의 서재, [프루스트의 질문]
이번 해에,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나(너)와 함께 할 책 여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