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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평점 :
어렸을 때에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이 에세이에 눈길이 갔다. 이승우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소설은 소설가 자신을 파헤치는 일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람에 대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럴까, 소설 속의 타자를 통해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타인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소설가들은 자기 자신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쓴다고 한다.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 소설을 쓰는 일과 닮아 있을까. 인물만으로 충분한 자화상은 그 사람 자신이면서 동시에 그의 내부를 반영한다. '그'의 내부에는 '그'가 너무 많기 때문에 자화상을 한 장만 그리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여러 장의 자화상을 그려낼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우리의 내부와 외부는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내부의 혼란은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비롯되어 있거나 (외부의 혼란을) 반영한다. 외부를 그리는 일은 결국 내부의 것들을 그려내는 것이며, 외부를 그리기 위해 외부를 살필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한 장의 자화상을 그려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외부의 것을 살피기보다 그의 내면을 찬찬히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면을 그리는 일이 곧 외부를 그리는 일이며, 여기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한 켤레' 작품이 나온다. 저자는 이 구두 한 켤레가 고흐의 또 다른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구두 한 켤레는 외부의 사물에 불과하나 그 사물에 그 자신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려질 필요가 있는 모든 사물들은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와 그 사람의 일부가 된, 그 사람의 삶에 관여하는, 주관적인 '그의' 사물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린 구두 한 켤레는 고흐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소설가에 대한 한 문장을 소개한다. 소설가란, 여러 편의 소설들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내면에 대해 정의하는 데, 외부와 같은 어떤 공간이기보다 세계에 대한 개인의 자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거나 쓰는 일은 내면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림, 모든 글이 자화상이고, 자서전일 수 있다라는 결론이다.
아마도 저자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이란, 자기 자신 또는 타인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었을까. 자신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일들을 해석하는 일. 자기 자신을 파헤치고, 그것을 문장으로 표출해내는 일. 저자의 말이 저자의 뜻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란 확신이 없기에, 저자는 문장을 쓸 때에 이해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한다. 독자의 주관적 관점과 저자의 의중의 차이를 좁히기 위함일까. 내면의 언어들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단어를 고르고, 그것을 표현해내기 위하여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는 작가의 일이 고뇌스럽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준 기억들이 있다. 불안한 마음에 힘겨워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었고, 내가 진정되기까지 그 손을 놓치 않았다. 그것이 나는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는 엔도 슈사쿠의 경험담이 나온다. 자신이 입원해 있었을 때에, 간호사에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환자가 극심한 통증으로 괴로워 할 때에 어떻게 하느냐고. 간호사는 그저 곁에 앉아 환자의 손을 꼭 쥐고 있을 뿐이라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지독하던 통증이 조금씩 가시고, 웬만큼 견딜 만해진다고. 저자는 고통 가운데서 손을 뻗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왜 손을 뻗는가, 그것은 "도와달라"가 아니라 "아프다"이다. 저자는 글쓰기의 기원에 도사리고 있는 게 '아프다' 라고 말한다. 아픔은 표현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손을 뻗는 동작이고, 그것이 저자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손을 내밀었을 때에, 누군가는 그런 문학으로부터 뜻밖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 또 우리 각자에게 절실한 마음이 있는가. 저자는 중요한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절실한 것을 쓰며, 중요한가를 묻지 말고 절실한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절실한 것은 간절한 것이다. 간절한 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한 상태'란 의미이다. 내가 관여된 것, 내가 관여된 어떤 것이 나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다. 나 아닌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그는, 절실함으로 글을 쓰는 작가인 것 같다. 나를 말하는 것이 '너, 그, 그녀'를 말하는 것이며, 나를 잘 말하는 것이 '너, 그, 그녀'를 잘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내 말과 글이 허우적거림인 것이라 말하는 그의 태도가 겸손하게 다가왔다. 아마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 완벽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외부의 어떤 대상을 향하여 손을 뻗는다. 아픈 사람은 "아프다"라는 표현으로 손을 뻗을 수 밖에 없다. 나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때에 이를 해석하기 위하여, 그 고통에서 나아오기 위하여 책을 찾고, 글을 쓰고, 타인에게 손을 뻗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절실한 마음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고통과 아픔이 없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누구도 삶의 고통에서 자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생이라는 것이, 아픔을 동반한 채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절실한 자에게 손을 내밀고, 아픔을 가진 타인의 손을 잡는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문학의, 예술의 일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맺는 관계를 통해서 그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타인에게 손을 내밀며, 타인의 손을 잡아주는 것. 조심스레 나의 마음에 묻는다. 무엇이 절실한가. 우리는 손을 뻗는 동시에 손을 잡는다. 우리의 생의 본질이 어쩌면 이것에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끝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문장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진솔한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아픔을 내장하지 않은 문학, 가지가지 욕망의 주문에 따라 기획되고 전시되는 문학이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 한쪽 구석에는 그러나 아직도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의 간절함을 피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잡는 문학이 쓰이고 읽히고 있다고 믿고 싶다. 가끔 뜻밖의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 그런 곳이라는 것도.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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