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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예리한 시각과 탄탄한 짜임새로 원작을 유려하게 풀어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조종상 옮김 / 도서출판소리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노인은 또 한 번 시도했고, 결과는 똑같았다. 곰곰이 생각해본 노인은 그것이 맞는 방법이라 판단한 뒤 다시 시도하려 했다. 한 번 더 해보는 거야. (P.144)
좋아하는 구절이다. 살며 지치는 날, 나는 이 소설을 몇 번이고 읽었던 것 같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모르긴 몰라도 책 좀 본다는 사람 중 노인과 바다를 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인과 바다가 왜 명작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는 듯하다. 나 역시도 처음 한두 번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멸치처럼 볶이고 돌아가는 길, 오디오북에서 흘러나오는 저 구절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성우가 읽은 오디오북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 번 더 해보는 거야.”라는 구절이 그렇게 힘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 책을 만났다. 다소 생경하게 느껴진 것은 할아버지 곁에는 “소년” 대신 “청년”이 있다는 것. 사실 처음에는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어차피 이 책은 자신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는 노인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소년 역시 가난한 집에서 외로이 자라기에 노인과의 관계에서 애정을 찾는다 생각해왔으나 그를 청년이라 생각하니 자신이 걷는 길을 먼저 걸은 선배에 대한 동경의 행동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노인도 “신념을 가졌으나 이미 약한 존재”가 된 노인이 아니라, 평생 한길을 묵묵히 걸어온 “장인” 느낌이 강해졌다.
그 선택은 덫이나 함정, 속임수가 미치지 못하는 더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 머무르는 것이었겠지. 나의 선택은 이놈을 찾아 그곳으로 가는 것이었고. (...) 그렇게 우리는 만났고. (P.66)
어떤 면에서 이 세상 모든 건 다른 걸 죽이는 것 아닌가. 가령 고기잡이는 나를 살게도 하지만 분명 나를 죽이는 일도 하거든. 그러고 보니 마놀린도 나를 살게 하는구먼. (P.129)
노인은 마놀린을 떠올리다 더는 생각이 멀리 나가면 안 되겠다고 머리를 털어낸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이 문장을 통해 청년이 노인에게, 또 노인이 청년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주는 것인지를 분명히 짚은 느낌이다. 망망대해 작은 배 위에서 그는 많은 생각을 내뱉는다. 그 생각들은 바다나 물고기, 청년 등 좁은 시야지만 절대 얕지 않다. 마치 바다의 깊이 같다. 오래 바다 위에서 살아온 이답게 그는 이미 바다를 닮아있는 것이다. 바다 그 자체인 것이다. “노인은 물고기를 생각하는 게 좋았고, 만약 자신이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면 상어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았다. (P.139)”에서 느낄 수 있듯 노인과 바다에는 경계선이 없다. 분명 헤밍웨이가 묘사하는 노인은 듣거나 본적 없는 큰 물고기와의 사투를 벌이고, 그것의 대부분을 빼앗긴 채 패잔병처럼 돌아오는 모습이지만, 그것을 읽는 나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불분명하듯, 노인과 바다의 경계 역시 그러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청년과 새로운 계획을 나눌 때는 맑게 갠 바다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노인의 바다일까, 청년의 바다일까.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청년이 노인이 되고 또 청년에게 다시 자신을 들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바람은 우리의 친구야. 우리의 친구와 우리의 적이 함께하는 위대한 바다. (P.143)
얼마 전, 한 글에서 내가 평생에 걸쳐 잘한 것은 딸을 낳은 것과 꾸준히 책을 읽는 것뿐인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내 마음이 비약적이었을 테지만, 보송보송한 지금 돌아보아도 다른 게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득 오랜만에 다시 만난 노인에게서, 이미 빼앗겨버린 물고기의 흰 뼈에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타협의 용기를 얻는다. 그저 꾸준한 것, 그것도 무엇인가 이룬 것은 아닐까. 어쨌든 책은 우리의 친구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