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평점 :

동시대인들은 미켈란젤로가 슬픔과 절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그는 정말로 절망했고 고령에 너무나 외로웠다. 이제 친구가 없었다. (p.81)
미켈란젤로. 아마 그림이나 종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알 듯하다.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그리고 <피에타>와 <다비드>. 그의 작품은 어느 하나 유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하!”하는 경탄이 흘러나온다. 내가 아직 어린 시절, 그가 <최후의 심판>에 고뇌하는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고 하는 글을 읽고 “이정도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무슨 고뇌를 하는가. 물론 창조는 힘이 들겠지만, 이정도 작품을 낳을 수 있다면 매일 손뼉을 치고 다닐 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오랜 궁금증을 풀어낼 책을 드디어 만났다.
사실 미켈란젤로나, 대성당, 바티칸에 관련된 책은 꽤 많이 읽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매우 새롭다. 보통의 책들은 정점을 기록하고 있기에, 미켈란젤로가 소위 가장 잘나가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70세에서 88세에 이르는 마지막 생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예술가로서의 찬란한 시절은 한 끗 비껴갔을지라도 그의 일상과 생각, 예술과 종교에 대한 신념을 제대로 만나볼 수 있다. 어쩌면 이제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내게 이 책은 말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잘 걷고 있는가.”
피렌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신심을 웅변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애초에 그 자신의 무덤에 묘표로서 그 쓰임새를 의도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거기에 딜레마가 있었다. 그 조각을 완성한다는 것은 대리석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죽음에 숙명 해야 했다. (...)그러나 여러 기술적 심리적 이유 탓에 이 작품은 미완으로 남을 운명이었다. (P.243)
생각해본다. 그는 무슨 이유로 이 작품을 그리도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왜 <피에타>를 포기했을까. 그리고 칼카니가 이 작품을 보수하지 않았더라면, 그 앳되고 아름다운 성모마리아님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피에타>를 처음 볼 때 (물론 실물은 못 봤지만) 미완성인 것도, 예수님의 다리가 한쪽이 없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너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 성모마리아님의 얼굴의 깊은 감정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런저런 생각이 나를 휘감는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만들 때, 가슴이 매우 아프지 않았을까. 고뇌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불완전함을, 스스로 미완의 인간임을 아파한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은 꽤 두꺼움에도 순식간에 읽혀지는 책이다. 며칠만에 나는 이 책을 두번 반복하여 읽었다. 처음에는 그저 술술 읽었고, 두번째에는 기존에 알던 이야기까지 살을 입혀 그의 마음을 좀 더 고스란히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수십년을 함께 한 지기를 잃고, 가슴아파하는 그의 편지들을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슬픔의 한 가운데에서 홀로남은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그가 처음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그저 나같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느껴져 그의 작품들이 더 대단함으로 느껴진다면 역설일까.
그 어떤 변경도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이라는 사실과 평가를 흔들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로서는 어떤 구체적 형태를 설계하는 것보다 교회의 온전한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교회였고 그는 하느님의 건축가였다. (p.362)
어떠한 문헌을 보더라도 그가 하느님의 건축가였음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않고서야 고된 천정화를 그렇게나 많이 그릴 수 없을 테다. 디스크를 앓으면서도 천정에 그림을 그린다니. 책조차 들지 못하겠다고 가벼운 책만 읽은 내가 부끄러울 정도의 열정이다. 아니 열정이라는 단어도 너무 약소하다. 그것은 그저 하느님께 순명하는 삶, 그 자체였다고 보인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히도 그가 그런 삶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이 늘 곁에 있었다. 아마 하느님께서 그에게 사람으로서 보답하신 게 아닐까. 당신의 집을 짓는, 당신을 위한 건축을 하는 숭고한 예술가를 그래도 홀로 두지 않겠다는 대답이지 않으셨을까.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당시, 그의 결의도 결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고, 이제 그 사랑이 나의 모든 희망(p.375)>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서 그의 신념을 정확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들을 그 성당에서 함께 하며 외로움 대신 성취를 안겨준 것도 하느님의 대답이었다고 생각된다.
미켈란젤로는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그가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기대되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p.378)
책의 끝에 가까워질 무렵, 나는 이 책이 얼마 남지 않음이 너무 아쉬웠다. 읽으면 읽을수록 명사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위대한 작품 뒤에 가려진 그의 삶이, 그리고 그의 지인들이 사실은 그 모든 작품의 밑거름이었구나, 싶어서 온 마음이 묵직해졌다. 우르비노, 리오 나라도, 칼카니. 그들이 그에게 어떤 역할이었는지, 또 하느님이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한문장 발견했다.
사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안식월을 보내고 있다. 가만히 빈둥빈둥 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늘 무엇인가 조바심내듯 살아온 나에게 처음으로 쉼을 선물한 것이다. (물론 디스크가 가장 큰 원이었겠지만) 그래서일까. 나는 그저 “쉼”에 집중해있었다. 혼자 햇빛을 쐬러 나갔고, 혼자 걸었으며-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술잔을 기울였다. 애인과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고, 커피잔을 사이에 놓고 걱정도 긴장도 없는 수다를 떨었다. 밀린 영화와 드라마도 잔뜩 보고, 사놓고 보지 못했던 만화책도 잔뜩 읽었다. 그림책 수백 권과 역사 만화책 백여 권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무거운 책은 한 권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안식월 사이, 이 책을 읽고 싶어 나는 조바심을 냈었다. 아픈 목을 참아가며 많은 책을 읽어냈고, 이 책도 두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를 너무나 잘했노라고. 반드시 읽었어야 할 책이라고. 항상 나의 “궁극적 아름다움”이었던 하느님과 미켈란젤로를 만났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유지만 삶에서 “성취”가 가지는 묵직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또 좌절하기도 하고 상실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은 매일 새로운 삶을 부여받고, 곤경을 딛고 일어서며 나아간다. 아마 미켈란젤로 역시 그런 과정들을 겪으며 그저 살아냈을 테다. 자신의 작품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도 살만한 삶임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으니 나는 아직도 다시 나아갈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 최고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