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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필립 프리먼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0월
평점 :

그는 대담했지만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성벽이 무척 튼튼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전혀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휘하 병력과 전초 기지로 그 도시를 포위하고 내부에서 탈출하거나 외부에서 도움을 주지 못하게 철저히 차단했다. (p.75)
대부분 사람은 '한니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이코패스 살인마, 한니발 렉터를 떠올린다. 간이 작아 공포영화를 못 보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사촌오빠가 보고 있어 몇 장면 보게 되었던 '양들의 침묵'을 기억한다. (내가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과 함께) 그러나 사실 진짜 '악명높은' 한니발은 따로 있다. 알프스산맥을 넘어 진격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본디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기록되기 때문인지 한니발 장군은 늘 괴물이나 악마 등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를 카르타고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희생된 국민을 위해 설욕전을 펼쳐준 '영웅'이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시각에서 만난 첫 번째 책이었기에 한니발에 대한 나의 이미지와 로마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수많은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카르타고가 건국되는 과정부터, 그들이 겪는 학살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어쩌면 한니발은 어린 시절부터 침략의 과정을 봐왔기에, 로마에 그 대가를 물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성장했을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의 턱 앞까지 가는 과정을 매우 세세히 다루고 있어, 그의 상황이나 여건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때때로 상대방의 덤덤한 말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의 진행이 너무 덤덤하여 오히려 나는 감정선을 발휘하여 그의 마음을 가늠해보게 되기도 했던 것. 조금 더 다정한 문체였다면 이야기는 한결 풍성했겠지만, 사실을 들여다보는 기회는 적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었다.
작가는 한니발을 괴물로 묘사하는 데 열을 올렸던 리비우스 같은 로마 역사가의 설명에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찾아서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방법은 없는지, 한니발의 생애를 통해 제국주의를 원동력으로 삼았던 로마를 '정복자'로 바라볼 필요도 있지 않은지(p.12)의 고민에서 이 책을 썼다. 아무래도 로마 시각의 한니발은 (많이 출간되기도 했고), 한층 더 극적이기에 그에 비하면 이 책의 재미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엄청난 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분명 재미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남겼다.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은 전쟁광 장수에서,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그렇게 키워진, 그럼에도 강인함으로 자신을 수없이 단련해온 육체보다, 정신이 더욱 건강했던 이로 인식을 바꾸게 한다.
책을 읽고 나서는 사실 연민이 들기도 했다. 만약 한니발의 아버지가 한니발의 앞에서 로마를 증오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카르타고 내부적 상황이 반쪽으로 갈려 혼란스럽지 않았더라면? 지중해 그 어디라도 로마의 편에 서지 않은 나라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의 모든 상황이 그를 전쟁할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간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그를 전쟁광으로 믿어온 것은 아닌지 하는 후회의 마음도 들었고.
이 책은 새로운 시각의 역사를, 매우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는 엄청난 매력도 지니고 있지만, 반쪽짜리 시각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시간도 선물한다. 그래서 읽는 과정이 꽤 걸리더라도, 이 책을 덮고 나서는 '그럼에도 읽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처음 역사서를 읽을 때만 해도 나 역시 흥미 위주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세계적 영웅, 세계적 사건들에 열광했다. 어쩌면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여러 시각에서 역사를 만나고자 하는 나로 변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전쟁 괴물 한니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 이 책의 한니발이 얼마나 새로운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이 책이 당신에게도 닿아, 역사라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만나게 되길 바란다. 물론 당신에게 앞면이 흥미로울지 뒷면이 흥미로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을 통해 역사가 한층 깊게 재미있어질 것은 분명하다. 리비우스 로마사를 분명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제야 그 반쪽이 제대로 맞춰진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