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카지노 베이비 -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요즘엔 중이 제 머리만 잘 깎고 선무당도 사람 제법 살리거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 운명은 스스로 찾아가는 거다. 무엇보다 이미 넌 스스로 그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니까. 내가 넌 가물이라고 하지 않았니. 그러니 이제 그런 얄궂은 웃음일랑 집어치우고 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좀 잘 들여다봐라. 암, 그건 다른 누구도 해줄 수 없지. (p.44)
“저한테 감사할 것 없습니다. 다 동 여사님께 수임료 받고 하는 일인데요. 그저 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저 제 일을 하는 것뿐이라니, 나는 그렇게 점잖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p.276)
전당포에 맡겨진 채 학교도 갈 수 없는 '그림자 아이'. 이 이야기는 그 아이의 속도에 맞춰 흐른다. 화자가 기구한 할머니도 제삼자도 아닌 열살 가량의 어린아이라니. 그것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라니. 책을 몇 장 펼치기도 전에 이 안에는 세상의 온갖 묵직한 이야기들이 가득하겠구나,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카지노베이비> 안에는 세상의 그림자들이 참 빼곡히도 들어있다. 문을 닫은 산업현장과 그로 인해 같이 죽어버리는 도시, 사람을 블랙홀에 빠지게 만드는 카지노, 그 주변에서 뜻했든 뜻하지 않았든 물건과 돈을 바꾸며 타인의 목숨을 나눠 갖는 전당포, 카지노와 유착된 권력자들, 카지노에 영혼을 팔고 빈껍데기만 남은 사람들, 정전이라도 된 듯 많은 생명을 동시에 꺼버리는 재해. 그리고 그 모든 사람보다 더 기구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는 없는 아이까지. 어쩌면 이 소설 속에는 행복한 얼굴의 사람은 단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소설 자체가 축축 처지는 느낌은 아니다. 마치 역경 속에서도 또 하루를 살아야 하는 서민들의 삶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다. 이 책의 마지막에 무슨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어느 한 줄도 쉬이 놓치지 못할 만큼 독자를 흡입한다. 인물 하나하나의 묘사가 너무 선명해서, 사건 모두를 너무 덤덤하게 풀어내서 오히려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화자를 열 살가량의 아이로 잡은 덕분에, 이 묵직한 소재들이 결코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묘사는 아이가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듯 느리고 세밀하게 표현되었으며, 폭풍처럼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이가 이해한 만큼만 묘사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이며 지독한 가난에서 발버둥 쳐온 할머니의 끝이 슬프지 않기를, 태어나서부터 방치되었던 '나'가 결코 전당포에 맡겨진 불안한 아이가 아닌 가족 구성원으로서 이야기를 마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할머니가 눈을 감는 장면에서, 나머지 가족들이 '폭풍의 눈'에서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되는 장면에서, 하늘이가 학교에 가게 되는 장면에서 그래도 아직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구나 하고 안심했다. (안도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정신 차려, 이건 소설이라고” 하기도 했고.)
'그저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문득 이 말이 가진 무게를 생각해본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당연히 행해지지 않는 말이기에, 작가가 하늘이의 입을 빌려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게 이 채게 담긴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아마 이 순간에도 음지에 서서 하루를 지켜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하늘이처럼 결국에는 힘내기를 간절히 바라며, 또 내가 어두운 마음이 되는 날, '모두 다 그런 거라'하며 털고 일어날 수 있기를.
분명 소설인데 다큐멘터리 같은 현실성, 대본 같은 심리묘사, 사전 같은 명료함에 희망까지 꾹꾹 눌러 담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