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런 일상의 모든 변화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특별했고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변화들이 정상적이며 지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개인적 감정들을 가장 우선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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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자신도, 이수도 바야흐로 ‘풀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 빠지는 시기를 맞았다는 걸.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그런 소문은 귀에 잘 들어왔다. 이수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 있었다. 

도화가 이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곤 ‘늘 이런 식이야....…‘ 생각했다. 도화가 이별을 준비할 때면 두 사람 사이에 꼭 무슨일이 생겼다. 이수가 새 직장의 면접을 앞두고 있거나, 도화가 승진을 하거나, 이수의 생일이거나, 누가 아픈 식이었다. 미래를 예측해 결론 내리기 좋아하는 도화는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빤히 읽혀 울적했다. 과음한 이수는 하루종일 앓을 것이다. 술과 담배 냄새로 이불을 더럽히고 땀에 전 몸으로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두통을 호소하겠지. 

그러다보면 우리는 오늘도 헤어지지 못할 것이다.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거였다. 

도화는 속으로 ‘아직 덜 실패한 눈......‘이라 중얼거렸다. 오래전 저 눈과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있다고. 자신도 가져본 적 있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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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그 사람은 차분한 말투로 나를 위로하고 공적인 어휘로 보험금 지급과정을 설명했다. 그러곤 조심스레 서류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 내 이름을 적는 칸과 계좌번호를 기입하는 난이 비어 있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와 같이 사무적인 얼굴로 누군가의 슬픔을 대면했을 터였다.

어떤 일이든 그렇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좋다고, 그래야 뭐든 할 마음이 난다고 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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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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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추상과 제대로 붙어야 한다.

추상적인 것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금 닮아야 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행복보다 더 강력한 것인 양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기에, 따라서 그런 경우에만은 반드시 추상적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동정심이 무용지물이 되면 사람들은 동정하는 것을 피곤해한다. 자신의 양심이 서서히 눈을 감는다는 것을 느끼면서 의사는 짓누르는 듯한 이 하루하루로부터 유일한 마음의 위안을 찾았다.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은 매우 특별한 심리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그들에게 충격을 주는 믿기 어려운 사건들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도 무언가 변화가 있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전염병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가족과 함께 무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그들은 초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생활을 계속해 가며 유배 생활에 적응해 갔고, 다른 이들은 그때부터 오로지 이 감옥에서 탈출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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