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유 식탁 - 양장, 영혼의 허기를 달래는 알랭 드 보통의 132가지 레시피 ㅣ 오렌지디 인생학교
알랭 드 보통.인생학교 지음, 이용재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0월
평점 :
[사유 식탁]은 일반적인 레시피북은 아니다. 일단 저자가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라는 것에서부터 바로 감이 오겠지만 이 책은 평범한 요리책이 아니라 요리책의 형식을 빌려서 심리학과 철학을 말하고 있는 음식 철학서, 요리 인문학서라고 할 수 있겠다. 알랭 드 보통이 세운 것으로 유명해진 '인생학교'가 공동저자로 되어 있는데 인생학교는 관계의 형성 원리나 실패 원인, 위대한 사상가들이 남긴 삶의 교휸, 어린 시절이 성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외로움·불안·절망의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 등 삶 속의 크고 작은 질문들을 놓고 함께 공부하고 배우는 학교라고 알려져 있다. 인생학교에서 다루는 이런 주제들을 요리 레시피나 저녁 메뉴와 접목시켜서 이야기한다.
앞서 음식 철학서나 요리 인문학서라는 말을 했는데 이런 책들은 음식 쪽에 방점이 찍힌다. 음식이나 요리를 메인에 두고 역사나 예술, 문학, 인류학, 철학 등으로 맛과 음식을 해석하는 식이었다면 이 [사유 식탁]은 음식이나 식재료를 하나의 철학적 소재로 치환하여 철학 이야기를 하는데 좀 더 치우쳐 있다. 몸에 좋은 음식이라는 것에 착안하여서 정신에 좋은 요소를 식재료(소재)로 선정하여 '좋은 시민' '좋은 개인'이 되기 위한 레시피(방법)를 배워보자는 식이다. 쉽게 말하면 요리책을 코스프레한 철학서인 셈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좋은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당시의 이상적인 시민을 규정하는 열두 가지 미덕을 현대적으로 치환해서 희망, 장난기, 성숙함, 안도감, 외교술, 냉소, 예민함, 지성, 친절, 인내심, 비관주의, 자기 이해, 자기애, 자기주장, 동정심,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총 열여섯 가지 원료로 확장시켜 다루고 있다.
음식 그 자체나 식재료에 관련된 인문학이 아니라 요리와 식재료에서 출발해서 철학으로 자연스럽게 연착륙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이 선듯 이해가 안될텐데 예컨데 인내심의 상징을 나타내는 '피스타치오'로 설명을 해보면 피스타치오는 맛은 좋지만 먹기가 불편하다. 단단한 껍데기을 벗기는 것이 무척 귀찮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껍데기를 벗기다가 손톱을 다치기도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힘겹게 껍데기를 벗기고 얻는 보상은 달콤하지만 그 양은 너무나 적고 더 먹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생긴다. 하지만 다시 껍데기를 벗기는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이 가지 않게 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껍데기를 제거하고 알맹이만을 큰 봉지에 담아서 팔고 있어서 돈만 더 내면 더 이상 맨손으로 껍데기를 벗기지 않아도 편하게 맛있는 피스타치오 알맹이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풍요로움은 감사함을 잊게 만든다. 아무런 수고 없이 피스타치오를 막 먹다보면 결국 감사할 줄 모르게 되는데 껍데기를 제거하지 않은 피스타치오는 쉬운 성취의 불공정함과 인간을 약화시키는 편안함에 반하는 개념이자 인내심과 꾸준한 노력으로 언젠가 성취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인내는 마냥 슬픈 미덕 같지만 원하는 것을 당장 손에 넣는 게 최선이 아닐 수 있으며 욕망이라는 장애물과 끈질지게 싸워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력 위에 자리한다는 나름의 교훈을 품고 있다고 주장한다. 솔직히 피스타치오 하나 까먹으면서 뭘 이렇게까지나 생각을 하나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피스타치오 껍데기에서 이런 의미를 발견해내는 통찰이 놀랍기도 하다.
아무튼 책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식재료에서 인간의 미덕을 발견하고 인간의 본성과 감성을 통찰한다. 그리고 그 식재료를 활용한 진짜 요리 레시피를 몇가지씩 덧붙이고 있는데 그 음식에까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냥 식재료에서 의식의 흐름으로 인간의 미덕을 통찰하며 머리를 채우고, 요리로 배를 채우라는 식인가보다. 책에 따르면 서양의 지식인들은 음식을 대화 주제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정신적 열망과 육체적 만족 사이에 거리를 두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음식이나 먹는 행위를 지적이고 심리적인 부분과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데 그런 것치고는 아까 말했듯이 음식 철학서나 요리 인문학서를 상당히 많이 봤다. 물론 이 사유 식탁은 그런 책들과 형식이 전혀 다르고, 철학이 메인디쉬인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건 맞는 것 같다.
우선 여기까지가 파트1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간성을 가치있게 만드는 여러 요소들은 식재료에 비유하여 하나씩 소개하였고, 이후 '우리 자신을 돌보기, 친구들과 함께, 관계, 충분히 좋아, 사유를 위한 음식'이라는 총 5가지 테마로 우리의 고민이나 수많은 걱정들, 사랑, 대인관계 등의 조금 더 깊고 실체가 있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며 그 이야기의 주제에 걸맞는 요리 레시피를 짝패로 묶어서 소개하고 있다. 철학적이라고는 했지만 어려운 철학적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식사 자리에서 나눌만한 가벼운 스몰 토크 정도의 철학적 에세이라서 마치 에피타이저 스프를 떠먹듯 술술 넘어간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도중 자연스럽게 짝을 지어놓은 음식 이야기로 스무스하게 이어지며 그 둘이 하나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좀 억지스럽게 묶어놓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있지만 크게 거슬리거나 문제되지는 않는다.
사실 음식 레시피는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넘어가고 심리학과 철학을 다룬 파트를 중점으로 읽었다. 한번쯤 하게 되는 고민이나 문득 떠올릴 때가 있는 생각들을 소제목으로 하여 그와 관련해서 가볍게 사유를 하고 있어서 평소 그런 고민이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면 그에 대한 가벼운 조언을 받는 듯한 기분도 들고 전체적으로 꽤나 공감도 가는 글이라서 그 글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렵지가 않아서 가볍게 읽기 좋다. 좋은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하듯, 좋은 사유는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 매일 식사를 하듯 가볍게라도 일상을 돌아보고 사유하며 생각과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할텐데 그럴 때 사유 식탁이 도움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