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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되어도 출근은 해야 해 - 버티기 장인이 될 수밖에 없는 직장인을 위한 열두 빛깔 위로와 공감
박윤진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5월
평점 :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난 공간, 남에게 불릴 이름이 필요 없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나의 이름표를 떼어내고 사회적 가면을 벗고 나와 내가 순수하게 마주하는 텅 빈 공간. 그 공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자유의 공간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놓고 더이상 다른 사람들과 거래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 인간의 원초적 자유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p.36)
불과 6개월 전이라면 나는 이 책을 꽤 불편한 마음으로 펼쳤을지도 모른다. 벌레가 되어도 출근을 해야 한다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다. 그러나 나는 휴직러. 1의 부담도 없이 이 책을 펼쳤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며, 몇 달간 견고히 다져온 퇴직의 꿈을 굳히기까지 했으니 나는 얼마나 안쓰러운 직장인이었던가. 아, 이 말을 듣고 책을 덥석 짚지 못할 직장인이 있다면 안심해라. 이 책은 퇴직을 종용하지 않는다. 가늘고 긴 직장생활을 하며 아팠던 몸과 마음을 달래는 사유의 과정이니 부디 그대들도 이 책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기를. (심지어 작가님도 나처럼 책을 읽는 것만큼 사는 것도 좋아하신다니 더욱 추천하고 싶다. 일단 사세요. 까르르)
가식적인 삶과 순수한 삶 사이에서의 비틀거림. 홀든의 우울은 그런 아찔하고 까마득한 갈림길 앞에 놓인 사람이 느낄 현기증 같은 게 아닐까. (...)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분명했지만 마치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전혀 모르는 사람인 척 발만 동동거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p.68)
휴직 즈음의 나를 본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소리겠지만,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 그러니 한 자리에서 10년을 넘게 근속했을 것이고,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를 도로를 깔고 집을 짓는 회사에서 꽤 인정을 받으며 근무할 수 있었겠지. 분명 나의 우울감과 지침은 한순간에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조차 모르는 척 지내왔을 뿐, 차곡차곡 거의 매일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터져버린 것이었다. 건강에도, 정신에도.
12권의 책과 1개의 애니메이션을 빌어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책은 구절구절이 내 이야기 같았다. 승진 누락으로 밀려온 우울감, 취미고 성격이고 사라진 직장생활, 회사의 부품이 된 듯한 느낌, 심지어는 직장 스트레스로 가족에게 화풀이하는 미친 용기까지.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끄덕임과 반성을 번갈아 하며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온 것들을 다소 충동적으로 터트리고 휴직을 시작한 내가 느꼈던 것은, 속시원함보다는 회사에 가지 않아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놀라움이었다. 나도 회사도 너무나 일상적이라 사실은 적잖이 놀랐다. 이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렇게 목숨 걸듯 열심히 일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때 이 책을 보았더라면 벌레처럼 악착같이 버티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솔직히 지금 당장은 걱정이 없지만, 금전적인 문제나, 집에서 무료함을 느낄 때 나는 한 번쯤 퇴사를 결심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과도한 업무량, 부당한 지시사항, 차별 등의 문제에 흔들리면서도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하고, 나는 나의 결심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내가 할 최선이다.
행여나 당신도, 6개월 전의 나처럼 마음이 휘청거린다면 자신의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도 된다. 나처럼 회사를 박차고 나와도, 정말 대단히 큰일 나지는 않는다는 거다. 원래 '해결'은, '사고' 친 뒤에 하는 거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아직은 버틸 수 있을 만큼만 휘청거리고 있다면, 이 책처럼 자신만의 방법을 찾기를 바란다. 그것은 책이어도 되고 아니어도 된다. 더러운 회사생활이지만 아름다운 월급봉투가 있지 않은가. '예방'은 사고 치기 전에 하는 거니, 이 책은 당신의 퇴사예방서가 돼줄 거다. 예방할 생각이라면, 더 많이 금 가기 전에, 서둘러 외양간을 고칠 것! 이 책을 망치 삼아.
아, 그나저나 아직도 안 자고 이 리뷰를 읽고 있는 당신!
“내일 월.요.일 이야. 심지어 연휴 뒤 월요일!” (휴직자의 여유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