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위로 - 카페, 계절과 삶의 리듬
정인한 지음 / 포르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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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사실 별일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날들도 비슷하지 싶다. 아마도 별일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한다. 나는 특별한 경험을 기다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하루에 한 장 정도 따뜻한 이미지가 있으면 한다. 어떤 섬에 가지 않아도, 화려한 호텔에 가지 않아도, 빛이 드리워진 근사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 딱 하루에 한 장의 이미지만 마음속에 남았으면 한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작고 짧은 승리가 아닐까. 각자의 소박한 필승을 바라며 욕심을 지운다. (p.128) 

 

 

가족들보다 조금 일찍 아침을 시작하는 나의 '필수동반자'가 있다. 눈치챘겠지만 그것은 당연히 커피다. 짙게 내린 에스프레소를 곁들여 책을 읽다 보면 밥솥이 칙칙 김을 뿜는다. 보통은 3잔, 커피는 나의 순간순간을 함께 한다. 돌아보면 내가 부지런히 살아온 시간, 또 즐겁거나 슬펐던 순간에도 커피는 늘 존재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포르체의 신간 『커피의 위로』는 제목부터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 나의 순간순간 위로가 되었던 커피가 그에게는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했다. 

 

카페를 운영하여 커피를 내리고 글을 쓴다는 정인한 작가의 『커피의 위로』는 커피라는 주제 덕분인지 그의 문장력 때문인지 술술 읽히는 책이다. 사실 책의 머리에 커피의 종류가 언급되어 있고, 로스팅, 분쇄, 추출, 드립 등으로 단락을 나눠두셔서 커피에 대한 전문지식을 이야기하는 책인가 생각하기도 했으나, 보다 대중적이고 편안한 문체로 이어지는 에세이여서 단숨에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떤 이야기에는 삶의 자세가 담겨있고, 어떤 이야기에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있다. 또 때때로는 커피나 글 등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계절이 변하는 것을 커피에 녹여낸 점. 대부분 사람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하루를 살아가지만, '태어난 김에 사는' 느낌이 아니라 '담담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라는 느낌이어서 좋았다. 성실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삶, 꿈꾸지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커피 내리고 글 올려요'라는 제목의 글을 읽을 때는 꽤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특히 “앞으로 쓸 수 있는 글이 있다면 그것이 마치 커피와 같았으면 한다. 중력의 힘으로 내려오는 것이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p.185).”는 말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 역시 긴 세월 글 쓰는 사람을 꿈꾸었고, 무엇이든 매일 쓰는 삶을 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쓰기가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너무 많은 콘텐츠, 너무 많은 '스스로 작가'들이 쓴 문장들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처럼, 누군가에게 나의 문장도 이렇게 느껴질까 봐 두려워지기도 하고, 스스로의 만족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 그런데 오늘 그의 글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달까. 과연 나는 맛있는 문장을 쓰기 위해 뜨거운 것을 인내하는 시간을 보냈나, 생각해보며 그의 문장을 천천히 음미했다. 

 

문득 한 선배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 선배 한 분이 종종 커피믹스를 내밀었다. 내가 한숨을 쉬어도, 내가 울어도 그저 후후- 뜨거운 커피를 식혔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 주던 선배님. 사실 나는 설탕조차 넣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사람인데 그때 선배가 주던 커피믹스는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 없는 선배의 커피믹스가 문득 그립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였던 순간이 있을까. 작가님의 말처럼, 특별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누군가에게 커피 한잔만큼의 위로- 커피만큼의 온기만 되어도 우리의 삶은 퍽 괜찮지 않을까. 오늘 작가님의 글은, 잊고 살던 선배의 감사함을- 지나온 시간들을- 그래도 단단히 사는 나의 오늘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충분한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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