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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있는 사전 - 말끝마다 웃고 정드는 101가지 부산 사투리
양민호.최민경 지음 / 호밀밭 / 2025년 7월
평점 :


2000년대 초반부터 방송, 특히 개그 프로그램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도 친구, 범죄와의 전쟁, 해운대, 황산벌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작품들이 나오면서, 경상도말이 점점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섰다. 예전에는 방송에서 사투리를 쓰는 게 금지되기도 했고, 영화 속에서도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는 깡패나 조폭 같은 악역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아 사투리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경상도 사투리가 점차 주류 문화에 편입되면서, 예전처럼 사투리에 대한 거리감이나 거부감은 점차 사라졌다. 오히려 그 특유의 억양과 정서가 영화와 방송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게 되며 생동감과 유머를 더하는 포인트가 되었다. 부산표준어를 쓰는 나 같은 부산 토박이 입장에서는 꽤나 반가운 일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좀 있다 보니 요즘 젊은 친구들보다는 사투리를 더 많이 쓰는 편인데, 내가 평소에 써오던 말을 TV나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다는 건 즐겁고도 반가운 일이다.
그렇다고 부산 사람이라고 해서 미디어에 나오는 사투리를 다 알고, 모두 그런 말을 실제로 사용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방송을 통해 처음 듣고 나서야 알게 된 말도 많다. 가령 “살아있네” 같은 표현은 적어도 우리 세대에선 거의 쓰지 않았거나, 적어도 나는 별로 쓴 기억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마치 부산을 대표하는 사투리처럼 여겨진다. 그런 괴리감이 오히려 또 재미있다. 내가 몰랐던 정감 있는 고향말을 새삼 알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투리를 더 알고 싶어도 국어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고, 그런 말들을 제대로 정리해 알려주는 곳도 거의 없다. 애초에 이런 사투리는 대부분 동네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뜻이나 어감, 뉘앙스를 설명하기조차 애매하다. 결국 이런 말은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해 정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딱 잘라 정의하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쓰잘데기 있는 사전]은 일반적인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부산 사투리의 뜻과 의미, 어원 등을 유추하며 정리해 놓은 일종의 사투리 사전이다. 앞서 말했듯 네이티브 사투리는 생활 속에서 전해져 온 것이라 어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조차 불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책은 그런 단어들의 뜻과 어감을 풀어내고 어원과 활용까지 정리해 놓아 부산 사투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쓰잘데기 있는 참고서가 되어준다. 단순히 재미로 사투리를 보고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잊혀져 가는 고향 사투리를 보존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데, 미디어에서는 사투리를 자주 접하게 되었지만 정작 일상생활에서는 점점 사투리가 사라져 가고, 방송에 나온 몇몇 사투리만 유행어처럼 쓰이는 현실에서 이렇게 잊혀져 가는 사투리를 기록한 것은 나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총 101가지 사투리를 글자 수에 따라 정리해 놓았다. 가나다 순이 아닌 글자 수 정렬이라는 점도 이색적이고 재미있다. 이는 부산 사투리가 가진 특유의 간결함과 함축성, 그리고 리듬감을 살려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부산말은 짧은 글자 수 안에 뜻을 압축해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글자 수별로 정리함으로써 그런 특징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책의 구성은 우선 해당 단어가 활용된 회화문을 보여주고, 사전처럼 단어의 정의를 한줄로 설명한다. 그리고 단어의 정확한 의미, 어원, 뉘앙스, 발음법, 실생활에서의 활용법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어원을 유추할 때는 그냥 막연하게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문법적인 분석과 고찰을 통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저자가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구나 싶다.
일단,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읽다 보면 부산 사투리 특유의 경상도파민이 터지면서 웃음이 나고, 부산 표준말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즘은 잘 안 쓰지만 어릴 때는 자주 쓰던 말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도 있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말도 꽤 있었는데 곡각지, 홍큐공, 쑥쑥하다, 속닥하다 같은 말들은 내나고 처음이다(그러고 보니 '내나고'도 부산말 되시겠다). 엄마한테 물어봐도 못 들어봤다 하시니 확실히 같은 부산말이라도 동네나 세대, 사람에 따라 쓰는 말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그 외에는 어릴 때 많이 썼거나 지금도 가끔 쓰는 말들인데, 막상 단어만 보고 뜻을 설명하려니 애매한 것도 많았다. 이걸 외국인 친구한테 알려준다고 생각하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애매하고, 뜻을 정확히 짚어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리하다, 시근, 고마, 내나 같은 말들은 느낌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말로 설명하려 하면 입안에서만 맴도는 기분인데, 그런 단어들을 책에서는 알기 쉽게 풀어놔서 네이티브 부산 토박이인 나도 한수 배워간다.
또 내가 쓰던 말과 책에 담긴 말이 미묘하게 다르게 쓰인 경우도 있었는데, 해깝다는 해꼽다, 새그럽다는 시그럽다, 추접다는 추잡다 이런 식으로 나는 약간씩 다르게 쓰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책에는 내가 쓰던 다른 버전의 말도 언급되어 있는 걸 보며 역시 사투리는 변화무쌍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역시 이렇게 보면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한 티가 난다. 책을 보면서 이게 부산말인 줄 전혀 모르고 있던 것도 몇 가지 있어서 좀 놀랐다. 예전에 서울 친구와 밥을 먹다가 간장을 많이 찍길래 "짭다"라고 말했더니, 왜 사투리를 쓰냐며 뭐라고 하길래 그게 사투리인 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것처럼, 이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사투리라는 걸 알게 된 말들도 있었다. 막장, 박상, 한바닥&한코스, 바보축구온달 같은 게 부산말이라니… 그럼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말을 안 쓴다는 건가? 당연히 전국에서 다 통하는 표준어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강구, 땡초, 단술 같은 단어도 부산말이라고 하니 역시 부산말은 지역만의 색이 또렷하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부산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꼭 짚고 가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쪽자"다. 쪽자는 책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소위 달고나를 뜻하는 정식 부산표준어이다. 책의 설명대로 쪽자는 작은 국자를 의미하는데 국자에 설탕을 녹여서 소다를 넣은 후 모양을 찍어내는 과자의 명칭이기도 하다. 달고나라는 게 방송에서 언급되면서 언젠가부터 달고나 또는 뽑기가 그 과자의 정식 명칭처럼 굳어졌는데 우리 때는 이걸 쪽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달고나는 설탕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사각형의 설탕 덩어리, 이후에 그게 포도당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아무튼 그 설탕 덩어리를 달고나라고 불렀다. 그건 소다를 넣을 필요 없이 그것만 녹여서 먹었는데 가격이 쪽자보다 비쌌다. 이렇게 쪽자와 달고나는 엄연히 다른 건데 쪽자를 멋대로 달고나라고 부르며 그 시절의 기억을 강제로 바꿔버려서 달고나란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릴 적 추억을 빼앗긴 기분이 든다. 아무튼 책에는 똥과자도 나오는데 이건 모양을 찍어내지 않고 그냥 설탕통에 그대로 때려넣고 덩어리째로 먹는 형태를 말한다. 생긴게 똥같다고 똥과자라고 불렀는데 이건 같은 부산 사람 중에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이 역시 놀랬다. 책이 널리 퍼져서 달고나와 쪽자는 엄연히 다른 거라는 사실이 좀 알려졌으면 좋겠다.
본격적으로 부산 사투리를 모아놓은 사투리 사전이라는 형식은 새롭고 재미있으며, 어릴 때 자주 쓰던 말을 보니 향수를 자극한다. 또한, 정서적으로만 이해하던 부산말을 정확하게 정의해 놓아, 늘 쓰던 말이지만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K 콘텐츠에도 사투리가 메인이 되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 지금 우리말을 풍성하게 해주는 부산사투리의 매력이 한번 빠져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