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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표상의 지도 - 가족, 국가, 민주주의, 여성, 예술 다섯 가지 표상으로 보는 한국영화사
박유희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10월
평점 :

시장에서 소녀에게 동전을 던져주던 사람들이 모두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느라 심장에 손을 얹고 멈춰선 순간, 소녀는 이 땅에서 갈 곳이 없어진다. 그래서 자신을 강간한 이조차 오빠라 부르며 따라붙었던 소녀가 사람들 사이를 무연히 걸어갈 때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공범자가 된다. (P.120)
'책과함께'출판사에서 이 책을 SNS에 올리시며 “솔직히 조금 어려운 책. 그러나 영화광들은 환영할 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나는 “어렵지만 빨려드는 책. 영화광들뿐 아니라 근현대사에 관심 많은 이들이라면 빨려 들어갈 책”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다. 맞다. 쉬운 책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100년을 드러난 주제, 표현이나 표상의 변천사, 이념이나 사상, 시대적 흐름까지를 짚어낸 책이 쉬우면 우리의 100년이 너무 가볍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지나온 100년이 급변의 세월이었던 듯, 우리 영화가 지나온 100년 역시 우리의 삶을 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 100년의 세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담겨있다.
소녀 같은 눈망울 안에서 들끓고 있는 광기가 더해질 때 '엄마 김혜자'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한국사회의 엄마 이미지를 중층적으로 품으면서 모성의 이중성을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P.50) / 여성 캐릭터를 본질적인 모성성의 차원에서 포착하여 감정이 앞서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미지로 재현하는 관습은 법정영화에서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다. (P.419)
이 책을 읽은 후, 수많은 이미지를 떠올려보았다. 책에서 제시하는 가족, 국가, 민주주의, 여성, 예술 등을 떠올렸을 때 가족을 제외하고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떠올리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가족이야 내가 워낙 밀첩히 닿아있는 부분이니 내 가족이 먼저 떠올랐지만, 그 이후에 영화나 드라마, 책 등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의 가족을 떠올림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단순히 '연습 된 뇌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제까지의 나라면, 지금부터는 '영화에 담긴 시대상과 이념의 학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보는 매체'였던 영화가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수많은 서사를 영상화한 매체'라는 인식변화를 준 것 자체가 매우 큰 의미가 아닐까.
이제는 영화 한 편을 봐도 그냥 영화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 캐릭터들이 가지는 역할, 그 너머의 이념 등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는 내게 있어 '텔레비전'과 비슷한 존재가 아니라 '책'과 비슷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플롯이나 만듦새가 관습적이어서 진부하든, 실제 사건 이상을 담아내지 못했든, 이 영화는 한국영화가 미국을 재현해온 역사에 의미 있는 변곡점을 드러내고 있다. (P.194) / 영화에서 각종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 시대 영화에서는 결코 모호해질 수 없었던 '귀순'과 '잠입'의 구분, '국민'과 '간첩'의 분별 등이 어려워지면서 아군과 적군, 선과 악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P.228)
당연한 말일지는 모르나 영화는 시대를 담는다. 물론 책이나 음악도 마찬가지다. 고쳐 말하면 문화는 시대를 담는다는 것이 맞겠다. 그래서 잘 만든 영화 한 편, 잘 쓴 책 한 권에서는 세상을 한 단락 만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받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가 지나온 길을, 우리나라에서 특정 단어가 지니는 의미가 변화해온 과정을, 시대의 이념이나 사상을 모두 만났다. 나의 좁은 식견으로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를 아우르며 '한국영화 100년'이라는 제목쯤의 다큐멘터리 한편을 본 듯 많은 이야기를 얻었다.
며칠간 고전하며 읽은 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결코 힘든 시간은 아니었다. 책에만 몰두하여 다소 무시해온 '영상매체'에 대한 새 발견이었고, 읽어온 책들과 영화가 만나 새로운 서사를 만드는 요긴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