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쓸모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과거가 될 만반의 자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러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뒤 사진기를 보고 웃었다.

사진기는 펑! 펑!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플래시 소리는 낙하산 펴지는 기척과 비슷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는 안도를 줬다. 운전자를 덮치는 에어백마냥 푹신한 충격을 줬다.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버스는 ‘도시가 아니면서 도시가 아닌 것도 아닌’ 공간을 한참 가로질렀다. 미분양 아파트와 아웃렛, 비닐하우스와 공장, 공원묘지와 화원, 진흙오리구이며 장어구이 따위를 파는 보양식당과 프로방스풍 모텔을 비껴갔다. 수도와 지방의 이음매는 무성의하게 시침질해놓은 옷감처럼 거칠었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란 조금이라도 미래를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는 순간들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억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안에 자리를 잡아 갔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그들에게 현재가 되었다. 그 점을 분명히 말해야 하는데, 사랑의 힘, 심지어 우정의 힘마저도 페스트가 모두에게서 앗아 가버렸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 3부>
페스트의 포로들은 이렇게 한 주 내내 저마다 어떻게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랑베르처럼 그들 가운데 몇몇은 여전히 자유인인 양 행동하며, 심지어 실제로 자신들에게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믿기까지 했다. 그러나 8월 한복판에 이르자 사실상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자 개인의 운명이란 더 이상 없었고, 페스트라는 집단의 역사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이별과 유배의 감정이었으며, 거기에는 공포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서술자는 무더위와 전염병의 절정에서 전반적인 상황,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산 자들의 폭력, 죽은 자들의 매장 그리고 헤어진 연인들의 고통 등을 상세히 기술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세상의 악이란 거의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배움이 없는 선의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이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하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덜 무지하거나 더 무지하다. 따라서 우리가 미덕또는 악덕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며, 가장 절망적인 악덕이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믿고 그런 이유로 감히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라는 악덕이다.

 그러나 서술자는 훌륭한 활동에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여하는 것은 결국 악에 대해서 강력하면서도 간접적인 찬사를 표하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들이 그렇게도 큰 가치를 갖는다면 그런 행동들 자체가 드문 데다가 사악함과 무관심이 인간들의 행동에 있어 훨씬 더 빈번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라는 점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낮이 되면 사람들 얼굴에서 생생히 드러나는 불안이, 붉게 타오르는 먼지투성이 황혼녘에는 일종의 격렬한 흥분과도 같은 것. 모든 사람들을 열의에 들뜨게 만드는 어설픈 자유로 용해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