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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평점 :
곧 나와 내 가족과 친구들은 서로 잘 이해하게 되었다. (P.184)

과연 걸리버여행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 생각해본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걸리버여행기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지도 생각해본다. 물론 나 역시 아주 어릴 때도 걸리버여행기를 읽었고, 학창시절에도 읽었는데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아 걸리버여행기가 이렇게 심오했구나, 이렇게 깊은 이야기였구나!"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어릴 때에는 그저 소인국과 거인국을 여행하며 다른 모습의 사람들과 친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인간의 양면성과 타인에게 보이는 경계심 등이 보여 씁쓸함과 속상함이 동시에 들었다. 소인국이야기에서 많이 생각한 것은 보수와 진보. 사실은 정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빠짐없이 거론 될 수 밖에 없는 주제일 것이다. 그 오래 전에 쓰여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진보와 보수는 지금과 약간 다를 수도 있겠지만, 풍자적으로 그것들을 비유하고 있음에 무릎을 탁 칠 정도였다. 자유롭고 용감한 이들을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걸리버의 모습보다는 그를 이용하고, 선한 이들을 악용하는 왕의 모습은 우리네 정치인들의 모습 같아서 마음이 썼다.

두 번째로 거인국에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법 앞에 동등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받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현실에서 느낄 때가 많다. 걸리버가 매우 큰 사람들 사이에서 본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스스로 느끼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시렸다. 마치 암담한 현실에 부딪혀 좌절할 때의 나 같은 느낌이랄까.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이들에게는 강하고, 우리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약한 존재가 된다. 그게 얼마나 비열한지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간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점에서 마음이 힘겨웠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내용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질투가 났다. 그래서 또 한번 나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 그대들의 정부와 법이라는 제도는 명백히 이성의 중대한 결함에서 생겨났네. 또한 미덕의 결함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지. 이성적인 동물을 다스리는 데엔 이성만 있으면 충분한데 말일세. (P.317)
아. 이 말은 진짜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이성적인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이성만이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산다. 그래서 쓸 데 없는 규칙이나 강요, 기타 등등의 것들 것 수없이 갖다 붙이곤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를 많이 돌아봤고, 나의 생활이나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사실 걸리버여행기를 4번째 읽는 것이었는데, 이 책이 왜 대단한 풍자소설인지를 이제야 깨닫는다. 그 속에 숨은 엄청난 이야기들을 이제야 제대로 느낀다. 조지 오웰이 왜 그렇게 극찬을 했었는지, 왜 금서가 되었는지 이제서야 느낀다. 만약 당신이 아직도 제대로 된 걸리버여행기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제발, 부디 이 책은 읽어야 한다. 조금 강력하게 말한다면 이 책을 읽지 않고서 고전소설을 논할 자격이 없다. 지금껏 고전을 읽겠다고 까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독서였다.