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류 속의 섬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동훈 옮김 / 고유명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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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슬퍼요?”

“모든 세상이 다.”

“세상일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세상이란 갈수록 나빠져 가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슬퍼하다니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슬퍼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지”

“막을 수 없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어요.”

토머스 허드슨은 어니스트 릴과의 이러한 논쟁이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필요한 게 뭐야. 이 개자식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취해야만 하는 거야. 네가 필요한 것을 얻을 방법은 없으며 다시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네가 취해야 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야. 자 계속 전진해. 그리고 하나를 잡아. (p.310)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작년 겨울 다시 읽으며 어린 시절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느꼈던지라, 이 『해류 속의 섬들』을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해류 속의 섬들』은 헤밍웨이의 사후에 출간된 소설이자 헤밍웨이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또 「노인과 바다」를 잇는 바다 소설의 완결편이라고 하기에 기대가 더욱 컸던 것. 

 

솔직히 말하자면 「노인과 바다」처럼, 첫 번째 완독으로는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특유의 문장 속에서 토머스 허드슨의 심리를, 그의 세 아들과 얽힌 감정들을, 아들을 잃은 허무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묻어나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안쓰러운 몸부림을 어떻게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내가 우둔한 탓일지도 모른다. 「노인과 바다」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찾지 않았나. 아마 『해류 속의 섬들』 역시 두 번째 읽을 때, 세번째 읽을 때 느끼는 감상이 다르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해류 속의 섬들』을 완성한 후 헤밍웨이가 자살했다는 것을 몰랐다면 감상이 달랐을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무를 방법은 없지만, 인간 자체에 대한 그의 고민을 간접적으로 만나보며 그가 토머스 허드슨을 통해 세상에 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인지를 여러 번 생각해보게 했다. 어쩌면 토머스 허드슨이 술을 마시고 하는 말들은 어쩌면 헤밍웨이 본인이 하고 싶던 말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며, 세상이 슬프다는 말이 더 슬프게 느껴졌다. 

 

(원작을 읽어보지 못했고, 이 이전에 우리나라에 출간된 『해류 속의 섬들』은 한자와 병기된 책이 전부라고 알고 있어서 원작 때문인지, 번역 때문인지 정확한 포인트를 알 길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읽으며 의미가 이질적으로 느껴져 앞의 문장을 다시 읽고 온 일도 있었고, 원작의 단어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게 느껴진 부분도 꽤 있었다. 그러나 『해류 속의 섬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에 집중하며 읽다 보니 또 읽을 만 했다. (완전한 이해를 얻지 못한 것은 나의 몽매함 때문이다. 조금 자존심을 세워보자면 빡빡한 문단 배열과 귀여운 폰트사이즈(!)도 한몫했을지도.)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헤밍웨이의 자전적 소설이자 유작인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정한 고결함은 이전의 나보다 나아지는 것이다”라고 적힌 띠지를 바라보며, 두 번째 『해류 속의 섬들』을 만날 때에는 내가 조금 더 성장해있기를, 그의 깊은 고뇌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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