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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날에는 남해에 갑니다 - 사진작가 산들의 버릇처럼 남해 여행, 2023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이산들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6월
평점 :

나의 걱정과 달리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 바다를 보고 있으면 여덟 해 전에 만났던 그 바다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때의 나는 알았을까? 오랜 시간 동안 같은 풍경을 보며 어느 한때를 기억하게 될 줄을 말이다. 어쩌면 남해의 풍경과 바다, 그것만큼 오래 기억하고 싶은 건 두 팔 벌려 작은 프레임을 만들던 그 시절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p.64)
“눈을 뜨면 가슴으로 보여요. 눈감으면 발끝으로 느껴요.” 듣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노래 '그리운 날들'의 한 구절이다. 친구들이 젝스키스와 H.O.T를 좋아할 때 나는 터보(김종국)를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이 노래는 다른 발라드와 결이 다르게 아련해서 눈물이 난다. 타인이 아닌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웠던 시절의 내가 그리운 느낌이랄까. 이산들의 '생각이 많은 날에는 남해에 갑니다.'를 읽는 내내 나는 이 노래가 머리에 맴돌았다. 작가가 남해에 가지는 애틋함이 내게 전해진 까닭일까. 마치 책 한 권이 통째로 그 아련한 그리움 같았다.
망막박리 수술 후에도 빨간 눈으로 남해를 찾았다는 그녀는 자신의 삶에 세상을 허락했다고 한다. 눈 수술이 새 출발을 위한 첫 순서였다고 말하기까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다독여야 했을까. 디스크 판정 후 회사를 등지고 나와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내 마음을, 그런데도 종종 돌아보게 되는 '여유' 있던 순간들을 그녀는 오롯이 이해해줄 것 같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가, 사회적 경력이 내 행복보다 우선하지는 않기에 그녀의 책에서 그녀를 만나며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도닥인다.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책 속 가득한 남해의 사계절이, 남해의 시간이, 그녀가 쌓아온 그 10년의 시간은 이미 충분하다고.
작가가 만난 나무와 공기와 바람, 그 모든 것에는 응원과 격려가 묻어있다. 그녀의 문장을 통해 나도 위로를 얻고 격려를 얻었다. 이 책에 어떠냐 묻는다면, 등산 후, 산 꼭대기에서 만나는 바람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온 마음이 시원해지는 책이라고.
어디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곳이 개성 있고 독특해. 기분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가고 싶은 곳을 골라가며 남해를 여행하곤 해.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한 곳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건 나에게 너무 어려운 질문이야. (p.130)
'남해'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넣어본다. 가령 책 같은. 그녀의 남해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대입해 그것을 온전히 즐겨보는 거다. 종종 책을 읽다가 이렇게 작가의 단어에 나의 단어를 끼워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그 문장이 온전히 마음에 닿는다. 물론 이 책은 그렇게 해보지 않아도 연신 마음에 잔잔한 파도를 던지는 문장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책 뒤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아껴 읽느라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었다. 작가가 담아둔 아름다운 사진, 그 아름다운 사진을 담는 법, 남해 여행의 묘미. 그 어느 하나 허투루 담아둔 것이 없기에 마치 나도 그녀와 함께 남해의 곳곳을 다닌 기분이다.
행복해져야 할 이유를 굳이 찾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자연스레 행복한 사람이 된다. 남해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여기저기 많은 곳을 다니는 것도 좋지만, 마음의 고향 같은 여행지, 한 곳을 두는 것만큼 마음이 따뜻해지고 풍요로운 일은 없다. (p.73)
나를 위한 배터리를 남겨놓으라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서 둥둥 떠다닌다. 어쩌면 긴 세월 나는 나를 위한 배터리는 단 한 줌도 남기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이제야 내 마음도 빨간불을 지나 초록 불에 가까워지려는 어느 시점, 작가는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의 말을 던져주는 것 같다. 행복해져야 할 이유를 찾아 헤매던 나는 이제 더는 없다. 난 이제 정말 행복하니까. 많은 것을 움켜쥐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편의점이 10분 거리에 있어도 행복해하는 남해사람들의 모습에서 또 한 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