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채우는 감각들 - 세계시인선 필사책
에밀리 디킨슨 외 지음, 강은교 외 옮김 / 민음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취미가 독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 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으면서 취미 칸에 독서를 적는 는 '가짜 독서가'들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부리는 오기같은 것. 그러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취미가 독서고, 글씨를 쓰는 까닭도 책의 구절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일까. <밤을 채우는 감각들>의 시를 따라쓰며 내가 밤을 채우는 것인지 감각을 채우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더라. 오롯이 나만 깨어 책을 읽고 쓰는 밤의 식탁에 시를 수놓으며, 눈오는 밤을 감각으로 채웠다. 

 

나의 책장에는 대물림한 나보다 나이 많은 낡은 전집이 몇 질 있는데, (한자와 병행 표기되어있어 옥편이나 아빠를 괴롭히며 읽어야 했다.) 그중 하나였던 '세계시인선'을 다시 여는 기분으로, 조지 고든 바이런을, 페르난두 페소아를 만났다. 그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감정을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느끼며 한글자 한글자 눌러쓰는데, 괜히 찡했다. 역시, 손으로 적는 일은 그저 눈으로만 보는 것과 다른 깊이가 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필사책이 존재하지만 <밤을 채우는 감각들>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가 평소 자주 접하지 않는 세계적인 시인들의 시를 만날 수 있음이다. 에밀리 디킨슨,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조지 고든 바이런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시인들의 문장을 따라 쓰며 그들의 생각을 떠올려보는 것, 그들이 어떤 상황이나 날에 이런 글을 썼을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많은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필사는 책을 깊이 읽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방패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상념이 드는 날, 마음이 슬픈 날, 혹은 오롯이 나에게 귀 기울이고 싶은 날. 가만히 앉아 한 줄씩 따라 쓰다 보면 어느새 온 마음으로 문장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더이상 상념이나 슬픔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밤을채우는감각들> 덕분에 나는 조용하고 깊이 나를 만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