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그 사람은 차분한 말투로 나를 위로하고 공적인 어휘로 보험금 지급과정을 설명했다. 그러곤 조심스레 서류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 내 이름을 적는 칸과 계좌번호를 기입하는 난이 비어 있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와 같이 사무적인 얼굴로 누군가의 슬픔을 대면했을 터였다.

어떤 일이든 그렇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좋다고, 그래야 뭐든 할 마음이 난다고 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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