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들처럼 떠나라! - 작가와 함께 떠나는 감성 에세이
조정래.박범신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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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여행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20대에는 여행이 그다지 즐겁거나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었으며 두려울 것 없었으니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시간은 많았으나 돈이 없었으니 마음껏 떠날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일상에 지쳐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꺼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감탄하기에는 너무나 젊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과 출신이라 그런지 문학이나 역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여기에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으며 소설이나 시를 쓰기 위한 영감을 얻을 일도 없었으니 더더욱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친구들끼리 어울려 술한잔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했었다. 그렇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전과 달리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중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 주로 여행을 선택한다. 왜 좀 더 젊었을때 여행을 즐기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고 책읽고 글쓰는 것도 즐기는 편이라 주말에 가족들끼리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항상 사진과 함께 뒷 이야기를 남긴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전문 사진 기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뭔가 기억에 남는 글을 남기고 싶다. 유명한 작가들은 여행을 다니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옅보고 싶기도 했다. 나도 책을 쓰겠다고 목표를 세운지 2년이 지났고 이제 8년정도 남았다. 인생에 있어 멘토가 필요하듯이 작가를 꿈꾸는 나에게도 멘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멘토를 만나 승승장구할 수는 없는법. 책으로 나마 만나고 싶었기에 책을 집어 들었다. 두께의 압박은 있었지만 컴팩트한 사이즈에 오감을 자극하는 그림은 책장을 술술 넘기기에 충분했다. 사진작가와 글쓰는 작가와의 만남이라고 봐야할 까?

 

  유명한 작가들이 어떻게 작품을 만들고 구상했는지 또 그들의 어린시절은 어떻했을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태백산맨과 아리랑으로 유명한 조정래 작가의 경우 손으로 일일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베스트 셀러 대하소설이란 쉽게 만들어지는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자신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얼마나 많은 퇴고를 하였겠는가? 심지어 책을 쓰는 동안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술도 멀리했다고 하니 절제된 모습이 상상이 된다. 도대체 책 한권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하며 또 많은 여행을 다녀야 할까? 마음편하게 여행다니는 나와 달리 뭔가 영감을 얻기 위해 떠나는 프로의 세계는 힘이 들것이다. 똑같은 경포대를 보고도 우리는 그냥 아름답다라고 느끼지만 다섯개의 달이 뜬다라고 아름답게 표현을 하다니 역시 작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보다.

 

 

  작가들과 연예이들과 함께 떠나는 문학여행. 그리고 그들만의 세계속에서 이루어지는 편안한 대화. 얼핏 보기에는 새삼 놀랄 것 없는 여행이야기이지만 나와는 분명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기에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여행을 다녀오고 누군가가 나를 멘토로 생각하고 나의 이야기를 읽어줄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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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역사에 빠져드는가 - 어제와 오늘을 알면 내일의 길이 보인다
이수광 지음 / 소울메이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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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역사책을 읽으며 열광할까? 특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극이나 역사를 다룬 영화에 관심이 많아지는 이유가 뭘까? 흥미를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무협지와 같은 전쟁이야기 자체를 즐겼지만 점차 역사이야기 자체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젊어서는 물리학나 생물학과 같은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해양과학을 전공하였지만 나이가 점차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인문과학에 관심이 많아졌다. 이런 현상은 나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학창시절 역사란 년도와 인물 등을 암기해야하는 아주 지긋지긋한 학문이었다. 게다가 역사학을 가르키는 선생님들 역시 인간 복사기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칠판 한가득 참고서에 있는 내용만 옮겨적을 정도니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게다가 수능이나 내신에서 비중도 높지 않으니 관심 밖이다. 그렇다가 사회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다 보니 대인관계에 대한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술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아지는데 이야기 주제가 한정되어 있다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이가 들면서 점차 역사에 관심이 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삼국지를 세번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 대화하지 말라는 말에 5권에서 10권씩 되는 삼국지를 읽으며 중국의 역사에 눈을 뜨게 되고 손자병법을 읽으며 전략과 전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산 중 하나인 조선왕조 실록을 읽으며 사극을 보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으며 단순한 흥미를 뛰어넘어 인물에 대한 나름대로 재평가까지 하게 되었다. 역사를 읽는 것이 저자의 말대로 미래의 비전을  위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그 인물들 속에서 나와 비슷한 캐릭터나 롤모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힘든 현재를 어떻게 극복하여 미래를 설계할지 고민할 수도 있다.

 

  역사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종이와 다른 저장매체가 발달한 것이 아니어서 역사를 조작하고 자기 입맛대로 기술하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경우도 경주 김씨인 김부식이 자신의 조상들의 업적을 치하하느라 상당 부분을 왜곡하지 않았던가? 수백년전에 기록된 역사서이지만 오늘날에 와서 재검증을 하면서 오류에 대해 바로잡고 있지 않는가? 하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치에 대해서도 언론을 장악해버리면 쉽게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일 수가 있는데 수백년전에는 훨씬 쉽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더욱 역사에 대해 관심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속아왔으니 지금은 안 속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언론은 우리를 속이고 있으니 말이다. 베트남전을 공산주의로 부터 월남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 잘못배웠는데 실상은 베트남의 독립전쟁이었던 것이다.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그릇된 교육을 받았던 것인데 저자도 그런 미제국주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정치나 사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지만 책을 읽으면서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생각을 지울수는 없었다. 마치 미국이 우리를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시켜준 것이며 남한만이라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선전하는 것 같다. 근데 6.25전쟁이 우리 민족의 전쟁이겠는가?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리전이지 않았는가? 자기네들 영토를 재더미로 만들기 싫어서 우리내 영토를 유린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을 잘 살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의키기에 충분하다. 책의 분류가 역사/문화이기에 사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대로 과거에 우리의 선조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또 다시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냥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식민사관에 대한 주입식 교육을 시킬 수도 있으며 미국식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착각 말이다.

 

  어짜피 역사란 기록하는 사관과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진실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역사란 의견이 분분하기에 우리는 역사에 빠져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왜 우리는 역사에 빠져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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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행복
레오 보만스 엮음, 노지양 옮김, 서은국 감수 / 흐름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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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부터 나는 왜 사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이토록 죽어라고 공부를 해야하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등교 시간에 늦어 지각이라도 하면 벌을 서거나 몽둥이로 맞아야 했으며 성적이 떨어졌다고 구박받거나 역시 몽둥이로 맞아야 했다. 도대체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고 살았다. 그렇다가 어른이 되어지만 인생을 살아야되겠다는 생각이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돈을 많이 버는게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돈을 벌고 난 다음은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며 5,000원을 투자하여 희망을 걸어보지만 막상 당첨이 되고 나서는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인생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나도 언제부터인가 인생을 즐기며 살기로 마음 먹었다. 책에서도 수차례 강조하지만 가난하다는 것은 불평이지 절대 불행은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돈이 많다는 것이 곧 행복하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 더 불행할지도 모른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는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 일정 금액 이상 넘어가면 똑같은 돈으로 인식한다고 하지 않는가?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행복해질 수는 있지만 행복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볼때 정말 가난에 찌들어 사는 것 같은 아프리카 주민들이나 불안한 치안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보며 불행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살기에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생각에 절망보다 희망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나도 학창시절에 너무 힘들어서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차례 해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너무나 힘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그런 상황을 즐기거나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을가 싶기도 하다. 만약 나에게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냈기에 후회하지도 않으며 또 돌아가고 싶을 만큼 행복했던 시절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지금 아주 행복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1000가지 단어로 행복을 말한다고 하지만 나는 한마디로 말하고 싶다.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라고...' 내가 게임 캐릭터의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가 조절하고 있는 이 게임에서 살아남으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지나고나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저 추억거리에 불과할 것이기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다. 한번 살다가는 인생 즐기기에도 너무 짧은데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고 걱정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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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사람들 - 1866, 애절한 죽음의 기록
이수광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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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신론자이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신에게 귀의한다거나 매일 매일의 기도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종교가 우리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잘 알기에 학문의 하나로서 종교를 배우고자 한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에 의탁하는 것이다. 어짜피 한번 살다가는 인생 영원할 수 없으니 종교를 믿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생활하다보면서 참 인격적으로 덜 완성이 된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을 대할때마다 속으로 '너 그렇면 지옥간다'라고 말을 하곤한다. 그렇게 본다면 종교의 힘은 대단히 크기에 내가 지금 조금 손해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신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만 간직한다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후기에 핍박받던 백성들 사이에 천주교가 널리 퍼졌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천주교 뿐 아니라 동학이라고 알고 있는 천도교 역시 빠른 시간내에 시세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획기적(?)이었겠는가?  

 

  종교나 정치,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민감한 부분이라 함부로 입에 올리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나는 종교란 지배계층들이 피 지배계층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수단에서 시작되었다는 선입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에 전파된 불교가 그랬고 이슬람교나 가톨릭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사실이야 어떻든 자기 백성을 보호해야할 지도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종교를 탄압하고 심한 박해를 하였다는 사실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백성들이 있어야 임금도 존재하는 것인데 자생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강제로 막으려고 했으니 얼마나 사회가 곪아터졌는지 알만하다. 전쟁이 벌어지면 끝까지 나아서 백성들과 함께 지켜내야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가장 먼저 피난길에 오르는 임금을 누가 신적인 존재라 믿고 따르겠는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도 조직하고 품앗이를 위해 계를 만들어 생존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야만 했던 백성들에게 특정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모진 박해를 가했다니...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그래도 만약 개화기때 아니 그 이전에 1800년대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중국만이 세계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즉 중화를 거스렀다면 어땠을까?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벽란도를 통해 이슬람 상인들과도 거래를 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중국외에는 기껏해야 일본 통신사 정도 밖에 없었으니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는 이미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조선의 역사나 숨은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신해박해니 병인박해 정도 혹은 수천명이 순교했다는 정도만 알고 어떻게 혹은 왜 그렇게 순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조선은 자국의 백성 뿐 아니라 외국의 선교사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 나도 신이 아니기에 왜 그런 박해를 하였는지 정치적인 배경이나 순교를 택한 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한쪽은 억압받고 굶주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고 또 한쪽은 자신만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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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서 프렌치 키스하기 - 우치동물원 수의사 최종욱의 야생 동물 진료 일기
최종욱 지음 / 반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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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부터 동물을 아주 좋아해서 과학자가 사육사가 되고 싶어했다. 지금이야 집에서 반려동물을 많이 키우니 수의사나 사육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어릴적에는 지금처럼 반려동물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고 애완동물이라고는 마당에 키우는 개나 고양이 정도였다. 학교 운동회가 하는 날이면 의례 병아리를 파는 분들이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영양 상태가 좋지 못했던 것인지 우리가 키울줄 몰라서인지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1주일간 키웠기에 나름 정이 들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곤 했는데 그렇다가 6마리 병아리를 사서 2마리를 제대로 키워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항생제를 적절히 사용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실퍠의 원인인 것 같다. 처음에는 모이만 주었지만 제대로 키울때는 보리와 쌀, 옥수수 등을 망치로 잘게 부수고 메뚜기나 사마귀와 같은 곤충도 잡아서 주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키웠는데 그때가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다 자라기 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운명을 달리하였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그 외에도 토끼도 키웠는데 겨울철에 제대로된 보온시설이 없어 동사하는 일이 생겼다.

 

  닭이나 토끼의 경우 집에서 사육하기 위해 길들여 졌지만 야생동물의 경우 만만찮을 것이다. 야생에서 살던 동물이므로 왠만한 질병에 속수 무책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야생의 본능이 살아 있으니 먹이부터 잠자리까지 신경을 많이 써야할 것이다. 애완동물이나 가축도 이렇게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사자나 호랑이 혹은 얼룩말 같은 동물은 오죽하겠는가? 백과사전에서 봤는데 사자가 호랑이 보다 길들이기 쉬우며 얼룩말은 순해 보이지만 길들이기는 퍽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커스에 등장하는 동물중에 얼룩말이나 사슴은 본적이 없다.

 

  동물의 왕국이나 야생동물의 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TV에서는 사냥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므로 초식동물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른으로 성장하기 전에 다 잡아 먹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새끼를 낳는 것을 보면 초식동물은 보통 한배에 한마리 정도 낳지만 육식동물은 5~7마리씩 낳게 된다. 그만큼 어릴적 사망율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초식동물의 경우 천적은 육식동물이지만 육식동물의 경우는 같은 종족이 가장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영역 싸움을 해서 진 사자는 많은 상처를 입고 쫓겨나거나 싸우다 죽는 일이 다반사다. 그리고 다른 사자의 새끼는 모두 물어 죽여서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려고 한다. 이런 행동들은 단체생활을 하는 원숭이 무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수컷 곰의 경우 새끼를 낳고 떠나버리고 어미 곰이 새끼를 키우는데 종종 수컷 곰이 새끼를 헤꼬지하려고 드는 장면을 TV에서 자주봤다. 그래서 동물원에서 새끼를 낳으면 따로 격리시켜서 사람들이 키우나보다. 그러게 어릴적부터 사람의 손에 키워지다보면 야생의 습성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얼마전에 서울 대공원 동물들에 대한 내용을 TV에서 본적이 있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살다보니 나무에서 주로 살아가는 오랑우탄의 발이 엉망이되고 원숭이는 스트레스로 털이 빠지고 늑대는 한쪽 방향으로 계속 돌기만 했다. 바둑판처럼 다닥다닥 붙여서 우리를 만들어 놓으면 동물을 관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편할지 몰라도 동물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닮아서인지 동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서 동물원을 자주 찾는다. 어떤 동물원은 정말 동물을 위해 넓찍한 축사를 갖추고 있지만 어떤 곳은 좁은 곳에 가두어두는 곳이 많다. 그럴때마다 저 동물들은 야생을 얼마나 뛰고 싶을까 라고 생각해보지만 사람에 의해 보호를 받으니 나름 장점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동물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아닐까 싶다. 어릴적 동화책에서 읽었는데 원숭이에게 담배 꽁초를 던지기도 하고 하마가 입을 벌리고 있으니 장난으로 콜라병을 던지는 장난꾸러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이런 인식변화가 생겨야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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