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쓴 철학 편지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책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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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하나의 미약한 신체에 불과했다면, 나는 희망 없는 존재였을 거야. 하지만 나에게는 내 신체와 지구에서의 짧디짧은 삶보다 더 깊은 정체성이 있어. (p.106)

그 충만의 순간에 나는 이 세상 모든 것과 하나가 되었다는 일체감을 느꼈어. 내가 단지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 그 자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거야. 이 생각은 미미한 조제인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구나. (p.132) 

 

 

나는 조부모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외조부모는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셨고, 친외조부모는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조부모 사랑에 대한 갈증은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해소되었는데, 내 아이에게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사랑을 남겨주셨기에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주는 사랑과 교훈은 부모의 그것과 또 다른 것임을 이제야 안다. 그래서일까. <소피의 세계> 요슈타인 가아더의 신작 <너에게 쓴 철학 편지>를 읽는 내내 우리 아빠와 아이의 대화들이 많이 떠오르더라. 내 아이에게 깊은 생각을 가르치시는 그 깊은 사랑과 연륜이 묻어나는 지혜 같은 것들이 말이다. 

 

<소피의 세계>가 워낙 큰 인상과 영향을 남긴 책이었기에 이번 책 <너에게 쓴 철학 편지>도 기대가 컸다. 그런데 감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훨씬 더 좋았던 것 같다. 철학, 인류와 지구, 인권이나 환경 등에 대해 총망라하는 깊이 있는 내용도 무척이나 좋았지만 여섯 명의 손주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편지라는 것이 이 책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들은 손주들이, 또 독자들이 스스로 생각을 확대하며 자신만의 관점과 자아를 만들어가게 돕는다.

 

지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초자연적인 힘이나 우연은 어떻게 생기는지 등에 대해 고찰하게 만들기도 하고 숲에서 느끼는 자연의 힘, 시간의 가치 등에 대한 자기 생각을 나누기도 한다. 지속가능한 지구나 진정한 의미의 인권 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이어가기에, 청소년 대상의 책인데도 집중하여 책을 읽게 되었고, 아이와도 여러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제시해주기도 하며 우리 집만의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 책의 원제라는 <지금, 우리, 여기>라는 흔하다면 흔한 단어들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더욱 의미 있는 삶을 만들 수 있을지, '우리'들의 삶이 보다 진정성 있으려면 내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키워가야 하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를 지속 가능하게, 우리의 후손들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등 아주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미 굳어버린 머리를 가진 어른에게도 이런 생각을 확장하게 돕는데 청소년들에게 이 책이 얼마나 선한 영향을 주게 될지 기대가 된다. 하루라도 빨리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공존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나'라는 존재를 숙고할 수 있다면 아이들의 삶은 결코 길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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