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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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의 결에 따라 많은 생각이 스쳐 간다. 자유로웠고, 쓸쓸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충만했다. 혼자 걸으며 무수히 많은 것들을 채집한다. 물리적인 것들을 사진으로 수집하고, 둥둥 떠다니는 대책 없는 마음을 애써 메모로라도 부여잡는다. 외로움이 아닌 고독을 그렇게 지켜간다. (p.62)

 

봄빛이 가득한 연 오렌지의 표지. 제주도. 여행기. 사실은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펼친 책이었다. 그저 신나고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하겠지, 하는 얕은 기대감이랄까. 이 책을 읽으며 눈물 콧물 흘리는 나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모슬포 같은 마음을 털어내고자 혼자 떠난 제주도. 제주를 걸으며 자신의 지나온 길을 다시 걷고, 바다를 보며 50년이라는 삶을 되돌아보는 일기 같은 책이다. “내가 아닌 나는 될 수 없지만(p.27) 찌그러진 마음이 조금 펴지고, 어둡게 밝아 적당한(p.5)”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게 짠한데 때때로는 달콤한 유배기. 그리고 그 여행에서 그녀는 결심한다. “바람이 분다고, 나를 향해 부는 것이 아닌 것을. 겁먹고 살지 말자. (...) 개 떨듯 떨더라도, 뛰쳐나오고, 걷고, 살자. (p.61)”고.

 

어린 시절의 한 순간순간이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우리가 쉬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어른의 순간도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꽤 괜찮은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어른이 되어 겪은 순간순간이 여전히 아프고, 버거웠는데 나는 그것을 스스로 인정해주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니 벗어나는 길도 눈에 들어왔는데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작가는 나보다 한발 앞서 이미 자신의 터널을 잘 빠져나오고 계심을 느꼈다. 같이 울고 웃으며 나도 이제 그 터널에 발을 디딜 용기가 나더라. 

 

 

느슨한 일상과 느린 걸음, 푸근한 자연은 걸음을 잡아주었다. 나하고만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생활은 안팎으로 여유를 주었다. 심장이 느려졌다. (...) 영혼이 잘 따라올 수 있게 느리게 걸어야지. 조금 더 느리면서 열렬한 생활을 격하게 누려야겠다. (p.145) 

 

숲이 너무 좋아 나도 숲인 것처럼, 나도 자연의 하나로 배어든 것처럼 자연을 편드는, 식물과 동물을 편드는 생각이 걸음을 따라 이어졌다. (p.178)

 

느리게 살기. 사실 요즈음의 내가 가장 격렬히 지지하고 있다. 음악도 듣지 않고 책을 보지도 않은 채 가만히 커피만 마시기. 그냥 가만히 앉아 창밖을 보기. 요즈음의 지지하는 내 삶의 한 조각. 막상 해보니 아무것도 어려울 것이 없었는데 그동안의 나에게는 왜 그리도 남 이야기 같았을까. 작가의 말처럼 “나를 꼭 쥐고 있는 그 무언가! 그건 바로 나(p.6)”였음을 다 놓아보고서야 아는 미련함을 이제야 실컷 부려보는 중인 거다. 그러면서도 종종 친구에게 마흔을 목전에 두고 나는 왜 이러는지 쓸쓸한 웃음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느린 삶을 조금 더 지속할 예정이다. 내 영혼이 잘 따라올 수 있게 말이다. 책의 나이가 현재형이라면 나와 띠동갑일 작가님을 핑계로 조금 더 느린 나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찮은 글도 읽히면 괜찮은 글이 된다는 작가님의 말처럼, 나도 언젠가는 바다처럼 짜고, 귤처럼 달콤한 이야기를, 내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조금 더 '나'로 잘살아 보아야겠다.

 

작가님. 저 오늘부터 작가님 팬 할 거니까, 일단 술이나 한잔 다정하게 따라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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